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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50)화 (5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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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네가 은밀히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무감정한 시선을 마주한 하녀가 일순,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는 익제가 아니었다. 그의 처소에서 일 년 넘게 일한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제야 심장이 지끈지끈 조여들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정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기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익제의 말에 하녀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조용히 숨만 삼켰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에 숨이 막혔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린 문 너머에서 강한 햇살이 쏟아졌다. 그녀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와 동시에.

“!”

하녀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녀의 두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잇새로 흘러나오던 숨이 멈추었고, 그녀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삼순아…….”

어미가 피 칠갑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원망스럽고 안타까운 눈동자는 어찌하여 그런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느냐고 묻는 듯했다. 

그녀의 아비는 끙끙거리는 신음만 흘릴 뿐 제대로 된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한쪽 팔이 덜렁거렸다.

“어머니, 아버지…….”

하녀가 망연하게 중얼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익제는 처음과 다름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무심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원진.”

“예.”

원진이 지체 없이 검을 빼 들었다. 삼순은 반쯤 넋이 나간 눈으로 원진의 행동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원진이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마치 도마 위에 놓인 무라도 자르는 것처럼 아주 일상적이고 평온하게.

“…….”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삼순은 그 검이 아비의 목을 긋는 것과 아비의 목에서 붉은 핏줄기가 솟구치는 걸 묵묵히 지켜보았다. 

털썩, 아비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으아아아악!”

마침내 삼순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그녀의 어미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삼순의 어미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듯 체념한 얼굴로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주, 주인님! 주인님!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삼순이 창살 사이로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녀는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자가 건네준 약을 익제의 차에 몰래 타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당분간 운신하기는 힘들겠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그 대가로 금 열 냥이라 하였으니 궁핍한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선수금으로 받은 금 한 냥을 모두 탕진한 뒤라 이제 와 발을 뺄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 즉시 후문으로 나오면 그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는 익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자신을 숨겨주기로 약조하였다. 

바로 은원군보다 더 대단한 집 안의 하녀가 되는 것이었다.

“원진.”

익제가 다시 한번 원진을 불렀고 삼순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가 “말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모두 말하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실은!”

그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쉬익.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렸다. 익제가 본능적으로 벽에 몸을 붙였다. 원진이 재빨리 자신의 몸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삼순아!”

비통한 외침에 삼순의 고개가 기름칠하지 않은 바퀴처럼 삐걱삐걱, 돌아갔다. 어째서 어미가 저리 울고 있을까,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던 삼순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혹은, 불에 덴 듯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천천히 시선을 떨구었다. 심장에 박힌 화살대가 보였다. 

누가?

그녀의 눈동자가 창을 향했다. 나무 이파리가 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바람이 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익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난감한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소행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아아.

뒤늦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애초에 그녀는 한 번 쓰고 버리는 장기 말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숨겨주겠다는 약조도 거짓이었는지 모른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던가.

쓰라린 후회가 삼순의 발등을 찍었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스르륵, 그녀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삼순은 있는 힘을 다해 창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부릅뜬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며 입술이 달싹였다. 

“그, 자…….”

하지만 그 말은 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삼순의 잇새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고 그녀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기습이다!”

원진이 벽력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뇌옥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병들이 황급히 검을 빼 들며 그의 뒤를 따랐다. 

“하.”

익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삼순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남편과 딸을 잃은 박복한 팔자의 여인이 그대로 정신을 놓고 쓰러졌다. 

익제는 그녀를 뒤로 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감옥 문 앞에 선 그가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오래된 은행나무에서 멈추었다. 뇌옥의 창이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위치였다.

익제가 아래턱을 꽉 다물었다. 빌어먹을, 저열한 욕설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송구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한참 후, 그곳으로 돌아온 원진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익제의 얼굴이 더없이 섬뜩한 빛을 띠었다.

“백주 대낮에 정체불명의 괴한이 침입했다. 그리고 활을 당겼다.”

그 말의 심각성을 알고 있는 원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익제의 잇새로 냉소 섞인 빈정거림이 흘러나왔다.

“이러다 자객이 내 목을 따도 두 눈 뻔히 뜨고 보고만 있겠구나.”

“……송구합니다.”

원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다. 익제의 기운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그가 별안간 등을 돌리더니 감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익제는 뒤따라 들어온 사병을 향해 “문을 열라.”고 명했다. 잔뜩 긴장한 사병이 열쇠 꾸러미를 꺼내더니 덜걱거리며 감방의 자물쇠를 풀었다. 

끼이익.

익제가 허리를 숙이고 감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슬 퍼런 눈으로 하녀의 가슴에 꽂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다음 순간, 익제가 한 손으로 화살대를 잡더니 단번에 그것을 뽑았다. 퍽 하고 피가 튀었다. 붉은 핏자국이 그의 포를 흥건하게 적셨다.

“…….”

익제는 화살촉까지 까맣게 칠해진 화살을 보며 무감정하게 중얼거렸다.

“햇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화살대부터 촉까지 검게 옻칠을 했다.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군.”

“죄송합니다.”

원진이 다시 한번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속삭였다.

“네가 은밀히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그가 원진에게 화살을 건넸다. 원진은 무슨 명이든 내려만 달라는 듯 결연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

“제가 먼저 먹어 보겠습니다!”

익제의 젓가락이 고기반찬으로 향하자, 채선이 얼른 제 젓가락을 뻗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그가 찌푸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우물우물, 고기반찬을 꿀꺽 그녀가 “이제 드셔도 됩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탁.

“…….”

익제가 거친 소리를 내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심기가 언짢아진 것을 눈치챈 채선이 덩달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슬그머니 익제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 그녀의 어깨가 슬며시 움츠러들었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익제의 목소리는 더없이 싸늘했다. 그녀가 향덕원으로 온 이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다. 

아니, 그것은 산골에서조차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때도 심술궂고 냉랭하긴 하였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심한 채선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익제는 성난 기색을 숨기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채선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혹시 독이 있을까 염려되어…….”

“하.”

익제의 잇새에서 서늘한 웃음이 터졌다. 그가 번들거리는 안광으로 채선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어깨가 점점 더 좁아졌다. 저러다 아예 어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만큼.

“그래서 독이 있으면?”

느리고 선득한 그의 목소리에 송하는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혔다. 폐가 짜부라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말로만 듣던 살기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송하가 온몸을 덜덜 떨었다. 도영이 그런 그녀를 보며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힐끔, 눈동자만 든 채선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제가…….”

“왜? 먹고 죽기라도 하려고?”

익제의 냉소 섞인 핀잔에 그녀가 얼른 두 손을 저었다. 놀란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발긋하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닙니다! 저는 독에 내성이……!”

“만약 그것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독이라면?”

익제의 음성은 점점 더 거칠고 사나워졌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려는 듯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썩 성공적이진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잇새로 살벌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어디서 공수했는지 모를 독이라면. 생전 처음 보는 독이라면. 그래서 내성이고 나발이고, 치명적으로 작용한다면?”

마치 시정잡배 같은 투박한 언사에 채선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익제의 기세는 누그러지지 않았다. 아니, 누그러지긴커녕 더욱 위험하게 뒤틀렸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를 짓씹듯이 내뱉었다. 으깬 목소리가 독하고 척박했다.

“그래서 부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고 춤이라도 출까?”

“……잘못하였습니다.”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채선이 하얗게 얼어붙은 채 더듬더듬 사과했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물러설 익제가 어쩐 일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한껏 이죽거렸다.

“부인이 나 대신 독극물을 먹고 죽어 버리면 나는 새장가를 들 수 있으니 좋겠군. 그래, 어디 한 번 마음대로 해 보시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채선이 시무룩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처지고 입매가 삐죽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또 한 번 모진 말을 던질 것 같던 익제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번에는 꽤 성공적이었던지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저승에서 피눈물 흘리며 내가 새장가 드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두 번 다시 그런 짓은 하지 마시오.”

“……예.”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익제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길어지는 침묵에 채선이 힐끔, 눈동자만 들었다. 

그와 그녀의 시선이 마주쳤다. 익제가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던졌다.

“그대는 그대를 가장 최우선으로 둬야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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