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9)화 (49/131)
  • 16643786708177.jpg

    49

    저를 너무 쉽게 보셨습니다.

    원진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건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 혼자서 되뇌는 결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힐긋, 그가 눈동자만 들어 익제를 쳐다보았다.

    별안간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나 그의 눈매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대에 부응해줘야 하지 않겠나.”

    원진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쪽에서 먼저 행동하길 기다리는 건 끝이다. 이제는 이쪽에서 먼저 움직일 것이다.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권력, 그걸 손에 쥐어야겠다.”

    “……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력.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자명했다. 원진은 침상 위에 누운 채선을 바라보았다. 스스로 몸을 낮춘 잠룡을 물 밖으로 끌어낸 그녀를. 

    모든 것은 그녀에게서 시작되고, 또한 그녀에게서 끝이 날 것이다. 

    불현듯,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 계집의 부모를 잡아 와라. 형제가 있다면 형제도 끌고 오라. 은밀히 움직일 필요는 없다. 상대가 누구든, 나도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는 걸 알려줘야지.”

    “예, 주군.”

    그때였다. 채선의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그녀에게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익제가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그 행동에 원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익제는 그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채선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익제가 두 손을 들어 그녀의 늘어진 손을 꼭 붙들었다.

    “부인.”

    그가 애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떨리던 속눈썹이 멈추었다. 채선은 다시 잠이 드는 듯했다. 

    익제는 애간장이 타는 기분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수천 번의 찰나가 마치 억겁과도 같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심채선.”

    그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채선.”

    그 순간, 그녀의 속눈썹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서서히 밀려 올라갔다. 그 사이로, 익숙한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주 느릿하게.

    세상이 몇 번이나 바뀔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눈동자는 “채선.”하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마침내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돌려 익제를 바라보았다. 반사적으로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웃던 그녀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째서 저런 표정이실까.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입술을 달싹이려는 채선의 머릿속으로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저는…….”

    무심코 말을 뱉던 채선이 도로 입을 다물었다. 목구멍 안쪽이 타는 듯이 뜨거웠던 탓이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땅처럼 건조하고 메마른 느낌이 났다. 쇳소리가 목을 긁으며 나왔다.

    채선은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입안에 고인 침을 힘겹게 삼킨 그녀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익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화가 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심기가 꼬였다. 이런 꼴을 당하고도 괜찮다고 하는 그녀가 답답하고 못마땅했다. 

    그가 막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채선이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저를 너무 쉽게 보셨습니다.”

    그 뜬금없는 말에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반대로 채선은 가만히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운이 나쁜 건 알고 계시죠?”

    “그 때문에……!”

    익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채선이 그녀답지 않게 그의 말을 잘랐다.

    “독을 먹은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일순, 익제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음독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고, 그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채선이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우연히 따 먹은 버섯이 독버섯이었던 적도, 허겁지겁 먹은 음식이 상한 것이었던 적도, 약초를 따다 독사에 물린 적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어 온갖 독이란 독은 다 먹어 보았을 겁니다.” 

    으스대듯 어깨를 움찔거린 그녀가 여유로운 눈으로 익제를 돌아보았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채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지 않습니까? 아마 죽었다 깨어났다, 죽었다 깨어났다 하는 동안 내성이 생긴 모양입니다. 이제는 독사에 물리거나 독버섯을 먹어도 사경을 헤매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하.”

    익제의 잇새로 한숨이 터졌다. 그것은 김이 빠진 것 같기도 했고, 안도한 것 같기도 했으며, 한편으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만 가지 독에 내성이 있는 여인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때.

    “!”

    채선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다급하게 숨을 들이쉬며 두 눈을 크게 떴다. 풀어졌던 익제의 어깨가 다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가 침상 곁으로 바짝 다가가 앉았다.

    “무슨 일이오?”

    하얗게 질린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익제가 문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여봐라, 지금 당장 의원을…….”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채선의 망연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 냉차는……?”

    그녀는 그제야 독극물의 목표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익제의 표정을 보고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눈치챈 채선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익제는 다시 한번 한숨을 터뜨렸다. 자신이 독을 마셨을 때는 배알 없는 사람처럼 웃던 그녀였다. 그런데 익제가 목표였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하늘이 무너진 듯이 놀랐다. 

    그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이 어리석은 인간아, 그리 속없이 착한 주제에 용케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았구나.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로다.

    속으로 채선의 험담을 지껄이는 익제의 눈매는,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웠다. 

    본인보다 저를 더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허한 심장에 무언가가 들어차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따뜻한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처럼 손끝에도 서서히 온기가 돌았다. 

    “…….”

    반면, 채선은 새파랗게 질린 눈으로 천장을 노려보다 이윽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익제를 바라보았다. 

    “익제님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 대뜸 익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채선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불운이 아니었다면 독이 든 냉차는 영락없이 익제의 차지였을 테니.

    채선은 그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불행을 자신이 모조리 덮어쓰리라 다짐하며 다시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매끈하게 사포질 된 나뭇결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두 사람은 각자의 이몽에 빠졌고, 채선은 오래지 않아 곧 잠이 들었다. 

    “한 가령.”

    그의 부름에 한 가령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한 가령은 익제의 침상을 차지한 채선을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았다. 마음에 차지 않는 안주인이기는 하였으나, 그녀가 익제의 목숨을 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담장의 오얏나무.”

    “?”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한 가령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얏나무라 하면, 채선이 이 집에서 도망칠 때 사용했던 나무를 이르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갑자기 그 나무 이야기가 왜 나왔냐는 것이다.

    익제의 잇새로 생각에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나가던 고승이 그 나무는 베지 말라 하였다지? 후에 쓰임새가 있을 거라고.”

    “예. 알고 봤더니 그냥 고승이 아니었습니다. 법력이 무척 높은 승려였습니다.”

    “그를 찾아라.”

    “……예?”

    노련한 한 가령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십수 년 전에 스쳐 지나간 그를 이제 와서 어찌 찾는단 말인가. 희미한 기억 속으로 ‘정효’라는 법명 두 글자가 떠올랐다.

    “내 긴히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자를 찾아라.”

    “예.”

    한 가령은 그렇게 대답하며 물러났다. 그는 주인의 명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받들고 보는 충성스러운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야겠군, 어디부터 들쑤셔 봐야 하나, 한 가령이 미간을 찌푸린 채 걸음을 서둘렀다.

    ***

    “그래. 아직도 누구의 사주를 받고 저지른 짓인지 발설할 마음이 없느냐?”

    익제의 물음에 뇌옥에 갇힌 하녀가 “저는 억울합니다!” 하고 소리쳤다. 두 손으로 다급하게 창살을 부여잡은 그녀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님, 참으로 억울하옵니다!”

    그곳은 효명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은 아니었다. 죄를 지은 하인들을 벌하기 위해 만든 임시 뇌옥이었다. 

    은원군쯤 되는 귀한 신분이면 하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하인을 어찌 처분하든, 국법을 운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황제의 조카, 그가 가진 권력은 천하를 쥐고 흔들 만큼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남들이 우러러볼 만큼은 굉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덕원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뇌옥이었다. 그는 늘 자애롭고 이상적인 주인이었으며, 하인들의 사소한 잘못쯤은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한 가령은 기강이 흐트러진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엄하게 다스리려 하였지만, 익제의 만류로 인해 그 뜻을 달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곳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었다. 군대부인의 차에 독을 탄 간 큰 하녀라고 하였다. 발 없는 말은 이미 향덕원을 떠나 도성을 한 바퀴 돌고도 남았을 것이다. 

    “억울하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리 서둘러 도망을 쳤는가?”

    하녀가 익제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신 듯 잠시 두 눈을 찡그렸다 떴다. 

    환기를 위해 뚫어놓은 창 너머로 푸른 하늘과 무성한 나뭇잎이 보였다. 그녀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짝을 찾는 매미들이 귀청을 찢을 듯 시끄럽게 울어댔다.

    하녀는 행여 자신의 목소리가 매미 소리에 묻힐까, 언성을 높였다.

    “도망을 친 게 아닙니다. 볼 일이 있어 잠시 외출을 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하.”

    익제가 우습다는 듯 눈매를 가늘게 떴다. 그의 잇새로 피식피식,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샜다. 

    하녀는 이제껏 보지 못한 싸늘한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나무 창살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뼈가 툭 하고 불거졌다.

    그녀는 여기서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나, 어찌 네가 한 짓도 기억을 못 하는가.”

    익제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그는 마치 정담을 나누는 다정한 연인이라도 되는 양 천천히 허리를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