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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8)화 (4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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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다.

    익제는 조곤조곤 이어지는 채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 있게 시작한 목소리는 오래지 않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중간을 통째로 빼 먹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일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소심하고 조용한 그 음성이 자꾸만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녀가 고역스러워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말을 시키고 만다. 

    익제가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렸다. 잠시 멈칫하는 듯하던 채선은 “계속 하시오.”라는 그의 말에 다시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하옵고…… 날씨에, 건강…… 군대부인, 아! 여기 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한테 쓰시는 서신인가 봐요.”

    “그렇군. 마저 읽어 보시오.”

    “예. 군대부인의 서신을 받고 한량없이 반갑고 기뻤습니다. 음…….”

    “문장력이.”

    “예, 문장력이. 음…….”

    “향상.

    “예, 향상된 걸 보니…… 그간 글공부를 열심히 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하십니다. 국태부인께서 제게 장하다고 하셨어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글공부를 시켜준 이가 누구요?”

    익제의 생색에 채선이 떨떠름한 기색도 없이 웃는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호의가 가득했다. 

    흐음, 나직한 신음을 흘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더욱 강하게 당겨 안았다. 한 줌에 잡히는 가느다란 허리에 음심이 동했다.

    “물론, 익제님이시죠. 감사합니다.”

    그러나 익제는 또 한 번의 유혹을 무사히 참아 넘겼다. 이러다 죽으면 제 몸에서 사리가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의 머릿속으로 온갖 욕설이 난무했다.

    “계속 읽어 보시오.”

    “예! 

    그때, 조용히 방문이 열리며 하녀 하나가 들어왔다. 익제의 처소에서 일하는 젊은 하녀였다. 그녀는 익제의 앞에는 냉차를, 채선의 앞에는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다. 

    익제는 보기와 달리 몸에 열이 많았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냉차를 입에 달고 살았고, 음식도 따듯한 것보다는 찬 것을 선호하였다. 향덕원에는 황궁과 황자들의 집에만 있다는 얼음 창고까지 구비되어 있을 정도였다.

    반면, 채선은 한여름에도 따뜻한 차를 마셨다. 그녀는 냉차를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몰랐으며, 냉차에는 ‘차’라는 단어를 붙여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냉차를 물처럼 마시는 익제에게는 그 말을 하지 못했지만.

    그런데 오늘따라 냉차에 눈이 갔다. 그것이 열심히 서신을 읽은 탓인지, 혹은 맞닿은 육체에 오른 열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자꾸만 마른침이 넘어가고 목이 말랐을 따름이다.

    채선이 냉차를 힐끔거리자, 그 기척을 눈치챈 익제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시원한 차가 마시고 싶소?”

    “이건 익제님의 것이니 저는 새로 가져오라 이르…….”

    “드시오.”

    “하지만.”

    “부인에게 무엇인들 내어주지 못하겠소. 고래 등 같은 집을 달라고 하면 집을 지어줄 것이고, 반짝이는 보석을 달라고 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귀한 보석을 구해다 바칠 터인데, 하물며 이깟 냉차쯤이야 말해 무엇 하겠소.”

    “……고맙습니다. 그럼 사양 않고 마시겠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말에 채선이 발긋하게 달아오른 뺨을 문지르며 냉차에 손을 가져갔다. 

    가만히 지켜보던 송하가 눈치 빠르게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냉차를 한 잔 더 가져오라 이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음 순간.

    “?”

    문득, 등골이 오싹했다. 이상하게 뒤통수가 당겼다. 방문을 열던 송하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그녀의 시선이 채선을 향했다.

    찬 이슬이 맺힌 잔을 두 손으로 들고, 반 가까이 한 번에 들이켠 채선이 천천히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꿀꺽꿀꺽, 채선의 목울대가 울렸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 그것이 억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일순,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그녀의 눈이 홉뜨였다. 이상한 기미를 느꼈던 것인지 익제가 의아한 목소리로 “부인?”하고 불렀다.

    “…….”

    무슨 말인가 할 것 같던 채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송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광경이 유난히 선명하게 그녀의 눈에 박혔다.

    콜록.

    채선이 마른기침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왈칵, 하고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국태부인의 서신 위로 흩어졌다.

    “……부, 인?”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익제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그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사람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다. 

    익제가 본능적으로 그녀를 당겨 안았다.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그가 고개를 내밀어 채선의 얼굴을 보는 순간.

    “군대부인!”

    송하의 입에서 경악에 찬 비명이 터졌다. 방안을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비명이었다.

    “!”

    다음 순간, 채선의 고개가 툭 하고 꺾였다. 그녀의 몸이 익제의 품 안에서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익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의 눈동자가 서슬 퍼런 빛을 띠었다.

    그의 잇새로 벽력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무엇 하고 있느냐! 당장, 당장 의원을 불러오라!”

    “예!”

    송하가 눈물을 흩뿌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익제가 방 안에 남은 도영을 향해 싸늘하게 명령했다.

    “차를 가져온 하녀를 잡아 가두라.”

    “예.”

    도영 역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교대라도 하듯 방 안으로 들어온 원진이 “주군.”하고 그를 불렀다. 

    익제가 채선을 안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침소로 간다.”

    “……예.”

    원진은 익제를 모두 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그를 보아온 만큼 남들이 모르는 숨겨진 본성까지 알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익제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을 뿐이다. 원진은 조용히 익제의 뒤를 따르며 곧 휘몰아칠 폭풍에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의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는 바람에 헛손질을 하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익제의 시선은 더욱 서늘해졌고, 그는 한층 더 진땀을 흘려야 했다. 

    마른침을 삼킨 의원이 한참 후에야 침상에서 물러섰다. 그는 힐끔, 눈동자만 돌려 익제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익제의 시선은 의원이 아니라 채선에게 꽂혀 있었다. 마치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할 듯이.

    “…….” 

    의원은 선득한 익제의 얼굴에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는 익제가 눈이 먼 채 나타났던 날을 떠올렸다.

    측근에 의해 등에 검 상을 입고 독에 당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인자한 표정으로.

    그런 그가 난생처음 보는 얼굴로 사납게 주먹을 틀어쥐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살기 어린 눈을 번득였다. 

    의원의 시선이 정신을 잃은 채선을 향했다. 은원군이 부인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미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 저…….”

    한참 만에야 의원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익제는 채선을 응시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잠시 군대부인에게 시선을 준 의원이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상태가 나쁘지 않으십니다.”

    “나쁘지 않다?”

    익제가 그제야 의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슬 퍼런 시선에 놀란 의원이 흠칫, 어깨를 떨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보기엔 그저 잠이 드신 것 같습니다.”

    “하, 잠이 들었다?”

    익제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가 의원을 돌팔이 보듯 사납게 쏘아보았다. 

    의원의 어깨가 또 한 번 움츠러들었다. 그의 살기 어린 말투에 본능적으로 몸이 굳었다. 

    자애롭고 인자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은원군을 이토록 감정적으로 만든 군대부인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피를 한 바가지나 토했다. 그런데 그냥 잠을 자는 것이다?”

    묵직한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조아린 의원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피……를 토하신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습니다. 독성분이 체내에 흡수되기 전에 덩어리로 뭉쳐 배출되었으니까요. 맥도 안정적이고, 숨소리도 고릅니다. 몸 안에 독성분이 들어오면 맞서 싸우기 위해 열이 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 그런 증상도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군대부인께서는 잠을 자고 계신 게 분명합니다.”

    “하.”

    “잠시 기다려 보시지요. 시간이 지나면 눈을 뜨실 것입니다. 저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혹, 무슨 일이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의원이 꽁지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재빨리 물러갔다. 

    익제는 다시 한번 주먹을 꽉 틀어쥐고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방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했으나, 채선의 숨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보자, 좀 전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심장이 더럭, 내려앉던 그 참혹한 순간이.

    손안의 몸이 마치 무생물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흰 종이를 붉게 만든 선혈에 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목이 꺾이는 순간, 얼음장처럼 서늘한 손이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 같았다.

    그는 바둑을 둘 때처럼 당시의 상황을 천천히 복기했다. 

    냉차는 애초에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익제, 그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하녀의 목표는 저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채선이 그것을 마셨다. 그리고 저를 대신해 쓰러졌다.

    흉인의 별.

    문득, 그 말이 익제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그녀는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불행한 일들을 겪게 될 것인가. 단지 운이 없다고 치부하고 웃어넘길 만한 일이 아닌, 생명이 위태로운 일들까지.

    “하.”

    익제는 뼈가 하얗게 도드라지도록 주먹을 세게 틀어쥐었다. 그 말은 자신의 상황이 위태로울수록 그녀가 더욱 위험해질 것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건 손끝이 싸늘하게 식을 만큼 무서운 상상이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은 선득한 느낌, 그는 그와 같은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원진.”

    익제가 나지막하게 원진의 이름을 불렀다. 복도에 서 있던 원진이 귀신같이 알아듣곤 방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예.” 

    “잡았나?”

    “도영이 집을 나서던 하녀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사내가 후문 주위를 배회하고 있어 그자를 쫓고 있는 중입니다.”

    “하녀를 도주시키려 하였던가……. 배후가 누구인지 입을 열었나?”

    “아직입니다.”

    “그래.”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채선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있으니 내가 우스워 보이는 모양이다.”

    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기척이 변했다는 사실은 눈치챌 수 있었다. 익제가 선득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개싸움. 그동안에는 진흙탕 싸움에 끼지 않으려고 허허실실, 웃고 다니며 사람 좋은 행세를 했는데 말이다.”

    익제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이어졌다.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한기가 감돌았다.

    “그렇군. 그 결과가 이것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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