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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7)화 (4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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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소심하고
겁 많은 이 같으니라고.

무심코 고개를 들던 채선이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익제와 눈이 마주치곤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 위에는 짓궂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도라지는 뿌리채소가 아니오? 꽃이 떨어질 필요가 어디 있소?”

“읏, 도라지에도 열매가 맺히긴 합니다! 먹지 않을 뿐이지 씨앗을 품은, 달걀 모양의 열매가 맺혀요!”

“흠.” 

익제가 침음을 흘리며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산도라지를 집에서 직접 키운 이가 하는 말이니 믿어 보겠소.”

“……사기꾼 아니거든요. 거기도 산이 맞거든요.”

채선이 익제의 귀에만 간신히 들릴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익제가 먼저 등을 돌렸다.

“가십시다. 오늘이 후원에서 하는 마지막 오찬이 될 듯하오. 날씨가 더 더워지면 식사를 하는 사람도, 준비를 하는 사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오.”

“……예.”

“도성을 떠날 날이 가까워지는군.”

익제가 반쯤 혼잣말을 하며 후원을 가로질렀다. 웃음이 묻어 있던 그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다, 그는 채선이 한 말을 속으로 가만히 되뇌었다. 

“끝을 맺어야겠군.”

“예?”

“아니오. 자, 내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시오. 넘어지고 싶지 않으면.”

“……예.”

채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

종종걸음을 치던 채선이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녀를 따르던 송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기다려도 채선이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제야 그녀가 “부인, 무슨 일이셔요?”하고 물었다.

“으으.”

채선은 대답 대신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송하와 도영의 눈이 마주쳤다. 도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 역시 영문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송하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채선의 앞으로 걸어갔다. 

“부인, 무슨 일…….”

그러나 송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채선이 울상을 짓고 있었던 탓이다. 이내 송하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그러셔요?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하셔요? 처소로 돌아갈까요?”

송하가 고개를 쑥 내밀어 채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채선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송하는 애가 탔다.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에게 채선이 머뭇머뭇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똥을…… 맞았어.”

“예?”

송하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방금 새똥이라고 하셨어요?”하고 되물었다. 

채선이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의 시선이 채선의 정수리로 천천히 이동했다.

살짝 발돋움을 하자, 과연 흑단처럼 까만 정수리 위에 하얀 새똥이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이런.”

송하는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새똥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이제 채선이 치맛자락을 밟고 넘어지는 일쯤은 놀랍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도영도 지금은 제 발에 꼬여 비틀거리는 채선을 능숙하게 붙잡곤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익제와 함께 밥을 먹어도 이상하게 꼭 채선의 밥그릇에서만 돌멩이가 나왔다. 으득, 하는 소리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좀 전에는 복도 청소를 하던 하녀가 놓아둔 걸레를 밟고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송하의 의문에 채선의 눈매가 한층 더 침울한 빛을 띠었다.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린 송하가 소매에서 깨끗한 무명천을 꺼냈다.

“이리 고개를 숙여 보셔요. 제가 깨끗이 닦아 드릴게요.”

그 말에 채선이 주춤주춤 머리를 숙였다. 송하가 일부러 더 씩씩하게 말했다.

“새들도 귀한 사람을 알아보나 봐요.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부인 머리에만 똥을 싸다니요. 걱정 마셔요. 한 번만 더 그러면 제가 고놈 다리를 팍 분질러 버릴 테니까요.”

“……그럴 것까지는 없어.”

채선은 익제의 무자비한 돌팔매질에 맞아 픽 하고 떨어지던 가여운 물까치를 떠올렸다. 

“예. 다 되었어요. 주인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얼른 가요, 부인.”

“그래. 그러자꾸나.”

채선이 불안한 눈으로 텅 빈 하늘을 힐긋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송하가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물었다.

“국태부인께서 보내신 서신이 그리 반가우셔요? 잠시도 못 기다리실 만큼?”

조금 전, 익제가 보낸 하인이 채선을 찾아와 국태부인의 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시라도 빨리 확인하고 싶으면 익제의 처소로 직접 오시란 전언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던 송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말을 전할 시간에 차라리 하인에게 서신을 들려 보내는 편이 더 낫지 않나,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채선은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곧 찾아뵙겠다고 전해주게.”라고 대답한 걸 보면. 

송하는 은원군에게 제가 모르는 큰 뜻이 있나 보다,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채비를 서둘렀다.

“너무 경망스러워 보이느냐? 조금 기다렸다가 저녁때 익…… 은원군께서 오시면 서신을 확인하는 것이 나을까?”

가만히 눈치를 살피는 채선의 소심한 물음에 송하가 얼른 두 손을 저었다.

“아니여요, 아니여요, 경망스럽다니요? 고부간에 사이가 좋은 것만큼 다행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분명 국태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거여요.”

“그럴까?” 

“예, 분명해요. 게다가 일치? 일취? ……나날이 늘어나는 부인의 글솜씨에 깜짝 놀라셨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럼요!”

송하의 아부에 채선이 사뭇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송하도 질세라 그녀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채선을 그의 처소에 불러들이는 익제의 수작질을 눈치챈 도영만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익제의 처소에 도착한 채선은 탐탁잖은 표정의 한 가령을 따라 곧장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분주하게 좌우를 굴러다녔다. 처음 와 보는 익제의 처소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신기하였다. 

한 가령이 마뜩잖은 목소리로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하고 고한 후 방문을 열었다.

“…… 오늘 밤 효명의…….”

무슨 말인가 하던 원진이 익제의 손짓에 입을 다물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의 익제가 금세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며 살짝 고개를 숙인 채선이 문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혹, 바쁘신데 제가 방해를 한 것은 아닌지…….”

“그럴 리가 있소? 내가 다스리는 봉토에서 성주들이 장계와 선물을 보냈기에 그것들을 확인하는 중이었소. 화급을 다투는 일은 아니니 걱정 마시오.”

그렇게 말한 익제가 서신 하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마치 침상처럼 생긴 기다란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채선에게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아마 집무를 보다 잠깐씩 눈을 붙이는 의자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채선이 그에게로 걸어갔다.

“이리 오시오.”

익제의 맞은편 의자에 앉던 채선이 고개를 기울였다. 더 이상 어디로 오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익제가 다리를 벌리고, 제 가랑이 사이를 톡톡 두드렸다.

“!”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저, 저는 여기 앉겠습니다.” 

그녀가 각목처럼 빳빳한 태도로 말했다. 손과 발이 같이 움직였다. 그 모습에 익제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거기 앉아서 어찌 서신을 읽으려고 그러시오?”

“익제님께서 읽어 주시면 되지요.”

“누가 보면 내가 딴마음이 있는 줄 알겠소. 나는 글공부를 하는 부인을 위해 함께 서신을 보며 한 자 한 자 읽어 주려 하였건만, 부인이 내 뜻을 곡해하니 서운하기 그지없소이다.”

익제의 목소리가 뚱한 빛을 띠었다. 

그제야 채선이 두 손을 저으며 “그런 뜻이 아니라……!” 하고 입을 열었지만, 그의 냉담한 태도에 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제가 익제님의 깊은 뜻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되었소.”

익제가 넓은 아량을 베풀겠다는 듯 빙긋 웃으며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두드렸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또다시 망설이던 채선이 주춤주춤,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이제는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익제는 저 옷고름을 풀어보면 온몸이 빨갛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마치 그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하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

방 한구석에 물러나 있던 송하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탓인지, 제 발로 늑대의 품에 안기는 어린 양을 보는 듯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송하가 손등으로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러다 저와 똑같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도영을 발견하고는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금실이 좋으시니 다행이긴 한데…….

송하는 어째서 입맛이 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겸연쩍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자, 편히 기대시오.”

익제가 꼿꼿이 세우고 있는 채선의 등을 살며시 제 가슴으로 밀었다. 

“읏!” 

더 이상 빨개질 수 없을 것 같던 채선의 목덜미가 한층 더 빨개졌다. 숫제 불이라도 날 것 같았다. 

그것이 몹시 유쾌하고 흡족했다. 익제는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가느다란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았다. 미처 틀어 올리지 못한 잔머리 몇 가닥이 하얀 목덜미 위에 늘어져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곳에 덥석, 입술을 문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만큼 좁혀진 거리가 족히 두 배는 더 벌어질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은 이 같으니라고.

후, 익제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입김을 불었다. 

“흐읏!”

채선이 묘한 신음을 터뜨리며 파득 몸을 떨었다. 익제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목덜미에 먼지가 붙어 있어서. 혹, 놀라셨소?”

“……아,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서신을 읽도록 합시다.

“예.”

익제가 두 손으로 서신을 잡아 펼쳤다. 그의 두 팔 안에 갇힌 채선은 눈 둘 곳이 마땅찮은 듯 눈동자를 대록대록 굴리다 이윽고 서신을 응시했다. 

국태부인의 필체는 몹시도 그녀다웠다. 가늘고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고 유려했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쓸 수 있을까, 생각하는 채선의 귓가로 익제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부인이 읽어 보시겠소?”

“하지만…….”

채선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떨구었다. 익제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채선의 솜털이 곤두섰다.

“읽을 수 있는 데까지만 읽어 보시오. 나머지는 내가 하나씩 알려주리다.”

“예, 그러면.” 하고 대답한 채선이 총기 어린 눈으로 글자를 짚어갔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송하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터뜨렸다.

“은원군 보시오. 은원군께서 보내신 서신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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