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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6)화 (4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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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 법이지요.

송하가 눈치껏 방에서 물러났고 채선이 쑥스러운 얼굴로 두 눈을 내리떴다.

“국태부인께 서신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렇소?”

익제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어깨 너머를 흘깃거렸다.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국태부인께 문안을 여쭙습니다. 더워지는 날씨에 강녕하신지 궁금하옵고, 만사 평온하신지 염려되옵니다. 국태부인 보고 싶다. 나 국태부인 그리워 눈물이 난다. 그래도 은원군이 여름에 또 간다고 했다. 금방 다시.」

서신은 거기에서 애매하게 끝이 나 있었다. 아마 익제의 등장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한 모양이었다. 익제는 존대와 하대를 오가는 서신을 지그시 응시했다. 

편지의 첫머리는 그와 함께 공부를 했던 내용이라 청산유수처럼 유려했다. 반면, 뒷부분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졸기만 했던 건 아닌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며 익제가 입매에 힘을 주었다. 여기서 웃었다간 소심한 채선의 뒤끝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멀리서 제 그림자만 보여도 슬금슬금 피해 다닐 게 분명했다.

슬그머니 익제의 눈치를 살피던 채선이 제가 쓴 서신을 뒤집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변명 같은 말들이 우물우물 튀어나왔다.

“그냥 연……습한 겁니다. 이대로 보낼 게 아니에요.”

채선의 눈매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송하는 글을 쓰는 내내 옆에 앉아서 “우와, 글솜씨가 일, 일취…… 엄청 느셨어요. 국태부인께서 깜짝 놀라실 거예요! 아마 부인께서 직접 쓴 서신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실 걸요?”라며 하염없이 그녀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실력이 제법 향상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쥐꼬리만 하던 자신감은 서신이 길어질수록 점점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런데 실룩이는 익제의 입꼬리를 보자 우쭐거리던 마음이 금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채선의 풀 죽은 기색에 익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흠. 연습을 많이 했나 보오. 어머니께서 보시면 기뻐하시겠소.”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이오. 부인은 내가 거짓말이나 하는 싱거운 사람으로 보이시오?”

그의 성난 목소리에 그녀가 미심쩍은 눈으로 익제를 힐긋거렸다. 그가 서운한 어조로 덧붙였다.

“가만 보면, 부인은 나를 전혀 믿지 못하는 것 같소. 나처럼 다정한 이가 어디 있다고.”

불현듯, 본심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나자, 못내 억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솔직히 저처럼 살가운 남편이 어디 있나 싶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어질까, 애지중지 아끼는 데도 채선은 여전히 마음의 문을 활짝 열지 않았다. 

혼인을 처음 하니 저런 게지. 내가 얼마나 좋은 남편인지도 모르고, 쯧쯧.

익제가 입가에 친절한 미소를 건 채 속으로는 연신 툴툴거렸다. 그렇다고 다른 이와 혼인을 하고 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황 든 소 같다는 게 이런 것이로구나, 그의 잇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때, 채선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는 익제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뒷말을 흐렸다. 그가 눈썹을 들썩이며 “하지만?” 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채선은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익제가 마치 어린아이를 꾀듯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를 얼렀다.

“괜찮소. 편히 말씀해 보시오.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어디 있소?”

힐끔, 다시 한번 그의 안색을 살피던 그녀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 사이로 숨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익제님은 원래 다정하지 않으신데…….”

일순,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익제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간신히 삼키고 짐짓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금니 사이로 꾹꾹 눌러 참은 목소리가 팽팽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게 무슨 말이오. 나처럼 다정한 남편이 어디 있다고.” 

“하지만 산골에 있을 때는…….”

그녀가 뒷말을 우물거리며 또 한 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제야 익제가 쯧 하고 다시 혀를 찼다. 과거가 자신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는 듯.

생각해 보니, 그녀는 자신의 본성을 알고 있었다. 하인들조차 모르는 험하고 사나운 본성을 말이다. 

그녀에게 거친 모습을 보인 것은 물론이고 짓궂은 투로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심술궂은 말로 그녀를 울리기도 했고, 돌멩이로 물까치를 맞추는 냉정한 모습도 보였으며, 심지어는 유치한 반찬 투정까지 했다. 

잠깐만 돌아보아도 짚이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쩐지 아무리 소심한 여인이라도 너무 몸을 사린다 싶었다. 

일순, 익제가 난감한 눈을 했다.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팠으니 누구를 탓하랴. 재빨리 머리를 굴리던 그가 금세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잇새로 맥 빠진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그때는 몸도 성치 않고, 믿었던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뒤라…… 신경이 많이 예민하였소.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오.”

“예. 당연히 그러시겠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아픈 법이니까요.”

채선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참고 자상하게 대해줬으면 순순히 마음을 열 때도 되지 않았나. 

“…….”

그러나 익제는 이번에도 그 말을 꾹 눌러 참았다. 단 한 번의 실수로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한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그가 속내를 숨긴 채 아스라이 흩어질 것 같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부인의 마음이 상했다면 내가 잘못하였소. 용서해 주시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용서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채선이 기함한 표정으로 펄쩍 뛰었다. 소심한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익제가 동정을 자아내는 목소리로 희미하게 속삭였다. 그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가련했다.

“허나, 부인은 그 때문에 나를 믿지 못하고 있질 않소?”

“믿습니다!”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그가 한층 더 연약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이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채선은 고개가 떨어질세라 열심히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행여 익제의 마음이 상할까, 염려하는 기색으로 가득했다. 

“알았소. 그렇다면 앞으로 부인이 하는 양을 두고 볼 것이오.”

“예.”

채선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얼 두고 보신다는 거지?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익제가 서탁 위로 시선을 던지며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던 탓이다.

“어머니께 서신을 전하겠소?”

그 말에 채선이 어깨를 움츠리며 풀 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 글재주가 부족하여 부끄럽습니다. 좀 더 공부를 한 뒤에 서신을 보낼 것이니 익제님께서 제 안부를 대신 전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내 장담하는데, 어머니께서는 지금 이 서신을 더 좋아하실 것이오.”

채선의 고개가 갸우뚱, 하고 기울었다. 그러다 제가 쓴 글만 보면 웃음을 터뜨리던 국태부인의 얼굴을 떠올리곤 “아.”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부끄러움과 국태부인의 즐거움, 그 둘을 놓고 가만히 저울질하던 채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대로 보내겠습니다.”

익제가 발긋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당겼다.

***

송하는 채선의 어깨에 포를 걸쳐주다 말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고개를 요리조리 비틀며 그녀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송하가 사뭇 진지한 투로 입을 열었다.

“부인.”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채선이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송하의 목소리가 더없이 심각했다.

“어째 처음 이곳에 오신 날보다 훨씬 어여뻐지신 것 같습니다.”

“!”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붉히며 송하를 흘겨보았다. 두 뺨이며 귓불, 목덜미까지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나를 놀리는 것이로구나.”

“아닙니다!”

송하가 억울하다는 듯 황급히 두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채선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두 번, 세 번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혼례식 날의 화려했던 모습보다 지금의 채선이 더 아름다웠다. 피부가 하얘졌고, 살결이 고와졌으며, 머리카락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동그란 눈에는 생기가 감돌았고,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잘 먹고 잘 쉰 탓에 매끈하게 변한 것이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송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주인님께 애정을 많이 받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예뻐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정말로 나를 놀리는 것이로구나.”

채선이 두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송하를 노려보았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송하는 눈치 빠르게 주눅 든 표정을 지으며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은원군께서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자꾸나.”

“예.”

채선이 송하를 재촉했고, 두 사람은 차례로 방을 나섰다. 

‘아무래도 주인님께 애정을 많이 받으셔서 그런가 봅니다. 사랑에 빠진 여인은 예뻐진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방금 전, 송하가 한 말을 떠올리던 채선이 괜스레 목덜미를 문질렀다. 손바닥이 닿는 곳마다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심장이 콩닥콩닥 소리를 내며 뛰었다. 강아지풀이 코끝을 간질이듯 가벼운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후원에 서서 뒷짐을 지고 주위를 둘러보던 익제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채선을 보며 눈매를 누그러뜨렸다. 

안이 비칠 만큼 얇은 치맛자락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그녀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노란 옷자락이 춤을 추었다.

“한 마리의 나비가 따로 없구나.”

다음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익제가 소리 없는 실소를 흘렸다. 

그는 단 한 번도 팔랑거리는 나비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적에도 그랬다. 그런데 이제 와 나비 운운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가증스러웠다.

“꽃이 떨어졌소.”

가까이 다가온 채선을 보며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하려는 순간, 불쑥 날아온 말에 채선이 덩달아 시선을 떨구었다. 

“아.”

뙤약볕을 이기지 못한 도라지꽃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물기 하나 없이 퍼석하게 마른 꽃잎이었다. 아마 오래지 않아 남은 꽃들 역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늘의 별 하나가 땅으로 떨어진 것 같아요. 하지만 서운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산골에 살면서 배운 게 있거든요.”

채선의 조용한 대꾸에 익제가 의외라는 듯 눈동자를 들었다. 그가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것이 무엇이오?”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꽃이 떨어져야 열매가 맺힌다는 겁니다.”

“…….”

일순,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채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도라지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뒷말을 이었다.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 법이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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