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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5)화 (4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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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바꿀 수 있을까, 내 손으로.

    술렁이는 분위기를 눈치챈 채선이 머뭇머뭇,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익제의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린 그가 채선의 눈을 가린 채로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보지 않는 편이 낫겠소. 곧장 앞으로 가십시다.”

    채선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익제가 시키는 대로 한 걸음씩, 느릿하게 발을 옮길 뿐이었다. 

    등 뒤에서 송하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무척 놀란 듯도 했고, 혹은 겁에 질린 듯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람에 묻은 피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영과 호위들이 서둘러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평소보다 더 신경을 곤두세웠고, 하인들마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

    문득, 익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시체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망막에 피에 젖은 옥색 포 자락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

    “갑자기 웬 비람. 부인, 괜찮으셔요?”

    송하의 말에 채선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난데없는 소나기가 쏟아졌다. 미처 피할 새도 없었다. 걸음을 재촉할 겨를도 없었다.

    결국 가마 안에 앉아 있던 채선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홀딱 젖었다.

    “부인의 처소까지 들어가거라.”

    원칙적으로 집 안에서는 가마를 타지 않는 게 법도다. 그러나 익제는 행여 그녀가 비에 젖을까, 법도를 깨뜨렸다. 

    마중을 나온 한 가령이 “그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엄연히 주인이 계시는데…….” 하며 입을 열었지만 그는 단호했다.

    “그깟 예의범절이 중한들 설마하니 부인보다 중하겠느냐.”

    한 가령은 할 수 없이 물러섰고, 하인들은 집 안의 실세가 변하는 걸 기민하게 눈치챘다. 

    채선은 숫제 방 안까지 들어갈 기세인 가마꾼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저 때문에 내린 비가 분명한데, 혼자만 멀쩡한 꼴로 들어가자니 양심이 따끔거렸다.

    “너는 괜찮으냐?”

    “저는 끄떡없습니다. 한겨울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릴 만큼 건강하거든요.”

    “은원군께서는…….”

    채선이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새로 산 자색 포가 흠뻑 젖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익제는 뒤늦게 달려온 하인들이 씌워 준 우산 속에서 허리를 굽히고 가마의 창을 열었다. 비에 젖은 까마귀 털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채선은 열린 창 너머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밤에 들를 터이니 편히 쉬고 계시오. 오랜만의 나들이에 고단하겠소.”

    온 세상이 그인 것만 같았다.

    하늘도, 땅도 사라지고 온 세상이 익제로 가득 찼다. 채선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사람처럼. 

    반쯤 넋이 나간 채 창밖만 내다보는 채선을 보며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던 익제가 이내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리 비가 쏟아지는 걸 보니 올해는 풍년이 들 모양이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근심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다행한 일이지 않소?”

    “……예.”

    채선이 그리 대답하며 웃었다. 그녀라고 하여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다. 갑작스러운 비로 행여 그녀가 자책할까, 마음을 써 주는 것이었다.

    그의 다정함에 눈매를 누그러뜨리던 채선이 일순, 숨을 멈추었다. 문득, 섬광과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탓이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그녀에겐 불운이나 다름없는 소낙비가 농민들에겐 그토록 기다리던 단비였다.

    “아.”

    “왜 그러시오?”

    그러니 채선은 익제를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깎아내리면 안 되었다. 그는 그녀의 불운을 길운으로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녀는 그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예. 다행입니다.”

    채선이 나붓이 웃었다. 그것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있던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미소였다. 

    두 눈을 살짝 크게 뜨던 익제가 이내 온화하게 눈매를 접으며 “들어가시오, 채선.” 하고 인사를 건넸다. 

    “!”

    “밤에 봅시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멀어지고, 그 자리를 회색 담장과 푸른 나무가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선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녀를 태운 가마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 연신 가마를 두드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곳은 방금 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곳에 있는 이는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가 아니라 심채선이었기 때문이다.

    바뀔 수 있을까, 운명이.

    바꿀 수 있을까, 내 손으로.

    창에서 들이치는 빗방울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적셨다.

    ***

    “어찌 되었느냐?”

    익제의 물음이 고요한 침묵을 깨뜨렸다. 표정 없는 얼굴은 싸늘했고,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냉랭했다. 원진이 침통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녹록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익제는 그의 허리께에 시선을 던졌다. 검은색 포가 유독 짙고 질척했다.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원진이 면목 없다는 듯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익제의 잇새로 냉철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눈동자에는 수하에 대한 동정도, 연민도 느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사내의 숨통을 끊은 자다. 녹록하다면 이상한 일이겠지.”

    “그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

    예상했던 결말은 아닌지 서늘한 실소를 흘린 익제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침묵했다. 모든 가능성을 가늠하듯 그의 눈동자가 허공의 한 점을 노려보았다.

    그의 기색을 살피던 원진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먼저 그자를 발견하여 1대1로 검을 겨루었습니다. 실력은 저와 막상막하, 혹은 저보다 약간 우위에 있는 듯하였습니다.”

    익제의 눈동자가 다시 원진의 허리를 향했다. 하긴, 그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면 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터였다. 

    “그때, 죽은 사내의 호위 두 명이 뒤늦게 합세하였습니다. 그자는 수세에 몰렸고, 생포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원진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방안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용히 덧붙였다.

    “그자가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계속해 보라는 듯 익제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인 익제가 손등에 턱을 괴었다. 

    원진이 그를 향해 찜찜한 시선을 던졌다.

    “호위 중 하나가 서서히 죽어가는 그자를 향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습니다. ‘대관절 네 놈이 누구길래 급사중 어른의 막내 아드님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느냐! 죽기 전에 그 연유부터 밝히거라!’ 하고 말입니다.”

    “급사중의 아들이었던가?”

    익제가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원진은 대답 대신 사뭇 진지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죽어가던 그가 두 눈을 부릅뜨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급사중이라고? 그럴 리가. 분명 옥색 포라…….’까지 말한 뒤 그자의 숨이 끊어졌습니다. 황망하여 정신이 없던 호위들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자의 곁에 있던 저는 똑똑히 들었습니다.” 

    “옥색 포.”

    익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불현듯,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우연히 같은 장소에 같은 옷을 입은 사내가 있었다. 익제가 채선의 실수로 옷을 바꿔 입은 사이, 그와 똑같은 옷을 입었던 사내가 살해를 당했다. 

    그것이 과연 우연일까? 

    천천히, 익제의 눈동자가 원진을 향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믿기지 않으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침묵 후, 익제가 사뭇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효명의 모친은 어찌 되었나.”

    “그렇지 않아도 그 건에 대한 보고도 함께 올리려는 참이었습니다.” 

    운을 뗀 원진이 습관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이 그를 빤히 마주 보았다. 알 수 없는 한기가 느껴졌다.

    잠시 뜸을 들이던 원진이 이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확인한 결과, 모친의 집에 한 사내가 같이 살고 있었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친의 조카라 하였는데…….”

    “효명에게는 일가친척이 없지 않나.”

    별안간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원진이 두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친척이 있었다면 효명의 모친이 그리 고생하지는 않았을 테지요. 한때는 동냥질까지 하였다고 하니 말입니다.”

    “모친이 인질인가.” 

    반쯤 혼잣말을 중얼거린 그가 “그 조카라는 자의 정체는?” 하고 물었다. 원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자가 눈치를 채고 꼬리를 감추면 일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그 이상 파고들지 말고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잘했다. 그자의 정체야 대충 짐작할 수 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예.”

    익제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았다. 어찌할까, 그의 잇새로 희미한 혼잣말이 비어져 나왔다. 

    효명을 용서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주군에게 칼끝을 들이댄 자는 죽음으로써 죗값을 치르는 게 마땅했다. 

    그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 한 측근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일벌백계.

    잘못된 행동에 본보기를 세우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일들이 두 번, 세 번 반복될 터였다.

    “그런데.”

    이 심란한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익제가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원진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효명을 죽여라, 그 한 마디면 되었다. 

    문득, 익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팔걸이를 꽉 움켜쥔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부인의 처소로 가야겠다.”

    “……예.”

    잠시 멈칫하는 듯하던 원진이 아무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익제가 마치 바람처럼 밤 속으로 녹아들었다.

    ***

    “무엇을 하고 있었소?”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한창 집중을 하고 있던 채선이 파드득 어깨를 떨며 놀랐다. 귀신을 보아도 저리 놀라지는 않겠군, 익제가 못마땅한 속내를 숨기고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채선은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그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하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고, 이를 어째.”

    그제야 채선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들고 있던 붓에서 먹물이 뚝뚝 떨어져 하얀 종이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앗!”

    채선이 황급히 붓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활이었다. 

    “으아아.” 

    그녀가 금세 울상을 띠며 얼룩진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놈에 가난뱅이 본성, 익제가 다정한 눈빛 너머로 비아냥거렸다. 

    송하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채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익제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무엇을 하고 있었소?”

    익제가 다시 한번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의 시선이 서탁 위에 놓인 종이를 향했다. 책만 펴면 꾸벅꾸벅 졸던 그녀가 붓을 들고 있는 광경이 의외로웠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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