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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4)화 (4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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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다음’이라고 하였다.

“끄으으.”

채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누가 보면, 줄 위에 선 것이 그녀인 줄 알겠다.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옮기던 사내가 외줄 반대편에 도착했다.

“하아아.”

비로소 그녀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관객들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고, 사내가 그들을 향해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인사했다. 

잔뜩 용을 쓴 채선이 피로한 기색으로 의자 위에 널브러졌다. 그러다 꼬챙이로 접시를 돌리는 사내가 등장하자, 언제 지친 기색을 띠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며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세요. 송하의 말이 맞았습니다. 정말 저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접시를 돌려요. 저 묘기를 버나라고 부른대요. 굉장해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요? 접시가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나무막대에서 떨어지질 않아요.”

“저 정도는 나도 하오.”

익제가 닭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채선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요?”

“물론이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접시를 돌려본 적 없는 익제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그깟 접시, 코웃음을 친 그는 채선의 선망 어린 시선에 짐짓 어깨를 폈다.

“우와, 대단하세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원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쩌다 주인님이 저리되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향덕원을 비운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원진의 시름이 깊어졌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놀이패의 공연이 막바지에 달했다. 그들이 호랑이 기름으로 만든 만병통치약을 팔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주머니를 열었다. 

“나도 하나 주시오!” 하는 사람들의 외침을 들으며 채선이 창가에 달라붙어 있던 몸을 틀었다.

“정말 눈 깜짝할 새에 끝났네요.”

“아쉽소?”

채선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놀이패를 구경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만큼 즐거웠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은 과욕이었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익제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다음에 또 옵시다. 도성에 들르는 놀이패가 어디 한둘이겠소?”

“……예.”

고개를 끄덕인 채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입가에 봉긋한 미소가 맺혔다. 

‘다음’이라고 하였다. ‘또’라고 하였다. 그것은 마치 따스한 햇살처럼, 혹은 촉촉한 봄비처럼 그녀를 적셨다. 그리하여 싹을 틔운 기대를 조금 더 자라나게 했다.

그와 함께할 다음.

그런데 그 순간.

“앗!”

자리에서 일어나던 채선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밟았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든 그녀와 익제의 눈이 마주쳤다. 

채선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익제가 황급히 손을 뻗었고, 채선의 몸이 기우뚱하고 넘어갔다.

와장창.

접시가 깨어지고 음식이 쏟아졌다.

“!”

그러나 익제는 간신히 채선을 붙들 수 있었다. 그가 반쯤 안도하고, 또 반쯤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괜찮소?

채선은 그에게 안긴 채로 엉망이 된 익제의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일순, 찬물을 덮어쓴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그를 파멸로 이끌 운명의 소유자였다. 불운이 실체를 가진 순간, 그 사실이 새삼스러운 공포로 다가왔다.

채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보이지 않는 운명이 염치없는 기대를 비웃으며 새파랗게 돋아난 싹을 꾹꾹 눌러 밟는 듯했다.

“많이 놀랐소? 혹, 다치진 않았소?”

“……예.”

익제의 다정한 물음에 채선은 울음이 치미는 것을 참고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시선이 얼룩진 옥색 포에 머물렀다. 

조용히 채선의 눈길을 따라가던 익제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웃었다.

“나는 괜찮소.”

“하지만, 옷이……, 저 때문에…….”

“고작 옷이지 않소.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닌데.”

“하지만…….”

“그렇군.”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다는 듯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도영에게 시선을 던졌다. 눈치 빠른 그가 하인에게 무어라 귓속말을 했고, 하인이 잰걸음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언질을 받은 점원들이 올라와 깨진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이리 오시오. 괜히 그곳에 서 있다가 파편이라도 밟으면 큰일이오.”

침울한 표정의 채선이 점원을 향해 “미안하구나.” 하고 속삭였다.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을 걸 그랬다, 역신 주제에 놀이패를 구경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 고 생각하며 채선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익제가 바닥을 청소하는 점원들에게 은전 한 닢씩을 건넸다.

“수고하였다.”

어린 소녀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헉!”하고 숨을 삼켰다. 은전 한 닢은 그네들의 달포 치 품삯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춤주춤,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점원들이 그것을 받아들곤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열심히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진 아이들이 꺅꺅, 낮은 비명을 지르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핏 “이게 웬 횡재야!”, “또 접시를 깨뜨리시면 좋겠다.”, “쉿!”, “이크.” 하는 속삭임이 들렸다.

느릿하게 채선에게로 고개를 돌린 익제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들도 부인 덕분에 횡재하였고, 나도 부인 덕분에 모처럼 새 옷을 걸치게 생겼으니 모두 운이 좋은 하루요. 그렇지 않소?”

“아……!”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그녀의 눈매가 차츰 일그러졌다.

“흡.”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려 그녀가 다급하게 숨을 멈추었다. 

익제는 단번에 그녀의 불운을 길운으로 바꾸었다. 나락으로 떨어졌던 채선은 또다시 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그녀는 더 이상 불운을 가져오는 흉인이 아니었다. 그녀로 인해 횡재를 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도 누군가에게는 길운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채선의 근간을 흔드는 깨달음이었다.

“…….”

그런 그녀를 보며 익제가 살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그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그의 말은 다시 한번 그녀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흡족한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그녀가 자신에게 칭칭 묶여 꼼짝도 못 하게 될 날을 기대하며.

“흠.”

때마침 채선의 등 뒤로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는 하인이 보였다. 그가 슬그머니 눈썹을 밀어 올렸다.

가쁜 숨을 내쉬던 하인이 가까스로 호흡을 고르며 짙은 자색의 포를 내밀었다. 곧장 송하가 다가와 그의 옥색 포를 벗겼다. 

자색 포에 팔을 끼우던 익제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채선의 시선을 느끼곤 부러 능청스럽게 물었다.

“어찌 그리 보시오? 혹, 옥색 포보다 못해서 그러오?”

그 말에 채선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찰떡같이 어울리십니다! 어떻게 세상에 있는 모든 색이 어울리실까, 신기해하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그렇소?”

익제가 흐뭇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던 채선이 수줍은 듯 두 눈을 내리깔며 그의 손바닥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가게 밖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것은 마치 다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인 양 그들은 더없이 한가로웠다.

채선은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기적 같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귀한 사내와 놀이패의 공연을 보고, 그와 함께 나란히 걷는 이 순간들이. 

아마도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의 그녀에게는 오늘의 기억이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혹여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2층에서 내려오는 익제를 발견한 가게 주인이 후다닥 달려오며 굽실거렸다. 

채선은 유독 익제에게만 과하게 친절한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허리를 조아릴 때마다 불뚝한 뱃살이 출렁거렸다.

“부인께서 즐거워하여 나 또한 충분히 만족스러웠네.”

“아이고, 소문처럼 두 분 금슬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다음에도 또 들러 주십쇼. 언제든 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그러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익제가 가게 밖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입구가 번잡스러웠던 탓이다. 

그들보다 한발 앞서 가게를 나선 손님들이 문 앞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그는 당장 그들을 쫓아낼 것처럼 흉흉한 기세로 다가가는 주인장을 향해 “괜찮으니 놓아두게.” 하고 말했다. 그제야 주인장이 “예.” 하고 대답하며 뒤로 물러섰다.

“듣던 대로 인품이 훌륭하십니다.”

그는 손바닥을 삭삭 비비며 아첨을 했고, 채선은 반짝이는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그가 자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피식, 바람이 빠지는 웃음을 흘린 익제가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옥색 포 자락이 보였다. 

“흠.”

그제야 문 앞에 서 있는 자가 가게에 도착했을 때 마주쳤던 사내임이 떠올랐다. 옥색 포의 사내와 여인, 그 뒤를 지키고 있는 호위.

놀이패를 보러 온 정인인가 보군. 

“아, 이런. 우리가 길을 막고 있었군.”

뒤늦게 익제의 일행을 발견한 사내가 실례했다는 듯 살짝 눈인사를 건네고는 여인을 재촉해 거리로 나섰다. 익제 역시 채선의 손을 잡고 대로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순간.

“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하늘을 찢었다. 그와 동시에 익제가 한 팔을 들어 자신의 소매로 채선의 얼굴을 가렸다. 

자색 포 위로 붉은 피가 튀었다. 원진과 도영이 순식간에 검을 뽑으며 익제의 앞을 막아섰다.

“…….”

익제는 무감정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옥색 포를 입은 사내였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그가 한순간에 시체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의 정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두 눈을 홉떴다. 덜덜 떨리는 그녀의 시선이 시체에 닿았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인의 공허한 눈동자가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했다.

익제는 느릿하게 시선을 떨어뜨렸다. 쓰러진 사내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순식간에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무심코 피 웅덩이를 밟은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다, 끔찍한 모습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비명에 놀란 이들이 사체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쌌다.

누군가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고,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으며, 누군가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원진.”

익제가 그를 불렀다. 원진은 두말하지 않고 민첩하게 인파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평민의 복장을 한 사내였다. 머리에는 누런색 두건을 두르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가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어 사내의 목을 그었다. 

그와 동시에 사내의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쳤다. 평민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마, 막내 도련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호위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들 중 두 명이 허겁지겁 인파를 가르며 사라졌고, 나머지 한 명은 관아로 뛰어갔다. 남은 한 사내만이 침통한 표정으로 여인과 시체의 곁을 지켰다.

“무슨,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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