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소?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채선이 손등으로 두 눈을 비비며 사죄했다. 익제는 터지려는 웃음을 참고 부러 엄한 표정을 지었다. 채선이 풀 죽은 기색으로 어깨를 떨구었다.
탁.
익제가 거칠게 책을 덮었다. 채선이 흠칫, 등을 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화가 나셨나, 익제의 얼굴을 살피는 그녀의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
“안 되겠소. 더 이상 해 봤자 쇠귀에 경 읽기군. 학생이 배울 자세가 안 되어 있는데, 스승이 제아무리 뛰어난들 무슨 소용이겠소?”
“아닙니다! 이제 안 졸겠습니다! 정말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글공부는 되었으니 외출할 준비나 하시오.”
“……외출이요?”
채선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깜빡깜빡, 그를 쳐다보았다. 익제는 그녀를 꽉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짐짓 대수롭지 않은 척 방을 나섰다.
“준비가 끝나면 밖으로 나오시오.”
“……예에.”
채선이 울적한 표정으로 자신의 책을 덮었다.
***
“여기는?”
가마에서 내려서던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위를 둘러봤다. 수많은 사람이 바쁘게 오갔고, 왁자한 소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어디선가 “쌉니다, 싸요.” 하는 장사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뒤를 이어 “조금만 깎아주시오. 내가 이곳에 온다고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선 참이오.” 하며 흥정하는 소리도 잇따랐다.
채선은 멍한 얼굴로 저자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와.
그곳은 그녀가 살던 작은 마을의 저자와는 규모부터가 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고 곧게 뻗은 거리와 양옆으로 늘어선 어마어마한 수의 가게들이 단번에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 넓은 거리를,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빼곡하게 메웠다. 신분의 높고 낮음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형형색색의 비단옷을 차려입은 이와 때 묻은 무명천을 걸친 이가 한데 어우러져 번잡한 저자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
그때, 익제가 채선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손을 빼려고 하였지만, 그가 놓아주지 않았다. 아니, 잡은 손은 더욱 단단하게 얽혔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채선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어렸다. 혹여 누가 그녀를 알아보기라도 할까, 겁이 났다. 그리하여 제 옆에 있는 익제까지 손가락질을 받을까, 두려웠다.
“익…… 은원군!”
익제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바닥을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뱉었다.
“부인은 나를 무정한 남편으로 만들 셈이오?”
“예?”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머지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익제가 언짢은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설령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라 하더라도 이처럼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는 손을 잡고 걷기 마련이오. 아니면 금세 뒷말이 돌 테니 말이오. 그런데 부인께서는 나를 사람들 앞에서 우스운 꼴로 만들려고 하는군.”
“……하지만.”
채선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쯧, 낮게 혀를 찬 그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한 발을 내디뎠다. 그녀가 질질 끌려가다시피 그의 뒤를 쫓아갔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오.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부가 데면데면하게 떨어져 가보시오. 당장 내일부터 온갖 소문이 돌지 않겠소? 그리고 그런 소문이 돌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익제가 한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부인에게 홀딱 빠진 줄 아는 광무대군이 의심을 품지 않겠소? 그럼 모든 게 다 허사다 된단 말이오.”
“……예.”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지적당한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고작 손 하나 잡지 않는다고 광무대군의 의심을 사다니, 역시 현명한 익제는 저와 달리 늘 한 수 앞을 내다본다며 그녀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얌전히 그와 손을 잡고 걷던 그녀가 힐끔, 익제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화사한 옥색 포를 걸친 그는 오늘따라 유독 하얗고 잘생겨 보였다. 저 귀한 이가 자신의 남편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처음 보는 진귀한 물건을 파는 장사꾼보다 그의 얼굴이 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채선은 길가에 늘어선 가게 대신 자꾸만 익제의 얼굴을 힐긋거렸다.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소?”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익제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마른 손으로 뺨을 쓰다듬는 그의 행동에 채선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녀의 목덜미가 발긋했다. 가볍게 웃음을 흘린 익제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익숙했다. 불현듯, 앞을 보지 못하는 제 손을 조심스레 잡아끌던 손이 떠올랐다. 그의 생각보다 작고, 거칠며, 따스한 손이었다.
그때보다 한결 보드라워진 손은, 그러나 그때의 온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익제는 한 손에 넉넉하게 잡히는 채선의 손을 보며 문득, 불안한 눈을 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으스러져 버릴 것 같았다.
결국 그는 깨어지는 유리라도 쥐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멈춰선 채선이 눈앞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입구부터 화려한 비단으로 꾸며진 으리으리한 가게였다.
열린 창문 너머로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채선은 더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멀뚱멀뚱, 그 가게를 쳐다보기만 했다.
밥을 먹을 것이라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 연산댁의 음식 솜씨는 채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쇼.”
그들보다 한발 먼저 도착한 사내와 여인이 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익제와 같은 옥색 포를 걸친 사내였다.
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채선이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옥색 포를 입는다고 모두 잘생겨 보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던 호위들이 가게 안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바깥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행세깨나 하는 집 안의 자제인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채선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아이고, 오셨습니까?”
익제를 발견한 주인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저러다 이마가 바닥에 닿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만큼 깊숙이 머리를 숙이던 그가 두 손을 비비며 잇속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시지요.”
“가십시다.”
채선은 저 역시 행세깨나 하는 집 안의 자제가 된 것 같은 면구스러움에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익제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2층에 도착한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1층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바글거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2층은 텅 비어 있었던 탓이다.
“편하신 곳에 앉으십시오. 음식을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익제는 커다란 창가로 걸어가며 잡은 손을 놓았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아직도 손에서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손끝이 얼얼하고 화끈거렸다.
“앉으십시다.”
그가 채선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면서도 익제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깜빡깜빡, 궁금증을 담은 눈동자가 소리 없이 그를 향했다.
“저길 보시오.”
익제가 손가락을 들어 창밖을 가리켰다.
“?”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던 채선이 이윽고 “아!”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그곳에서는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어린 소년이 꽹과리를 치며 바람을 잡았다.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놀이패가 아닙니다. 전국 최고 놀이패의 마지막 공연! 다음은 일 년 뒤가 될지 이 년 뒤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공연! 여러분, 지금 시작합니다!”
“와아아.”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신나는 꽹과리 소리가 파묻혔다. 채선은 동그랗게 뜬 눈을 익제에게로 돌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익제가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놀이패의 공연을 즐길 수가 있소.”
“익제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채선의 눈동자가 가볍게 일렁거렸다. 그녀는 무언가를 삼키듯 입술을 꾹 깨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익제는 희미하게 파동 하는 공기를 느끼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내가 보낸 선물은 모두 돌려보내더니, 이것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오?”
익제의 짓궂은 물음에 채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매가 손쓸 새도 없이 말려 올라갔고, 마침내 “하하하.”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저것이면 되었다. 저리 좋아하는 모습이면 그는 어떤 수고도 감내할 용의가 있었다.
차례로 등장한 점원들이 탁자 위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채선은 끝도 없이 날라져 오는 음식의 행렬을 보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점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채선은 어린 소녀들이 사라지자마자 익제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로 건너갔다.
“그런데 장사가 잘 안되는 가게인가 봅니다.”
“어찌하여?”
익제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밀어 올렸다. 이곳은 저자에서 손꼽히는 음식점 중 하나였다. 특히, 놀이패가 오는 날이면 2층까지 만석이라 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이 허다했다.
다시 한번 2층을 휘 둘러본 채선이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이 좋은 날에 손님이 저희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하하.”
별안간 익제의 잇새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가 이곳을 통째로 빌렸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채선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였다.
그의 눈매가 구부러질 무렵, 그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공중에 매달린 외줄 위에 사람이 올라갔습니다. 저러다 떨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녀의 손가락을 쫓아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채선의 말처럼 줄 끝에 사내 한 명이 서 있었다. 그가 부채를 쫙 펼치더니 대뜸 한 발을 내디뎠다.
“어어…….”
채선의 잇새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사내의 발끝에 집중했다. 사내의 두 발이 모두 밧줄 위에 올라갔다.
채선이 합, 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비명을 지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송하와 하인들도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사내의 묘기를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힐긋거린 익제가 모르는 척 눈길을 돌렸다.
그들을 제자리로 물러서게 한다면, 분명 채선의 얼굴이 시무룩한 기색을 띨 터였기 때문이다. 이 좋은 날, 그녀의 얼굴에 울적한 기운이 머무는 건 원치 않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 사내의 몸이 기우뚱하고 흔들렸다.
“으아아아.”
채선이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관중들의 입에서도 숨죽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사내는 노련하게 균형을 잡았다.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사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고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하면 사내의 몸이 바로 서기라도 할 것처럼.
“으으으.”
익제는 제 앞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채선의 얼굴을 구경했다. 전국 제일이라는 놀이패의 공연보다도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훨씬 더 재밌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