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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2)화 (4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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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글을 배우고
    싶다고 한 게 누구요?

    채선의 고개가 갸우뚱, 하고 기울었다. 익제가 아차 하며 내심 혀를 찼다. 금세 표정을 수습한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했다.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프다는 말이오.”

    “이럴 게 아니라 의원을 불러야겠습니다!”

    채선이 다급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익제가 그녀를 꾹 잡아당기며 불퉁하게 말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셈이오?”

    “아니, 그게 아니라 의원을…….”

    “정말로 부인이 배를 만져주면 나을 것 같아서 그러오. 의원을 부를 정도는 아니오. 내 몸은 내가 잘 아오.”

    의기소침하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채선이 머뭇머뭇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숨이 넘어갈 만큼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의 손이 익제의 배 위에 내려앉았다. 

    이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원. 

    익제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러나 그는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를 닦달하지도 않았다. 급하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달아나는 소심한 여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겐 공을 들여야 했다. 몸에 좋은 약을 달이듯이 뭉근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여기, 입니까?”

    “그래, 거기요. 천천히 문질러 주시오.”

    잠자리를 보아주고 더 필요한 것이 없나, 하며 구석에 물러나 있던 송하가 낯 뜨거운 얼굴로 조용히 물러났다. 

    어린 그녀의 눈에도 익제의 수작질이 훤히 보이는데, 어째서 군대부인은 눈치를 못 채는 것일까, 하며 송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손끝이 익제의 배에 닿는 순간,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것과는 사뭇 달랐던 탓이다. 

    말랑말랑한 뱃살 대신 딱딱한 근육이 만져졌다. 그것이 못내 신기하고 의아하여 채선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에 힘을 실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얇은 천 자락 위에 내려앉았다.

    채선이 동그랗게 손을 문질렀다. 

    “하아.”

    머리 위에서 만족스러운 한숨이 터졌다. 익제가 나른하게 속삭였다. 

    “부인의 손이 약손이군. 아프던 게 점점 사라지는 것 같소.”

    “그렇습니까?”

    그 말에 힘을 얻은 듯 채선의 손길이 점점 더 대담해졌다. 익제의 한숨이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듯 불만스럽게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쯧.

    그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싶었다. 피가 뜨겁게 끓었고 그의 욕망이 점점 더 선연해졌다. 

    어쩔까.

    그가 갈등에 빠진 눈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막말로, 자신이 그녀를 안는다고 하여 누가 뭐라 할 것인가. 

    그녀는 그의 부인이었고, 그의 여인이었다. 게다가 채선 또한 그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괜찮으십니까?”

    그녀가 동그란 눈을 들어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온전히 저를 걱정하는 순진한 눈망울에 그가 끄응 하는 신음을 흘렸다. 불현듯, 제 무덤을 제가 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아프십니까?”

    채선의 눈매가 금세 일그러졌다.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배는 괜찮아진 것 같으니 그곳은 되었고 머리나 문질러 주시오. 정말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소.”

    “예. 제게 맡겨 주십시오.”

    채선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어미가 제게 해주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익제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가 두 눈을 감으며 한숨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광무대군이 같이 사냥을 하자고 하더군.”

    “!”

    일순, 채선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하얗게 얼어붙은 그녀의 기색을 눈치챈 익제가 슬며시 입꼬리를 당겼다. 그래, 그것이면 되었다. 그녀는 온전히 그를 생각하고, 그를 걱정하면 되었다.

    “그, 그래서…… 가, 같이 간다고 하셨습니까?

    얼마나 놀란 것인지 채선이 말을 더듬었다. 익제는 그녀의 떨리는 손끝을 느끼며 옅은 웃음을 삼켰다.

    “부인 핑계를 대고 거절하였소. 부인이 더위를 많이 타 피서를 가야 한다고 말이오. 이렇게 된 이상 꼼짝없이 풍주에 내려가야겠소.”

    “그렇……습니까?”

    그제야 채선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익제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부인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이오.”

    “……예?”

    그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와 동시에 익제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보지 않아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부인 덕분에 광무대군의 사냥에 불참하게 되었으니 부인이 내 목숨을 구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소.”

    “그런…….”

    채선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구었다. 

    불현듯, 심장 아래가 찌르르 울렸다. 그것이 기쁨인지 슬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숨이 턱 막힐 만큼 커다란 감정이 뱃속에 똬리를 틀었다. 

    채선은 서서히 숨을 들이쉬며 다시 손끝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가 익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밖에 없다는 듯, 정성을 다해 그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때,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익제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슨 얘기라도 해 보시오.”

    “얘, 얘기요?”

    그 말에 채선이 뜨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젯밤에 그가 잠들 때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한 탓에 아직도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얘기라니.

    “싫소?”

    익제가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채선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싫지 않습니다. 음…….”

    난감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무슨 얘기를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때마침 문밖에 어른거리는 송하의 그림자가 보였다. 딱 좋은 이야깃거리가 떠올랐다.

    “오늘 송하가 저자에 심부름을 갔다가 놀이패들이 온 것을 보았답니다. 전국 각지를 누비는 실력자들인데, 수도에 돌아온 것은 여섯 달 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대요.”

    “고작 놀이패를 보려고?”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언성을 높였다.

    “고작 놀이패가 아닙니다! 공중에 외줄을 달아놓고 마치 주작대로처럼 성큼성큼 걸어 다닌답니다. 그걸 보면 입이 쩍 벌어진대요! 게다가 가느다란 꼬챙이로 접시도 막 돌린다고 합니다. 아니, 접시뿐 아니라 손에 잡히는 건 모두 돌릴 수 있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이야기꾼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겪은 모험담을 풀어놓기 시작하면 시간이 눈 깜짝할 새 지나간대요. 어찌나 재밌는지 다들 밥 먹는 것도 잊을 만큼 넋을 빼고 있대요. 딱 보름만 있다가 다른 지역으로 간다고 하여 도성 사람들이 매일같이 몰려든답니다.”

    채선은 마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숨도 쉬지 않고 놀이패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익제가 “흠.”하고 침음을 흘리다가 물었다.

    “부인도 보고 싶소?”

    “아닙니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그녀가 단번에 거절했다. 그게 몹시 의외라 익제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아니다?” 

    어릴 때, 놀이패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이선과 함께 구경을 갔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채선은 놀이패의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녀를 발견한 마을 사람들이 눈을 흘기며 삿대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오느냐, 또 누굴 불행하게 만들려고 그러느냐, 역신 주제에 놀이패가 웬 말이냐, 시퍼렇게 날 선 말들이 그녀의 등 뒤에 꽂혔다. 

    ‘나는 괜찮아. 언니라도 가서 보고 와. 언니가 보고 나한테 얘기해주면 되잖아.’

    ‘아니야. 사실 나는 놀이패 같은 건 보고 싶지 않았어. 채선이 네가 하도 궁금해하니까 따라왔던 거지.’

    채선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선 역시 전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채선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녀의 잇새에서 울음이 터졌다. 

    ‘으아아앙, 이선아, 미안해. 나 때문에.’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니까? 솔직히 내가 해도 저것보다 잘할걸? 보여줘?’

    이선이 괜스레 놀이패의 험담을 지껄이며 채선을 다독였다. 하지만 채선은 이선을 끌어안고 목 놓아 울고 말았다. 이선이 할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채선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그때와 같은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익제가 그런 채선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살며시 내리깐 그녀의 눈동자에 씁쓸함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그가 채선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이대로 조금만 더 누워 있읍시다.”하고 속삭였다. 

    채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고개를 툭 떨구던 채선은 서탁을 탁탁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두 눈을 번쩍 떴다. 

    뒤늦게 자신이 졸고 있었던 걸 깨달은 그녀가 민망한 표정으로 힐끔, 눈동자를 들었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익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목소리가 비스듬하게 변했다.

    “글을 배우고 싶다고 한 게 누구요?”

    “접니다…….”

    채선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 일은 국태부인의 서신이 도착한 엊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들의 안부를 묻는 국태부인의 서신에 채선에 대한 이야기가 반 이상을 차지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국태부인의 서신을 읽어주던 익제는 눈물을 글썽이는 채선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도대체 어디에 눈물을 흘릴 만한 구석이 있었던가, 제 손안의 서신을 다시 한번 훑어 내렸다.

    “저도 국태부인께 답신을 쓰고 싶어요!” 

    채선이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사뭇 비장하게 외쳤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글 실력을 떠올리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근황을 전하기엔 자신의 실력이 너무도 비루했던 탓이다.

    “흠.”

    익제가 짧은 침음을 흘렸다. 그는 채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손바닥을 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그가 은근슬쩍 운을 뗐다.

    “글을 배우겠소?”

    “정말요?”

    대번에 반색한 얼굴로 고개를 들던 채선이 다음 순간, 또다시 풀 죽은 표정으로 눈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제가 글을 배운다는 소문이 나면 익제님이 손가락질을 당할 겁니다. 군대부인이 되어서 글도 모르는 까막눈이라고 말이에요.”

    익제는 어떻게 동그란 정수리까지 침울해 보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소문이 나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소.”

    “그게 무업니까?”

    “내게 배우면 되지 않소?”

    환하게 벌어지던 채선의 입이 다시 아래로 처졌다. 그녀가 힐끔, 익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익제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데 제가 어찌…….”

    “어허, 부인은 나를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내로 만들 셈이오?”

    “예?”

    “부부란 일심동체라 하지 않았소? 나를 좋고 즐거울 때만 함께 하는 졸렬한 사내로 만들 셈이냔 말이오.”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익제님은 절대로 졸렬한 사내가 아닙니다! ……그럼 제게 글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시작된 글공부였다. 그런데 막상 익제에게 글을 배우자, 없던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얀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자였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눈앞이 가물가물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제야 아버지가 글만 가르치려고 하면, 줄행랑을 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가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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