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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부인밖에 없구려.
채선과는 달랐다. 생김새부터 눈빛, 행동거지까지. 한배에서 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는 채선과 모든 것이 달랐다.
그러다 문득, 익제가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보니, 동그란 이마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숙였을 때 보이는 정수리가 닮은 듯도 했다.
“도성의 아름다운 여인은 모두 정안궁에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소.”
익제의 무심한 대꾸에 이선이 한층 더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별안간 그의 눈매가 싸늘하게 변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우를 이용하는 언니라, 익제가 내심 조소를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짧은 찰나였을 뿐, 그는 금세 부러운 표정으로 광무대군을 바라보았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겸양의 말을 건네는 광무대군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가십시다.”
그들이 멈췄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정안궁을 나섰다.
그제야 이선의 등 뒤에 서 있던 생쥐 같은 사내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이 익제의 뒷모습을 쫓았다.
***
채선의 처소 문턱을 넘던 익제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불을 들고 분주하게 뜰을 가로지르던 어린 하녀가 그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왜 그러십니까?”
우두커니 서 있는 익제를 보며 원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익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탐탁잖은 눈으로 텅 빈 앞뜰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흠.”
분명 채선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문 앞을 서성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나 오려나, 저제나 오려나, 목이 빠지게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채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그는 그녀가 몹시 보고 싶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음 뒤에 칼을 숨긴 이들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바보 같은 연기를 하느라 신경이 너덜너덜하게 헤졌다.
아마도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겉과 속이 똑같은 그녀가 그리웠던 것은.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주지 않는 성격인가.”
그의 잇새로 뒤틀린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영문 모르는 원진이 “예?”하고 되물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원진은 요즘 들어 통 익제를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어린 하녀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연산댁이 익제를 향해 다가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그녀가 뚱하게 서 있는 그를 보고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연륜 깊은 그녀의 눈가에 굵은 주름이 졌다. 그녀의 인상을 푸근하게 만드는 주름이었다.
“부인께서는 풍오와 함께 계십니다. 오늘도 풍오가 잔뜩 골이 났지 뭡니까. 어디 말릴 사람이 있어야지요.”
쯧.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제 목숨을 구해준 말만 아니라면 진작 장에 내다 팔았으련만, 이라고 투덜거리며 그가 마방으로 걸음을 돌렸다.
원진이 연산댁에게 고맙다는 듯 가벼운 눈짓을 하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이것도 먹을 테야?”
마방의 문턱을 넘어서는 찰나, 웃음기 섞인 채선의 목소리가 익제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추었다. 뒤이어 송하라는 하녀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이참, 부인. 그만 주셔요. 그러다 말이 아니라 돼지가 되겠어요.”
히이잉. 푸르륵.
“꺄아악. 부인, 풍오 좀 말려주세요!”
“풍오야, 그만하렴. 송하를 괴롭히지 마.”
평소보다 스스럼없는 말투였다. 이윽고 그녀의 잇새에서 웃음이 터졌다. 포르르, 날아든 웃음이 익제의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쏟아지는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웃지 마셔요!”
“그래, 그래. 미안하다. 이제 웃지 않으마.”
마치 봄날의 산골, 그곳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빙긋이 미소 짓던 익제의 눈매가 별안간 삐뚜름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내가 없을 때는 이런 모습이었다, 이거군.
그는 채선의 웃음소리를 따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모퉁이를 돌자, 마방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들이 보였다. 채선과 송하, 도영과 풍오, 그리고 그 주위를 얼쩡거리는 하인들이었다.
도영이 먼저 익제를 발견하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다음은 눈치 빠른 송하 차례였다. 먹는 데 정신이 팔린 풍오를 제외하고는 채선이 가장 늦게 그를 알아보았다.
풍오는 고개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누구보다 빨리 그를 눈치챘을 터이니 실은 채선의 반응이 가장 늦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익제의 눈매가 마뜩잖은 빛을 띠었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녀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인사했다. 그가 채선에게로 걸어가며 말했다.
“풍오와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같소.”
그 말에 그녀가 쑥스럽게 웃었다. 저런 눈치 없는 이 같으니라고, 익제의 퉁명스런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간 내 걱정은 눈곱만큼도 아니 들었던 모양이오. 아주 웃음꽃이 피었구려.”
“아, 아닙니다!”
채선이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우적우적 당근을 씹어 먹던 풍오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익제를 본체만체했다.
“부인은 풍오만 있으면 나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는 듯하오.”
“그런 게 아니라……!”
채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모두 고개를 외로 꼰 채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다들 눈치 하나는 기가 막혔다. 지금 여기서 그녀의 편을 들었다가는 부인의 마음을 얻을 순 있을지언정 익제의 뒤끝을 피할 순 없을 터였다.
그제야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익제가 들으라는 듯 반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몹시 피곤하군. 성화에 못 이겨 차를 한 잔 마셨는데, 설마 무언가가 들어 있었으려나.”
“!”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부릅떴다.
“차, 차라고 하셨습니까?”
그렇게 묻는 그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모습에 익제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채선은 익제를 마치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처럼 대했다. 누가 봐도 둘 중 더 영악한 사람은 익제였고, 이해타산이 빠른 사람도 익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익제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할까, 늘 전전긍긍했다.
그게 좋았다.
익제가 두 눈을 나른하게 떴다. 말도 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에 아비를 잃고, 어미마저 지병으로 낙향을 하였다. 그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한 가령과 연산댁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를 손안의 보물처럼 귀하게 대했지만 채선과는 달랐다.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녀의 과보호는 귀찮지도, 혹은 성가시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더 안달복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건가. 아니면, 드디어 내가 미쳐가는 것인가.
피식 웃던 익제가 저를 올려다보는 걱정스러운 눈매에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앓는 소리를 했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군.”
“아, 안으로 드시지요!”
채선이 다급하게 외치며 그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마음을 졸였다. 평소에는 가까이 오지도 않던 그녀가 서슴없이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익제의 눈매가 만족스러운 빛을 띠었다. 어쩌면 습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뒤를 따르던 원진과 도영의 눈이 마주쳤다. 원진은 도대체 주군께서 왜 저러시냐는 듯한 물음을 던졌고, 도영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만 저었다.
“처소까지 걸어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하인들에게 업으라고 할까요?”
채선이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익제의 겨드랑이에 한쪽 어깨를 끼고, 한 팔로 그의 등을 둘렀다. 익제가 그런 채선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만약 그가 온 힘을 싣는다면, 그녀는 그대로 고꾸라질 터였다.
채선이 낑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당장이라도 하인을 부르려는 듯이.
익제는 그녀에게 실은 힘을 조금 빼며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괜찮소. 이 정도는 걸을 수 있소.”
“그럼 저한테 기대세요. 이래 봬도 제가 힘이 장사입니다. 쌀가마니도 번쩍번쩍 들어요!”
채선이 저만 믿으라는 듯 씩씩하게 대꾸했다. 익제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고맙소. 역시 부인밖에 없구려.”
채선의 뒤를 따르던 송하는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편찮으신 게 맞는 건가? 방금 웃지 않으셨나?, 익제의 표정을 살피는 그녀의 얼굴이 알쏭달쏭한 빛을 띠었다.
헹.
그때, 누군가 코웃음을 쳤다.
송하가 깜짝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풍오가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윗입술을 까뒤집고 있었다. 푸르르, 풍오의 잇새로 못마땅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
풍오가 퉷 하고 침을 뱉은 후, 바닥에 쌓인 당근을 우적우적 씹어 먹기 시작했다. 송하는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
“누우시겠습니까.”
채선이 익제를 침상에 앉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심스러운 눈매가 그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눈치 빠른 송하가 재빨리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그리해야겠소. 부인도 이리 오시오.”
“예? 저도요?”
채선이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반응에 익제가 대뜸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나 혼자 누우라는 것이요?”
“저는 아프지 않은데……. 아직 잠을 잘 시각도 아니고…….”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긴 하였으나 아직도 하얀 햇살이 대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별안간 익제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워졌다.
“무릇, 부부는 일심동체라 하였소. 부인은 나와 혼인을 하였지만 즐겁고 건강할 때만 내 곁에 있어 줄 모양이오.”
“아, 아닙니다! 저는 익제님이 슬프고 편찮으실 때도 곁에 있을 겁니다!”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젓던 채선이 마치 선전포고를 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그 말에 희미한 웃음을 삼킨 익제가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그러니 어서 이리 오라는 것 아니오? 부인은 한 입으로 두말을 할 셈이오?”
“어…….”
채선이 머뭇거리자 익제가 홱 하고 등을 돌렸다.
“되었소.”
그의 잇새에서 언짢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제야 채선이 황급히 침상으로 다가갔다.
“지, 지금 올라가려 하였습니다.”
채선이 머뭇머뭇 침상에 몸을 뉘었다. 혹, 편찮은 그에게 방해가 될까, 반대편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낮게 혀를 찬 익제가 단번에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채선의 몸이 주욱, 딸려왔다.
“으앗!”
그녀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익제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수심이 섞인 목소리가 그를 향했다.
“제가 가까이에 있으면 혹시 더 편찮으실까 봐 걱정이 됩니다.”
그것은 불행을 불러오는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익제가 못마땅한 눈으로 채선의 정수리를 노려보다 이내 맥 빠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소리 말고 배나 쓰다듬어 주시오.”
“예?”
“속이 안 좋은 것 같소.”
“아까는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하셨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