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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40)화 (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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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보면 볼수록
    누굴 닮았단 말이지.

    “으……응?”

    “무슨 생각을 그리 하셔요?”

    “아무것도 아니란다.”

    딴생각에 빠져 있던 채선이 송하의 타박에 슬그머니 얼굴을 붉혔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보던 송하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 같으니 무슨 일인지 보고 오겠습니다.”

    “응? 그래. 그러렴.”

    채선은 그제야 문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끼곤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방문 너머로 사라지는 송하의 뒷모습을 보며 슬그머니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익제의 입술이 닿았던 그곳이 아직도 뜨거웠다.

    채선이 또다시 상념에 빠질 무렵, 방문이 빼꼼 열리며 송하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부인…….”

    “무슨 일이냐.”

    채선은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송하를 보았다. 송하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일순, 채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익제님에게 무슨 일이……!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하얗게 질린 채선을 보던 송하가 황급히 두 손을 저었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한 가령을 필두로 하인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

    이냐고 물으려던 채선이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탐탁잖은 표정의 한 가령이 방 안으로 들어와 예를 표했다. 그는 깐깐한 눈으로 채선을 훑어보았다.

    “이게 다…….”

    “은원군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맨 앞에 선 하인이 탁자 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값비싼 산호장식이 나왔다. 그 뒤의 하인이 상자를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비단에 싸인 진주가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다.

    다음 하인이 상자를 열었다. 화려한 세공이 돋보이는 한 쌍의 금귀걸이와 머리꽂이가 우아한 자태를 드러냈다. 

    그렇게 예닐곱 명의 하인이 방을 나서자, 이번에는 색색의 비단을 든 하인들이 줄을 지어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채선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앞의 값비싼 보석과 비단을 보며 겁에 질린 듯 덜덜 떨었다. 한 가령이 그런 그녀를 보며 슬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채선이 수북하게 쌓인 선물들을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럴 리 없을 텐데, 라는 얼굴로 한 가령은 바닥에 쌓인 선물들에 시선을 주었다. 자신이 직접 고른 것이었다. 

    한때 황궁에서 일했던 그는 선물을 고르는 안목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탁월하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저 뜨뜻미지근한 반응은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 그는 향덕원의 안주인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표면상 은원군은 그의 주군이었지만, 한 가령은 그를 친손자처럼 여겼다. 익제가 젖먹이 때부터 제 손으로 보살폈으니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은원군의 배필로 채선보다 좀 더 기가 세고 강단 있는 여인을 원했다. 향덕원을 이끌어 가려면 어느 정도의 배짱은 필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대부인이 태부의 조카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익제는 그에 대해 함구하였지만 여우 같은 그가 짐작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한 가령은 행간의 의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났고 눈치도 몹시 빨랐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모로 보나 채선은 한 가령에 있어 한참이나 모자란 안주인이었다.

    ‘주군께서도 얼른 둘째 부인을 맞으셔야 하는데. 아니, 그런가?’

    며칠 전, 그가 연산댁에게 떠보듯이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곳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가신이 있다면 그건 익제의 유모였던 연산댁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혼인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둘째 부인 얘기십니까? 일러도 너무 이릅니다. 주인님께서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은근슬쩍 부인의 편을 드는 연산댁을 보며 한 가령은 “에잉.”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녀를 구워삶았길래 벌써 이리 싸고도나, 주군을 홀리더니 연산댁까지 홀렸군, 나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뾰족한 그의 심기가 더욱 언짢아졌다.

    그때, 채선이 울상을 지으며 한 가령을 돌아보았다.

    “너무 과합…… 과하오.”

    나이 많은 한 가령에 저도 모르게 존칭을 썼다가 타박을 들은 채선이 또다시 한 소리를 들을까,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두 눈을 크게 뜬 한 가령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방금 선물이 부족하다고 하셨습니까?”

    “아, 아니! 너무 과하다고 하였소!”

    한 가령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못 볼 것이라도 본 것마냥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이상했다. 그가 알기로 보석과 비단을 싫어하는 여인은 없었다. 그런데 채선은 한 가령을 향해 겁먹은 듯한 시선을 던졌다. 

    겁. 

    그래, 그녀는 난생처음 보는 귀한 선물 앞에서 겁을 먹고 있었다.

    “모두 돌려보내면 익…… 은원군께서 마음이 상하실 터이니, 하나씩만 남기고 도로 가져가시오. 이곳에 두어도 먼지만 쌓일 뿐이오. 은원군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겠소.”

    “흐음.”

    한 가령이 재는 듯한 시선으로 부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이것이 연기라면, 그녀는 세상사에 이골이 난 한 가령의 눈을 속일 만큼 뛰어난 광대일 것이다.

    향덕원의 안주인이 너무 검소해도 책을 잡힐 수 있지. 아무렴.

    한 가령은 속으로 생트집을 잡고서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분부를 받들겠습니다.”

    그가 다시 하인들을 불러 가져온 선물들을 도로 챙기라고 말했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연산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풍오가 난동을 부리고 있다 합니다.”

    “풍오가?”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을 나서던 한 가령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예. 오늘은 그 정도가 심한 모양인지 하인이 반쯤 우는 얼굴로 뛰어왔습니다. 주인님께서 또 천설을 타고 출타하셨답니다.”

    채선은 잔뜩 성깔을 부리고 있을 풍오를 떠올리며 푹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인이 여기까지 뛰어온 걸 보면 건초 통을 뒤엎는 건 물론이고, 십중팔구 마구간도 때려 부쉈을 것이다.

    “내가 가보마.”

    “그리 전하겠습니다.”

    송하가 눈치 빠르게 채비를 서둘렀다. 채선은 아직도 방 안에 서 있는 한 가령을 의아하게 쳐다보다 이내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곤 먼저 방을 나섰다. 

    “흐음.” 

    한 가령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채선을 보았다.

    “보면 볼수록 누굴 닮았단 말이지.”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 생각하기를 포기한 한 가령이 하인들과 함께 부인의 처소를 나섰다.

    ***

    익제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돌리며 방 안에 둘러앉은 면면들을 살폈다. 

    둘째 황자인 인애대군과 다섯째 황자인 효성대군, 여섯째 황자인 광무대군, 일곱째 황자인 한위대군까지 문효대군을 제외한 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뱃속에 칼을 숨긴 채 웃는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했다.

    구밀복검이 따로 없군.

    익제는 한배에서 난 이들이 결정적인 순간, 웃는 얼굴로 서로의 등에 칼을 꽂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순간이란 높은 확률로 ‘황제의 자리’일 것이다. 

    “오랜만에 형님들과 아우를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광무대군이 웃으며 말했다. 앞에 차려진 다과에 손을 뻗던 한위대군이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하고 인사치레를 했다.

    그를 자애로운 시선을 돌아본 광무대군이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사냥을 나간 지 꽤 오래된 것 같아 하인들에게 준비하라 이르다가 형님들과 아우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어울려 하는 것이 즐겁지요. 어떠십니까.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였지만, 같이 사냥이나 하심이 말입니다.”

    “허허, 사냥이라. 그것 좋지.”

    사냥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인애대군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떡을 집어 먹던 한위대군이 곧이어 “저도 좋습니다, 형님.”하고 대답했다. 

    효성대군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좋네.”

    사람들의 시선이 마지막 손님, 익제에게 꽂혔다. 그가 입가에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권해 준 건 고맙지만, 아쉽게도 나는 다음번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소.”

    “혹, 그때의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으셨습니까?”

    그때가 언제인지는 묻지 않아도 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애대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이 주최한 사냥대회에서 익제가 측근에게 공격당한 후 며칠간 종적을 감췄단 얘기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서는 그것이 인애대군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었다.

    “크흠.”

    인애대군이 불편한 표정으로 침음을 흘렸고, 광무대군은 예리한 시선을 걱정스러움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익제는 광무대군의 속내를 대번에 눈치챘다. 진실을 감추는 것에 누구보다 능한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광무대군은 행적이 묘연한 효명 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갈 것이다.

    익제가 더없이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럼……?”

    다음 순간, 그가 “허허.”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쑥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실은, 부인께서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여름 동안에는 풍주에 내려갈까 하오. 그러니 이번 사냥에는 참가할 수 없을 것 같소. 다음에 권해준다면 그때는 필히 참석하도록 하겠소.”

    “하하하.”

    그 말에 광무대군이 내심 안도한 얼굴로 파안대소를 했다. 그가 옆에 앉은 효성대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은원군 형님께서 팔불출이 다 되셨다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군.”

    하하하, 방 안에 다시 왁자한 웃음이 터졌다. 

    광무대군이 흡족한 표정으로 익제를 응시하다 이내 눈을 돌렸다. 사냥 일시와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더 오고 갔다. 

    “더 더워지기 전에 준비를 서두르겠습니다.”

    “그럼 연통을 기다리고 있겠네.”

    광무대군의 말을 끝으로 연장자인 인애대군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이들도 하나씩 엉덩이를 뗐다. 

    광무대군이 그들을 따라 나서며 인사를 건넸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다음번에는 사냥터에서 뵙겠군요. 그 전에 기별을 한 번 넣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은원군 형님은 여름이 끝나야 뵐 수 있겠군요.”

    “당장 떠나는 것은 아니니 시간이 되면 또 들르겠소.”

    그들이 막 광무대군의 처소를 나올 때였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여인이 깜짝 놀란 듯 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던 광무대군이 이내 웃는 얼굴로 소개했다.

    “제 부인입니다.”

    그 말에 효성대군이 짓궂은 목소리로 “자네 부인이 어디 한두 명이던가?” 하고 농을 던졌다. 광무대군이 객쩍은 웃음을 흘렸다. 

    “여섯 번째인 안평부인입니다.”

    그제까지 심드렁하던 익제의 시선이 이채를 띠었다. 

    ‘지금은 광무대군의 여섯 번째 부인입니다.’

    채선의 말을 떠올린 그가 여인의 얼굴에 눈길을 주었다. 

    그 순간, 이선이 고개를 들었다. 부지불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가 반쯤은 쑥스럽고, 또 반쯤은 교태로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

    일순, 익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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