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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9)화 (3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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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아니, 남의 불행을…….

익제의 능청스러운 농에 채선이 대번에 뺨을 붉혔다. 그것이 못내 즐거웠다. 동시에 아쉽기도 했다. 그가 보지 못하고 놓쳐 버린 수많은 표정들이. 

“이리 오시오.”

침상에 누운 그가 그녀를 향해 한 손을 뻗었다. 

채선은 쉬이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무엇이 그리 저어되시오? 우리는 부부가 아니오? 아니면, 내가 저잣거리의 불한당이라도 된단 말이오?”

그의 목소리가 은근히 서운한 빛을 띠었다.

“그, 그것이 아니라……!”

채선이 깜짝 놀란 듯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곤 마지못해 그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녀가 침상에 엉덩이를 슬쩍 걸쳤다. 

“그것이 아…… 으앗!”

그 순간, 익제가 단번에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눈 깜짝할 사이, 채선은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는 숨도 쉬지 못하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익제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누가 보면 자신이 그녀를 잡아먹는 줄 알겠다는 못마땅한 속내는 능숙하게 안으로 감추었다. 

그가 잔뜩 굳어 있는 채선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나른하게 속삭였다.

“부인이 나를 허락할 때까진 아무 짓도 하지 않겠소. 내 약속하오.”

“!”

품 안의 가녀린 몸이 파닥, 하고 뛰었다. 하하, 그의 잇새로 어이없는 웃음이 흘렀다. 고작 그 정도 말에도 놀라다니, 이거야 원, 이라는 한숨 섞인 실소였다. 

그러나 그 소심함이 싫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정성을 들여야 하는 번거로움도 성가시지 않았다. 겁 많은 그녀가 제 품 안에서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로움이야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그녀가 온전히 제게 몸을 맡기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하고 희열이 넘칠 것인가.

“주무십시다. 내일 하루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쁠 터이니, 지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어야겠소.”

내일이 무슨 날이던가, 생각하는 채선의 눈동자가 영문 모를 빛을 띠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던 그녀가 결국 옅은 한숨을 흘리며 작게 속삭였다.

“예. 안녕히 주무십시오.”

익제의 입매가 허물어졌다. 그가 나른한 잠기운이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든 해 보시오.”

“예?”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머리 위에 있는 익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잇새로 조금 더 뭉근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생각이 많아 잠이 오질 않으니 무슨 말이든 해 보라는 뜻이오.”

“어…….”

채선이 난감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이 오지 않는 것치고는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목소리였으나, 얼굴이 보이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그의 턱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이내 머쓱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하긴, 그가 자신을 속일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정말로 생각이 많아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다.

“무슨 말을……?”

그녀의 난감한 물음에 담담한 대꾸가 돌아왔다.

“어렸을 적 겪은 불운한 일들이라도 이야기해 보든가.”

아니, 남의 불행을……, 이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시무룩하게 입술을 삐죽이는 채선을 그가 다그쳤다.

“부인은 내가 이대로 날밤을 새우면 좋겠소? 눈 밑이 퀭해서 돌아다니면 하인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소?”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음, 그러니까 제가 열 살 때였나, 열한 살 때였나. 그쯤 되었을 거예요. 언니랑 누가 먼저 떡갈나무에 올라가는지 내기를 했는데……. 사실 제 자랑 같아 이런 말을 하기는 부끄럽지만, 제가 언니보다 나무를 잘 타거든요.”

“어쩐지 담장 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했소.”

“……죄송, 송구합니다.”

“되었소. 다 지난 얘기인 것을. 그 오얏나무는 베어서 땔감으로 쓰라 하였으니, 두 번 다시 나무를 탈 일은 없을 것이오.”

“예.”

채선이 찌무룩하게 대답했다. 저 때문에 애꿎은 나무가 수명을 다하였구나,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어찌 이야기를 하다 마시오? 나무 오르는 내기를 하였는데?”

“예. 먼저 도토리를 따는 사람이 승리하는 내기였습니다. 진 사람은 하루 종일 이긴 사람의 하인이 되기로 하였지요. 하루만이라도 동생이 아니라 언니가 되어 보고 싶어서 날다람쥐처럼 떡갈나무를 졸졸졸 기어 올라갔습니다. 언니는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제 뒤를 따라오고 있었죠.”

“흠. 불운한 이야기가 맞긴 한 거요?”

어딘지 아쉬운 듯한 익제의 목소리에 채선이 저도 모르게 토라진 눈을 했다. 그러다 머리 위에서 성마른 재촉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도토리를 따려고 나뭇가지 위를 기어가는 순간, 뚝 하고 가지가 부러졌습니다. 가장 굵은 나뭇가지였는데, 저보다 가는 나뭇가지 위에 있는 언니는 멀쩡하고 제 나뭇가지만 부러진 것이지요.”

“부인이 더 무거웠나 보지.”

“아, 아닙니다! 밥도 많이 안 먹었습니다!”

채선의 항변에 익제가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분명 그녀를 사기꾼이라 놀렸을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토라진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울상을 짓고 있을까.

그와 동시에 껴안은 팔을 풀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는 순간, 이 안온한 공기가 깨어질 것만 같았다. 모순적인 감정에 휩싸인 그가 이윽고 결심을 한 듯, 조용히 입술만 달싹였다.

“그래서?”

“이럴 줄 알았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 팔이나 다리 하나는 부러지겠구나, 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게 웬걸, 바닥이 푹신하지 않겠습니까?”

“오호, 어찌하여?”

“언니가 자리끼를 엎어 축축해진 이불을 말린다며 가져와 놓고 저랑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선 나무 아래에 팽개쳐둔 겁니다. 덕분에 저는 또 한 번 목숨을 건졌지요.”

“그러고 보니, 동기에게 몇 번이고 목숨 빚을 졌다고 하였지.”

“……예.”

그 역시 산골 처자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채선이 하늘하늘 풀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요? 음, 하루 종일 언니 심부름을 하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내가 아직 잠이 들지 않았으니 잠들 때까지 계속 이야기를 해 보시오.”

“으음…….”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는데, 고작 그 정도로 불행한 이야기가 바닥난 건 아니리라 믿소.”

아니, 그러니까 아까부터 남의 불행을…….

침울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이던 채선이 체념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 보자, 제가 일곱 살 때 일이었습니다. 이건 확실히 기억이 나요. 일곱 살 때가 분명합니다.”

채선의 목소리가 가슴께에서 웅웅 울렸다. 그것은 귀를 파고드는 게 아니라 곧장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나른한 피로감과 묵직한 안온함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익제는 조곤조곤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주 오랜만에 깊은 잠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아까부터 싱글벙글 웃는 송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선이 그렇게 물었다. 

송하는 행여 채선이 더울까, 그녀의 귀밑머리를 부채로 부치고 있었다. 그만하라 일러도 도무지 말을 들어 먹지 않았다.

웬만하면 모든 일을 스스로 하던 채선도 어느새 송하가 입혀주는 옷에 익숙해졌다. 제 손으로 이부자리를 정리하려고만 해도 송하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펄쩍 뛰니, 이러다 나중에 손발이 썩어 문드러질까 무서울 지경이었다.

채선의 물음에 송하가 입이 간지러워 죽을 뻔했다는 표정으로 “그게 말입니다.” 하며 넙죽 대답했다.

“제가 오전에 연산댁 아주머니 심부름으로 장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아무도 없는 방안을 휘휘 둘러보던 그녀가 채선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채선이 덩달아 어깨를 움츠리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놀이패들이 왔길래 구경을 하느라 한참이나 정신을 빼놓고 있다가 불현듯, 연산댁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오르지 뭡니까. 호되게 꾸지람을 들을 게 걱정되어 헐레벌떡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요. 부인처럼 쿵, 소리를 내면서 말이여요.”

“아니, 내가 언제…….”

의기소침하게 대답하던 채선의 눈이 대번에 동그래졌다. 문득, 그녀가 넘어진 게 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는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불행으로 이끈다던 이선의 말이 떠올랐다. 심장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사라졌다.

그러나 송하는 채선의 일변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하고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그런데 바닥에 엎어진 제 눈앞에 떡하니 은전 하나가 떨어져 있지 뭐여요? 이게 웬 떡이냐 싶었죠. 주위를 둘러보니까 다들 놀이패에 정신이 나가 아무도 제게 관심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얼른 은전을 쥐고 냅다 집까지 달려온 거여요. 오늘은 운이 좋은가 봐요.”

“……그랬느냐?”

그제야 채선이 안도한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지 송하의 얼굴에서는 온종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부채질을 하는 손이 살랑거렸다.

“팔 아프겠다. 이제 그만하거라.”

“방에 숨겨둔 은전 때문에 팔이 아픈 줄도 모르겠어요. 생전 공짜 양잿물 한 번 걸려 본 적 없는데 이게 웬 횡재래요? 동생들 이레 치 생활비는 될 거여요.”

히죽거리는 송하를 보며 결국 채선도 눈매를 접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은원군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느냐?” 하고 물었다. 

송하가 손으로 입을 막고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주인님이 보고 싶으셔요? 두 분은 정말 금슬이 좋으셔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곧 오시겠죠. 걱정 마셔요. 주인님이 세 살배기 아기도 아니고, 하물며 전쟁 통에 계신 것도 아닌데 무엇이 그리 걱정이셔요? 광무대군 댁에 가셨으니 별일이야 있으려구요.”

그게 걱정이란다.

채선은 차마 송하에게 하지 못할 말을 안으로 삼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에 송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가시면 안 됩니까?”

정안궁의 부름을 받았다는 익제의 말에 채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리 물었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광무대군이 나를 불렀다는 말에 부인은 딱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

“…….”

“나를 걱정했던 것이로군.”

별안간 익제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의 입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는 남의 속도 모르고 몹시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의 가슴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익제가 그녀의 잔머리를 쓸어 올리며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오늘은 다른 대군들도 다 같이 모이는 자리요. 여우처럼 약아빠진 작자가 공개적인 석상에서 무슨 짓을 할 리 없지 않겠소?”

“하지만…….”

“허나, 부인이 그리 걱정이 된다면 내 약조하겠소. 그곳에서 어떤 것도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예에.”

그래도 안심이 안 된다는 듯 채선이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익제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문득, 눈매를 찌푸린 그가 초조하게 턱을 매만졌다. 그러다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다녀오겠소. 늦지 않게 오리다.”

채선이 발갛게 물든 손등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기분 탓인지, 손에 닿은 이마가 홧홧했다.

“……인.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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