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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8)화 (3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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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피 냄새가 나느냐?

    채선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밟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미처 손을 짚을 새도 없었다. 느긋하게 정자에 기대어 있던 익제도, 바쁘게 그녀의 뒤를 따르던 송하도, 분주하게 음식을 나르던 하인들도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

    짧은 침묵이 흘렀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움직이던 모든 것이 정지했다. 채선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으하하하!”

    익제가 허리를 접으며 박장대소를 했다. 그 소리에 놀란 하인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곤 “괜찮으십니까?” 하며 채선에게로 달려왔다.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던 도영이 문득,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송하에게 눈짓을 했다.

    “저런.”

    채선의 머리 위로 다정한 음성이 떨어졌다. 아직도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짓궂은 목소리였다.

    “괜찮소? 다친 곳은 없소?”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그를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불현듯, 익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돌이켜 보면, 산골에서도 그랬다.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평평한 바닥에서도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였다. 

    요란한 소리가 나서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시무룩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몹시 궁금하였다.

    소심하고 겁 많은 여인이니, 분명 눈물을 글썽이고 있을 테지. 아니다. 어렸을 적부터 숱하게 넘어졌다고 하니 의외로 씩씩하게 툭툭 털고 일어나려나.

    답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에 혀를 차 봐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는 앞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익제는 시무룩한 얼굴의 채선을 보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우는 것이오?”

    “……아닙니다.”

    채선이 이깟 일로 울겠냐는 듯 두 눈에 잔뜩 힘을 줬다. 넘어질 때마다 울었다면 향덕원은 이미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이다.

    “저런. 콧잔등이 발갛게 부었는데, 아프지 않소?”

    익제의 자상한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무심코 콧등으로 손을 가져가던 채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표정이 풍부했고 동작이 먼저 튀어나왔다.

    “괜찮습니다. 하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채선의 씩씩한 대답에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자, 일어나시오.”

    그러나 채선은 그가 내민 손을 멀거니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낮게 혀를 찬 익제가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았다. 그러곤 단번에 그녀를 들어 올렸다.

    “!”

    채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잇새에서 비명이 터지려는 찰나, 익제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옷자락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송하가 흙이 묻은 익제의 손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자, 가십시다. 날씨가 좋아 후원에서 식사를 하기 그만이오. 이보다 더 더워지면 식사를 하는 사람이나 준비를 하는 사람이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익제가 그녀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반쯤 넋이 나가 있던 채선이 얼떨결에 그를 따라가며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불었다. 초여름의 온기를 품은 부드러운 미풍이다.

    “…….” 

    푸른색 포 자락과 붉은색 치맛자락이 한데 엉켰다.

    채선은 그가 이리 다정한 연유를 알지 못했다. 어쩌면 지켜보는 하인들의 눈 때문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녀가 쓸모있는 장기 말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연유가 무엇이든, 그녀의 가슴 속에선 또다시 염치없는 기대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황폐한 땅을 이기고 피어난 도라지꽃만큼이나 질기고 끈덕진 기대였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에 쌉싸름한 도라지 향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

    끼이익.

    나무 비틀리는 소리를 내며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원진이 횃불을 들고 익제의 앞을 비추었다. 익제는 습하고 딱딱한 돌바닥 위를 제집 안방처럼 익숙하게 걸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역함도 잠시, 날카롭던 후각은 서서히 무뎌지고 코끝을 괴롭히던 냄새도 사라졌다.

    이곳은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는 이가 없는 장소였다. 겉으로는 자애롭고 인자한 은원군을 연기하는 그의 본성을 엿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똑. 

    또옥.

    어디선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낯선 인기척에 놀란 생쥐가 찍찍거리며 우왕좌왕하다가 그의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떤가. 이제 배후가 누구인지 말할 마음이 드는가?”

    지하 공기보다 서늘한 익제의 목소리가 창살 너머의 검은 덩어리를 향했다. 흠칫, 효명의 어깨가 떨렸다. 

    원진이 들고 있는 횃불을 벽에 걸린 횃대에 꽂았다. 일렁이는 불빛이 한 치 앞의 어둠만 간신히 몰아냈다.

    효명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은 아예 떠지지도 않았고, 말라붙은 갈색 핏자국이 그의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그는 몸을 가눌 기운도 없는 듯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원진이 익제의 옆모습을 흘깃거렸다. 일렁이는 불빛 탓에 짙게 음영이 진 얼굴은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효명을 내려다보는 눈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오랫동안 제 곁을 지켜온 수하라도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내리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래. 그것이 그가 알고 있는 익제였다.

    그런데 요즘 따라 이상하시단 말이지.

    그는 익제가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다 무엄한 속내를 들킬까,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하인들에게 자애로운 상전인 척하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그의 본 모습을 알고 있는 건 아주 오랫동안 그를 모신,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수의 가신들뿐이었다. 

    한 가령과 연산댁, 그리고 세 명의 호위무사들.

    하지만 최근의 익제는 이전과 뭔가가 달랐다. 특히, 군대부인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는 마치 깨어지는 유리 조각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혹은 불면 날아가는 깃털이라도 움켜쥔 것처럼 쓸데없이 다정하고 온화했다. 

    문제는 그것이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원진의 상념이 끝도 없이 이어질 무렵, 익제의 싸늘한 음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의리를 지켜야 할 사이던가.”

    “…….”

    효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흡사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를 허공에 던질 뿐이었다.

    비식거리는 조소를 흘린 익제가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와 광무대군의 사이가 말이다.”

    “!”

    처음으로 효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온전한 한쪽 눈을 부릅뜨며 익제를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효명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효명의 목구멍 사이로 마르고 비틀린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익제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효명의 얼굴 위로 선연한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무릎걸음으로 기어 단번에 창살 앞으로 다가왔다.

    “주, 주군……! 안 됩니다, 주군께서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제 모친이……!”

    효명이 창살을 붙잡고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익제는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네 놈은 내 등에 칼을 꽂았는데, 나는 네 놈 등에 칼을 못 꽂겠는가.”

    “주군! 제발, 제발 광무대군께만은……!”

    익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효명이 비통하게 절규했지만, 그의 걸음은 결코 느려지지 않았다. 

    철컹철컹, 효명이 온 힘을 다해 창살을 흔들었다.

    “주군!”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지하 감옥을 떠돌았다. 그러나 익제와 원진, 두 사람 중 뒤를 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끼이익.

    지하 감옥의 문은 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다시 닫혔다. 킁킁, 별안간 걸음을 멈춘 익제가 자신의 소맷부리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가 나느냐?”

    “예?”

    원진이 영문 모를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쯧, 못마땅하게 혀를 찬 익제가 답답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어째 하나같이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는 듯.

    그가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돌리며 툭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일단 씻어야겠다.”

    “……예.”

    원진이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여전히 앞뒤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스스로 눈치가 없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지만, 요즘 들어 그 생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내가 눈치 없는 인간이었던가.

    그런데 그때,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익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홀어미라 하였나?”

    원진은 주어가 없는 그 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이런 걸 보면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라고 생각하며 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비는 전쟁 통에 죽고 어미가 날품을 팔아 효명을 키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친에 대한 정이 각별합니다.”

    “아무리 모친에 대한 정이 각별한들 주군의 등에 칼을 꽂는 놈을 용서할 순 없지.”

    “예. 일벌백계하심이 옳은 줄 압니다.”

    익제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등 뒤로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

    “오셨습니까?”

    “늦었는데 자지 않고 어찌 아직 깨어 계시오?”

    채선의 방으로 들어서던 익제가 의외라는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채선은 대답 대신 시선을 떨군 채 조용히 웃기만 했다. 

    피식,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소리를 흘린 익제가 그녀의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혹시 나를 기다렸소?”

    “……아닙니다.”

    대답이 늦었다. 그건 그렇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채선이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내리깔았고, 익제가 흐뭇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무슨 일이라?”

    익제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되물었다. 그러곤 습관처럼 제 소매를 들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설마 아직도 혈향이 나는 건 아니겠지, 그가 무심한 표정에 아래 난감함을 감추었다.

    익제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던 그녀가 이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생각이 많으신 듯 보여……. 주제가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흠.”

    그 말을 듣고서야 익제는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눈곱만한 동정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채선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가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제의 시선이 길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당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어…….”

    채선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문질렀다. 뭐가 묻어 있나 싶어서였다. 

    그 모습에 익제의 잇새에서 희미한 웃음이 터졌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와 동시에 결심이 섰다. 조금 전까지 북풍한설 같던 마음에 살랑살랑 춘풍이 불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 아니었고, 변덕은 죽 끓듯이 했다.

    그렇다고 효명을 살려주려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 흑막을 샅샅이 파헤치고자 하는 것이다.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부인을 생각하느라 그랬던 모양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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