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7)화 (37/131)
  • 16643786205958.jpg

    37

    하, 고작 그깟 이유로?

    그 말에 채선이 번쩍, 두 눈을 떴다. 그것은 방금 그녀가 한 말이 아니었다. 

    어느 봄날, 산골 처자가 그에게 종알종알 일러바쳤던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였다. 그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채선은 울음이 치밀 것 같은 얼굴로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금은 광무대군의 여섯 번째 부인입니다.”

    “광무대군이라. 광무대군…… 하.”

    형님이라 부르며 말씀 편하게 하시라, 살갑게 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측근에게 칼부림을 당한 상처는 괜찮으냐고 묻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선명했다. 신혼 재미는 어떠하냐고 짓궂은 농을 던지던 모습도 생생했다. 

    그였단 말인가, 모든 일의 배후가. 

    그를 믿었던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익제는 누구도 믿지 않았으니 배신감이라 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의 손 위에서 놀아난 스스로가 한심할 따름이었다.

    “하하.” 

    익제의 잇새에서 서늘한 웃음이 터졌다. 그 모습에 채선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눈치 빠른 그가 뒤늦게 혀를 차며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심약한 여인이다.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두 번 다시 곁을 내어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가 느릿하게 숨을 뱉었다. 냉혹하게 흔들리던 마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채선이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광무대군의 점술가가 말하기를, 은원군께서 그분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라 하였답니다. 그리하여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저를 태부의 양녀로 위장하여 은원군에게…….”

    그 순간, 그녀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소리가 되어 나온 말은 더욱 명확한 형체를 갖추었다. 

    자신이 익제에게 얼마나 극악한 짓을 저질렀는지 새삼 깨달은 그녀가 이윽고 젖은 숨을 삼켰다. 

    채선은 떨리는 손을 감추려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로써 그녀는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것이 이선에 대한 배반이 될지언정 채선은 더 이상 그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속일 수도 없었다. 그는 그리 만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거짓말 같은 건 한눈에 꿰뚫어 볼 터였다.

    “그리하면 나를 파멸시킬 수 있다?”

    “……예.”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 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따라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은 것은 익제의 처분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어떤 벌을 내릴까,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문득, 효명이 떠올랐다. 그는 어찌 되었을까? 살아 있을까? 아니면.

    “그래서 도망을 쳤다, 내게서?”

    희미한 웃음기가 묻은 익제의 물음이 채선의 상념을 흐트러뜨렸다. 그녀는 침묵으로써 그의 말을 긍정했다. 자신이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겠냐는 듯.

    “하, 고작 그깟 이유로?”

    익제의 잇새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가 한심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목 끝까지 올라온 험한 말을 삼키고서 표정을 가다듬었다. 

    짧은 침묵 후, 익제의 입술이 열리며 그 사이로 다정하게 꾸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소?”

    채선이 조심스러운 눈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얼른 알아채지 못했던 탓이다. 

    익제가 속으로 혀를 차며 조급하게 덧붙였다.

    “그날, 그대가 스스로를 역신이라 불렀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느냔 말이오.”

    “흡……!”

    그 순간, 채선은 또다시 젖은 숨을 삼켰다. 그녀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울렸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가 뿌옇게 흩어지며 그의 얼굴을 가렸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자신을 구원해주었던 그 한마디를.

    “내가 무어라 하였소?”

    “……흐으.”

    “내가 무어라 하였느냔 말이오.”

    익제가 초조한 어투로 자꾸만 그녀를 다그쳤다. 

    흡, 울음을 삼키며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선이 조용히 대꾸했다.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운명의 무게에 짓눌리던 그녀를 몇 번이고 일으켜 세운 말이었다.

    “고작 너……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채선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그제야 익제가 안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그가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떻소, 그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지 않소?”

    “……예.”

    그의 말이 옳았다. 그는 채선이 감히 올려다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잇새로 흐으, 하는 흐느낌이 비어져 나왔다.

    익제가 그녀에게로 상체를 기울이며 마치 어린아이를 꾀듯 곰살궂게 속삭였다.

    “그러니 그대 입으로 맹세하시오. 두 번 다시, 어떤 일이 있어도 내게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하지만……!”

    채선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두려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풍랑 위의 배처럼 마구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익제도 덩달아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두려운 건 냉혹한 익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였다. 끝내 그를 파멸로 이끌고 말 자신.

    익제가 더욱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얼렀다.

    “나는 그깟 항설에 흔들리지 않소.”

    “저는…… 제가 곁에 있으면…….”

    채선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무서웠다. 우러러보지도 못할 만큼 높은 곳에 있는 그가 자신으로 인하여 고꾸라질까 봐, 더러운 진탕 속을 뒹굴게 될까 봐, 그리하여 저를 원망하게 될까 봐, 손끝이 덜덜 떨릴 만큼 무서웠다. 

    별안간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나를 부인이 버리고 도망간 천하의 불한당으로 만들 셈이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였길래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인이 도망을 갔나,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게 만들려고 하느냐는 말이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허를 찔린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맙소사…….

    방금까지 그녀를 닦달하던 익제가 금세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마치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가듯 그의 태도가 널을 뛰었다. 그래서 채선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래도 저래도 나를 불운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곁에서 그 빚을 갚아 나가는 편이 낫지 않겠소?”

    “!”

    “온 마음을 다해, 그 빚을 갚아 나가시오. 내 곁에서.”

    “아…….”

    채선의 잇새로 신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밝혔는데도 그의 곁에 남을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말이다. 

    운이 좋았다. 불안할 만큼 운이 너무 좋았다.

    채선이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사이로,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은원군…….”

    “익제.”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채선의 말을 잘랐다. 그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소?”

    “하지만…….”

    “누구도 부르지 않는 이름이오. 그대와 마찬가지로.”

    “…….”

    익제는 그 말이 채선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고 있었다. 이름 한 번 불러 주었다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였으니, 아마도 채선은 자신의 말을 모른 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눈매가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채선의 잇새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반드시 익제님을…….” 

    그게 무어라고 그리 머뭇거리나, 그는 내심 혀를 차면서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덧입혀진 그의 이름은 다른 어떤 이의 것보다 훨씬 달콤하고 포근했다. 익제의 입매가 느슨해졌다.

    “행복하게 만들겠어요. 온 마음을 다해.” 

    이번에는 그의 눈매도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선은 결연한 얼굴로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익제님을 불운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짓은 하지 않겠어요.”

    “어쩌면 벌써 성공했는지도 모르지.”

    익제가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다. 

    한숨보다 작은 목소리는 미처 채선의 귀에까지 가 닿지 못했다. 대신 그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향했다. 

    한 손으로 채선의 뺨을 감싼 익제가 천천히 엄지손가락을 슬슬 움직여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느릿하고 은근하게.

    “!”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선이 이윽고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익제의 눈매가 흔흔한 빛을 띠었다. 

    제 손안에 있는 것, 그것이 의심할 여지 없는 그녀의 진실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믿고자 마음먹은 진실.

    그는 손안의 진실을 가만히 움켜쥐었다.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

    “참으로 다행이여요.”

    송하가 채선의 옷고름을 매어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제오늘, 송하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익제의 서슬 퍼런 모습에 곤욕을 치렀던 송하는 한껏 누그러진 그의 분위기에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서늘한 얼굴로 채선의 침소에 들어갈 때만 해도 그녀는 이제 꼼짝없이 쫓겨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부인이 감쪽같이 그를 속였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익제가 그녀를 용서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동생들 입에 풀칠해야 하는 저도 저지만, 부인의 신세가 하도 기구하여 눈물이 났다. 대관절 무슨 사연이 있길래 말 못 하는 행세를 해야 했나,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산댁을 붙잡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까지 했다. 연산댁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방에서 나오는 익제의 얼굴은 그녀가 이제까지 본 모습 중 가장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송하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눈이 마주친 익제가 그런 그녀에게 그윽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부인의 수발을 드느라 네 수고가 많다. 앞으로도 성심을 다하여 부인을 모시거라.”

    “예? ……예! 예, 그럼요.”

    그는 춘풍 같은 미소만 남긴 채 부인의 처소를 떠났다.

    “고맙고, 미안하구나. 나 때문에 네가 고초를 겪었어.”

    채선이 송하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송하는 채선의 목소리가 적응되지 않는 듯 어김없이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말을 할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그런 말씀 마셔요. 고초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보다 주인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서두르셔야 해요, 부인.”

    “그래, 그러자.”

    단장을 마친 채선과 송하가 바쁘게 처소를 나섰다. 도영이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랐다. 

    “후원에서 오찬을 함께 하자 하시는 걸 보면, 부인께서 심은 도라지꽃이 몹시 기꺼우신 모양입니다.”

    “그럴까.”

    채선이 쑥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짐짓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송하는 이미 그녀의 습관을 꿰고 있었다. 킥킥, 낮은 웃음을 삼킨 그녀가 후원으로 향하는 나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후원 한가운데에 있는 정자가 보였다. 그 너머로 푸른 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한발 앞서 도착한 익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그제야 채선의 마음이 급해졌다. 익제는 난간에 한 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은 채 여유롭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지던 그 순간.

    “으앗!”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