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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6)화 (3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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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흉인의 별이라?

    ‘고생이 많군.’

    원진이 복도에 서 있는 도영에게 입 모양만으로 인사를 건넸다. 익제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이미 방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도영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내 푹 하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던 원진이 슬쩍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문 앞에 서서 대수롭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같은 방 안에서 주군을 호위하는 것이야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탁자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익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저분이신가 보군.

    원진의 시선이 그의 앞에 있는 여인에게 머물렀다. 의자에 앉은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익제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부인은 쉬이 고개를 들지 못했고, 익제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동상이몽, 각자의 생각 속에서 무정한 시간만 쉼 없이 흘러갔다. 묵직한 공기에 원진의 숨이 턱 막힐 때쯤.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쯤 호기심 어린 원진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음? 

    일순, 그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어쩐지 그녀의 얼굴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동그란 이마와 순진한 눈망울, 꾹 다문 입매. 

    내가 저분을 어디서 봤더라, 곰곰이 생각하던 원진이 불현듯 떠오른 기억에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여인이 어째서?

    그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뒤덮였다. 원진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익제의 등 뒤에 선 그가 손가락으로 부인을 가리키며 커다랗게 외쳤다.

    “주군! 저분은……!”

    원진의 난데없는 고함에 채선의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단번에 그를 알아본 그녀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

    하지만 채선은 이미 마음을 정한 듯,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채선은 원진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입으로 말하겠으니 기다려 달라는 뜻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익제에게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고 신의였다. 

    그녀가 막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심채선.”

    익제의 잇새를 가르며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와 동시에 채선이 파랗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 멍하니 익제를 바라보다 뒤늦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곤 두 눈을 크게 떴다. 

    흡, 그녀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입술 끝이 움찔거렸다. 

    어떻게……?

    채선은 삐걱거리는 눈동자를 들어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익제는 시시각각 변하는 채선의 얼굴에서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송곳 같은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은 감정들을 낱낱이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 성난 파도처럼 휘몰아치던 거친 심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로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요즘 들어 그의 마음은 그의 것이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변덕이 죽 끓듯 했다. 

    그의 심사는 하루에 열두 번도 더 꼬였고, 그의 기분은 폭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요동을 치다가도 살랑거리는 봄바람처럼 누그러지기를 반복했다. 

    어쩌면 이대로 미쳐가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

    익제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듯 천천히 목울대를 울렸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원진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방에서 물러났다. 그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또다시 끝을 알 수 없는 침묵이 찾아왔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익제를 응시하던 채선이 가까스로 목구멍을 쥐어짰다. 그 사이로, 밭은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 물음에 익제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산을 내려오고 나서도 내도록 귓가를 떠나지 않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그녀가 작고 시무룩한 목소리로 종알종알 수다를 늘어놓으면 지루한 하루도 금세 지나가 버리곤 했다.

    불현듯, 그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그의 입술이 벌어지고 억누른 듯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떻게, 모르길 바랐소?”

    “!”

    익제는 시나브로 눈물이 차오르는 채선의 눈동자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언제였던가, 말만 한 산골 처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슬그머니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에도 금세 풀이 죽는 소심한 여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문득문득 궁금증이 치솟곤 했다.

    “…….”

    동그랗게 맺힌 물방울이 속눈썹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한계까지 부풀던 눈물이 마치 꽃잎처럼 팍, 하고 터지며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걸핏하면 젖은 목소리를 내던 여인의 우는 얼굴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연하고 서글펐다. 울고 있느냐고 물으면 늘 아니라고 고개를 젓던 여인은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속절없이 눈물만 떨구었다. 

    저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딛던 익제가 멈칫,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어금니를 사려 물며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모르길 바랐을까.

    어떻게 몰랐을까.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산골 처자를 떠올리게 하는 부인의 행동에 자꾸만 신경이 거슬렸던 것도, 매몰차게 화를 내면서 하염없이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것도.

    자신의 손을 잡아끌던 가느다란 손가락도, 밥 위에 나물을 올려 주던 무신경함도,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던 소심함과 발밑의 꽃 한 송이 밟지 못하는 여린 심성도.

    그리고.

    “도라지꽃.”

    “!”

    익제의 중얼거림에 채선의 눈매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위태롭게 맺혀 있던 눈물이 또 한 번 뺨 위로 굴러떨어지고, 그 사이로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익제는 채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를 잡아 가둔 후에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삭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던 그 밤을. 

    섬에서 자란 태부의 조카딸은 존재하지 않는다던 도영의 보고에도 그는 자신의 부인을 믿기로 했다. 그것은 그의 신념을 뒤엎을 만큼 충격적이고 이례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돌아온 것은 부인의 배신이었다.

    그리 다정하게 대해줬는데 어찌하여 제게서 달아났단 말인가, 대관절 무엇이 부족하여 도망을 쳤단 말인가, 나에게 보여준 행동 중에 단 하나라도 진심이 있었던가, 아니면 모든 것이 거짓이었나, 혹은 이 또한 태부의 계획인가.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덩치를 부풀렸다. 희미하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고, 짙은 배신감은 그의 신경을 좀 먹었다. 

    그녀를 상처 입히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희미하게 동이 틀 무렵,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생채기 내고 싶었다. 제가 아픈 만큼 그녀 역시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입에서 잘못하였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기도 했다. 마음이 급한 익제는 대문으로 돌아가는 대신 지름길을 택했다. 

    그가 후원의 문을 박차고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시선이 툭 하고 제 발치로 떨어졌다. 하얗게 밝아오는 하늘 아래, 이슬을 머금은 보라색 꽃잎들이 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렸다. 익제는 그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르던 한 가령이 노쇠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군대부인께서 손수 땅을 일구셨답니다.”

    한 가령은 그녀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은원군의 배필이자 향덕원을 이끌 안주인으로는 그릇이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슬며시 그녀의 편을 들었다.

    “주인님께서 후원으로 들어와 처음 보는 광경이 황폐한 땅이어서는 안 된다며, 하인들의 만류를 모두 물리치고 직접 흙을 만지셨다고 합니다. 하고 많은 꽃 중에서 왜 하필 도라지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

    익제는 그 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소박하고 욕심 없는 여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아름다운 꽃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데, 뿌리까지 약용으로 쓰인다니 얼마나 고마운 식물이냐며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던 바로 그 꽃이었다.

    “그러곤 어떻게 했더라?”

    “예?”

    익제의 느닷없는 물음에 한 가령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익제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래, 사기꾼이라는 내 말에 울상을 지었지.”

    쿵, 쿵.

    별안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며 마침내 명약관화한 진실에 당도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말도 안 되는 가정은 익제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고, 종래에는 반쯤 뛰다시피 했다. 

    등 뒤에서 한 가령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들뜬 익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채선의 웃는 얼굴이 아니라 그녀의 작은 등이었다. 그녀는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고, 그에겐 시선 한 조각 주지 않았다. 

    그래서 또다시 화가 났다. 방금까지 그렇게 들떠 있었으면서 그는 순식간에 싸늘한 표정으로 채선의 등을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제 마음의 주인이 아니었고, 그의 심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뒤틀렸다.

    “제가…….”

    어렵사리 입을 뗀 채선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익제가 상념에서 빠져나와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턱에 힘을 주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사뭇 두렵다는 듯이.

    만약 이번에도 그녀가 발뺌을 한다면, 아마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딜 수 없을 터였다. 기어코 그녀를 상처 내고 말리라.

    부디 바라건대, 그것만은 아니길.

    “……심채선입니다.”

    하아.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익제의 어깨가 느슨해졌다. 이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먼 길을 둘러 온 두 사람이 가까스로 출발점에 섰다.

    그녀가 더 이상 감추는 것 없이 모든 것을 말해 주길 바라며 익제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속였소?”

    “저는…….”

    비통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채선이 마치 자신의 죄를 고백하듯 처연한 얼굴로 속삭였다. 마치 말속에 가시가 숨어 있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저는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

    “흉인의 별이라?”

    익제의 미심쩍은 물음에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떨쳐내지 못한 눈물이 그녀의 속눈썹에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익제가 또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 움칫거리는 손을 거두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직은 아니다. 그녀가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선택한 후에.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한 족쇄를 채운 후에. 

    그때도 늦지 않는다.

    “예.”

    채선이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었다. 긴 이야기를 끝낸 그녀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매 끄트머리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한배에서 난 자매는 귀인의 별이고.”

    “……예.”

    “그, 운이 좋다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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