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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5)화 (3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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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부인을 집으로 모셔라.

그녀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더없이 차갑고 냉혹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익제가 상처 입은 표정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가 원한 결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

그녀는 단지 그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이다. 자신의 불운에 휩쓸리지 않고 평온한 삶을 누리길 바랐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런 표정을 짓도록 만든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였다.

손끝이 싸하게 식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그녀가 익제를 불행으로 이끄는 듯했다. 광무대군에게 위협이 되는 은원군을 파멸시키라던 이선의 말이 모두 현실이 되는 것만 같았다.

오들오들, 채선의 어깨가 떨렸다. 추운 것은 아니었다. 

두려웠다. 온몸이 떨릴 정도로 무섭고 겁이 났다. 벌써 자신의 불행이 그에게 옮겨붙었을까 봐, 채선은 감히 익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었다.

빌어먹을 운명에서 열심히 도망쳤지만, 결국 운명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채선은 무언가를 삼키듯 목울대를 울리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 위로 쓰디쓴 절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그 모습을 보던 익제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나운 빛을 띠었다.

“내게 붙잡힌 것이 그렇게까지 증오스럽다면, 좋소. 그대의 기대에 부응해주겠소.”

“…….”

“도영.”

“예, 주군.”

어둠 속에서 도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치 그림자처럼 익제의 곁을 지켰다. 

“부인을 집으로 모셔라.”

“예.”

“처소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서는 안 된다. 침실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게 하라.”

“……예.”

서늘한 명을 던진 익제가 곧장 등을 돌렸다. 도영이 채선의 곁으로 다가와 “가시지요.” 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채선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이 깜깜했다. 더 이상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늘 최악으로 치달았다. 

어째서 자신의 인생만 이렇게 고단한지 모르겠다. 그녀는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쳤다. 

***

“조금만 드셔요, 부인.”

송하가 죽이 든 소반을 들고서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채선이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송하는 하루 사이에 부쩍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언제까지 그리 굶으실 거여요? 꼬박 하루를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그러다 몸 상하실까 걱정되어요. 아무리 화가 나고 속이 상하셔도 식사는 하셔야지요.”

송하의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채선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꼭 감은 채로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려고 하면 할수록 일은 꼬이기만 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선이 아닐까, 채선은 쓴 물을 삼키듯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였다.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송하가 헉, 하는 숨을 내뱉었다. 그것만으로도 채선은 제 방을 찾은 불청객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익제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저를 모른 척, 못 본 척, 그대로 나가주길 바라며 이를 악물었다.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익제가 송하와 죽 그릇을 쳐다보았다. 별안간 그의 입매가 비틀렸다. 느릿하게 눈을 돌린 그가 채선의 등을 보며 물었다.

“부인께서 오늘도 식사를 하지 않으셨느냐.”

“……예, 주인님.”

말의 내용은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였으나 그의 잇새를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신의 등장에도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채선의 등을 쏘아보던 익제가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영.”

“예.”

익제의 부름에 문 앞에 서 있던 도영이 즉시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채선의 등에 머물러 있었다. 잠시 틈을 둔 그가 이내 냉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모시는 이를 굶어 죽게 만드는 계집종은 필요 없지 않느냐.”

“!”

생각지도 못한 불똥에 송하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도영이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고, 익제가 무감하게 덧붙였다. 

“무능한 계집종을 내 집에 두어 무엇 하겠느냐. 당장 쫓아내라.”

“주, 주인님!”

송하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겁에 질린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여기에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었다. 저만 바라보는 어린 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그 아이들의 입에 어떻게 풀칠을 한단 말인가.

송하가 다급하게 절을 했다. 

“주인님, 한 번만 용서하여 주셔요.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흡.

그 순간, 채선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던 익제의 눈매가 슥, 하고 가늘어졌다. 마치 크게 심호흡을 하듯 위아래로 들썩이던 어깨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가 서서히 감은 눈을 떴다.

“…….”

곧장 익제의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쳤다. 뱀 앞의 개구리처럼 꽁꽁 얼어붙었던 채선은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켰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울고 있는 송하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식사를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훌쩍훌쩍, 소매로 눈물을 닦고 일어난 송하가 이불 위에 소반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느릿하게 숟가락을 쥐었다. 

죽을 떠 입으로 가져갔다. 입안이 사포처럼 거칠어 도무지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꾸역꾸역, 죽을 삼켰다.

“내게 할 말이 없소?”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채선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양 말 없이 죽만 먹을 따름이었다.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하, 실소를 내뱉은 그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더니 이내 등을 돌렸다. 화가 나 견딜 수 없다는 듯 거친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방 안에 남은 것은 익제가 뿌리고 간 서늘한 냉기뿐이었다.

그제야 채선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익제가 사라진 방문을 바라보았다. 도영이 표정을 감추며 문밖으로 물러났다.

“군대부인…….”

송하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채선은 송하를 돌아보며 엷은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희미한 웃음은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송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

어떻게 해야 할까.

채선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심장이 따끔거렸다. 숨도 크게 쉬어지지 않았다. 납덩이를 매단 듯 가슴 언저리가 묵직했다. 

생각 같아서는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울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저 모두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인데.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그녀의 눈동자가 서글픈 빛을 띠었다. 아니, 답을 모르는 게 아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이 모든 불행의 근원이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이미 굴러가 시작한 운명은 미약한 인간의 힘으론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채선은 커다란 무언가를 삼키듯 천천히 목울대를 울렸다. 또르르, 그녀의 뺨 위로 처연한 눈물이 소리도 없이 굴러떨어졌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애초에 이선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끌라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인과응보였다.

“윽.”

채선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꾸역꾸역, 눌러 삼켰다. 우는 것조차 위선인 것처럼 느껴졌다.

익제의 다정한 시선을 마지막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제가 심채선이란 걸 알게 된 그의 얼굴이 실망과 배신,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산골 처녀가 끝까지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고통스러워했다. 더없이 싸늘한 눈동자 아래 상처 입은 익제가 있었다. 아프다는 말 대신 차갑게 화를 내는 그가.

그래서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다정한 가면을 쓸 여유조차 없는 그의 모습에 채선의 심장이 너절하게 무너져내렸다.

나는 무엇을 위해 떠나려 한 것일까. 그를 저토록 헤집어 놓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모든 걸 고백하고 그의 비난을 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보다 자신이 아픈 게 백배 더 나았다. 적어도 그녀는 타인의 모진 말과 손가락질에 익숙했으니 말이다.

아…….

불현듯,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그저 도망치고 있었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처 입은 익제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그의 냉혹한 시선과 맞닥뜨릴 자신이 없어서. 

그녀는 익제 역시 다른 이들처럼 저를 역신이라 부를까 봐, 결국 도망치는 길을 택했다. 그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며.

그러니 그녀는 단 한순간도 최선을 다한 적이 없었다.

하아.

채선의 잇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반쯤의 체념과 반쯤의 결의가 섞인 한숨이었다.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뿌린 씨앗은 자신이 거두어야 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책임질 수 없는, 온전한 그녀의 몫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릴 만큼 두려웠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을 만큼 무서웠다. 그러나 채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하가 곧장 곁으로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필요한 게 있으셔요?”

그렇게 물으며 그녀가 채선에게 석판과 숯을 건네주었다. 송하는 그녀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도 또다시 충성스러운 눈으로 채선을 걱정했다. 

물끄러미 송하를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목구멍 안쪽이 긁히며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은원군께 드릴 말씀이 있단다. 이곳에 와 주십사 전해 주렴.”

“!”

이윽고 송하가 경악한 얼굴로 두 눈을 크게 떴다.

***

“내게 할 말이 있다?”

“……예.”

송하는 반쯤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익제에게 군대부인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더없이 자애로운 주인님이었으나, 요 며칠 그는 북풍한설보다 차갑고 냉혹했다. 그래서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행여 군대부인에게 된서리가 떨어질까 봐.

송하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할 말이라.”

익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원진은 시선만 힐긋,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익제는 그의 부인과 관련된 일에서만 유독 감정적으로 변했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래. 무슨 말일지 몹시 궁금하구나.”

눈썹을 들썩인 익제가 곧장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비스듬한 미소를 띤 그가 지체 없이 방을 나섰다.

원진이 황급히 익제의 뒤를 따랐다. 번번이 때가 어긋나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안주인의 얼굴을 드디어 볼 수 있겠구나,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주군을 이렇게 만드셨나, 하는 무엄한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음?

그러다 다음 순간, 원진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떴다. 어째 익제와의 거리가 자꾸만 벌어졌던 탓이다. 

그의 걸음이 몹시 빨랐다. 송하라는 계집종은 두 사람을 쫓아오지도 못했다. 원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헐레벌떡, 그의 뒤로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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