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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4)화 (3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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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내게서 도망을.

    아무리 급하셔도 그렇지, 라며 겸연쩍은 눈길을 돌리던 송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 안의 공기가 이상하게 긴장되었던 탓이다. 

    송하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렸다. 그녀의 시선이 연산댁을 지나, 도영, 익제,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 닿았다.

    “!”

    다음 순간, 송하가 소리 없는 경악을 터뜨렸다. 침상 위에는 군대부인 대신 베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부인은 어디 갔느냐.”

    익제의 싸늘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답을 알지 못하는 건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이게 어찌 된…….”

    “군대부인은 어딜 가시고 베개만 있단 말입니까?”

    연산댁의 망연한 중얼거림을 뒤로 하고 송하가 되바라지게 물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헐레벌떡 방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황망한 손길이 문갑과 침상 아래, 탁자 뒤까지 샅샅이 뒤졌다. 

    이윽고 송하의 잇새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분명 침수에 드시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군대부인, 어디 계셔요? 대답 좀 해 보셔요, 군대부인.”

    “도망을 쳤다……?”

    “예?”

    익제의 혼잣말에 무심코 고개를 들던 송하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시퍼렇게 날 선 그의 모습은 흡사 귀신을 보는 것 같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송하는 저도 모르게 연산댁의 등 뒤로 몸을 감추었다.

    “내게서 도망을. 하하하.”

    익제의 잇새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니다.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렇게 차갑고 싸늘한 것이 웃음일 리가 없었다. 

    송하가 시선을 떨구며 벌벌 떨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이 꺾일 것 같았다. 힐긋, 그녀를 일별한 도영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주군.”

    익제는 도영의 부름을 듣지 못한 듯 열린 창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서슬 퍼런 눈매가 흉포한 빛을 띠었다.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모든 것이?

    수줍게 바닥을 헤매던 시선, 새빨갛게 달아오르던 두 뺨, 소리 없이 벙긋거리던 작은 입술과 서툴고 조악한 글솜씨. 

    그리고 다정한 한마디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까지.

    그 모든 것이.

    “감히 나를.”

    익제의 눈동자 위로 쓰라린 통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도 믿지 않겠다던 신념을 버리고 그녀에게 마음 한구석을 내어준 순간, 뒤통수를 맞았다. 쓸개를 씹은 듯 목구멍 안쪽에서 쓴 물이 올라왔다. 

    익제의 잇새로 한기를 품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소한의 사병만 남기고 모두 부인을 쫓는다. 실낱같은 흔적이라도 발견하는 즉시 내게 보고하라. 반드시 찾아야 한다. 날이 밝기 전까지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예.”

    도영이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서늘한 눈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익제도 이내 등을 돌렸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방문 너머로 사라졌다.

    그제야 송하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울먹이는 눈으로 연산댁을 올려다보았다. 송하의 잇새로 망연자실한 푸념이 비어져 나왔다.

    “이제 어떡해요…….”

    연산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거센 폭풍이 휘몰아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

    첫 번째 보고는 오래지 않아 들어왔다. 집 안을 수색하던 사병이 채선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었다. 

    하, 익제는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담을 넘어 도망쳤다라.”

    “그런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계획적이군.”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탈출로까지 봐 두었다. 그리고 도영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계획을 실행했다. 

    그 말은 스스로의 의지로 제게서 도망을 쳤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착각이 아닐까, 잠이 오지 않아 집 안 어딘가를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병들의 움직임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타나지 않을까, 하던 마지막 기대가 수포로 돌아갔다.

    익제의 안광이 위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곧장 대문 밖으로 나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도영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이 앞은 삼거리다.”

    “예. 하나는 도성의 중심인 저자로 이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배가 드나드는 나루터로 이어져 있으며, 남은 하나는 뒷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익제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다음 순간, 그가 도영을 향해 단호하게 명령했다.

    “저자와 나루터로 이어지는 길에는 최소한의 병사만 보내고, 나머지 사병들은 모두 뒷산을 수색하라.”

    그 말에 도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만약 이곳에서 도망치려 하였다면 가장 손쉬운 길은 나루터입니다. 사공에게 돈을 쥐여주고 나룻배를 얻어 타면 순식간에 하류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야심한 시각에 여자 혼자 산을 넘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인은 뱃멀미가 심하다. 나룻배를 타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도망자가 사람들 눈에 띄기 쉬운 저자로 향했겠느냐.”

    “……예.”

    그제야 익제의 뜻을 헤아린 도영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원진이 한 무리의 사병을 끌고 뒤늦게 합류했다.

    “효명에 대한 방비를 세워놓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되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은 병사들을 이끌고 저 산을 뒤져라. 발밑에 깔린 낙엽, 덩굴에 가려진 동굴. 사소한 것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된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입을 모아 대답한 원진과 도영이 각기 사병을 데리고 두 방향으로 흩어졌다. 익제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컴컴한 뒷산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도저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조급하게 외쳤다.

    “풍오를 데려오라!”

    ***

    산을 오르던 채선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숨이 조금 가빴지만 참을 만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산 짐승을 만나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이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일이 술술 풀렸다. 

    일순, 채선의 눈동자가 불안한 빛을 띠었다. 평소와 다르게 운이 좋았다. 그게 몹시 불길했다.

    “어?”

    그때, 등 뒤가 소란스러웠다. 채선은 잠깐 숨을 돌릴 겸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그와 동시에 그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산기슭이 마치 불에 타는 듯했다. 이글거리는 횃불들이 동그란 띠를 이루며 정상을 향해 점점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횃불들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어떻게 벌써…….”

    채선의 잇새로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꾸물거릴 때가 아니었다. 도망갔다는 사실을 들켰다면 이미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뜻이다.

    채선은 익제가 얼마나 냉혹한 성정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등에 칼을 꽂았던 측근을 용서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에게 남은 길은 한시라도 빨리, 한 걸음이라도 멀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채선은 겁에 질린 얼굴로 가파른 산길을 반쯤 기다시피 올라갔다.

    “하아, 하아.”

    잇새에서 거친 숨이 터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익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하얗게 식었다. 

    하지만 멈출 순 없었다. 멈추는 순간, 그가 자신의 뒷덜미를 덥석 낚아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분 탓인지, 바로 등 뒤에서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채선은 다시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횃불은 어느새 산 중턱을 지나고 있었다. 아득한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켰고, 그녀는 지체 없이 지름길을 택했다.

    험준한 비탈길이었다.

    “제발…….”

    그녀가 경사진 길을 다급하게 올라가던 바로 그때. 

    “!”

    젖은 나뭇잎을 밟은 채선이 그대로 쭉 미끄러졌다. 균형을 잡으려 팔을 휘저었지만 이미 늦었다. 채선은 가파른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렀다. 뾰족한 돌이 등을 찔렀고, 나무뿌리에 뺨이 긁혔다.

    뼈가 부러진 듯 아팠지만 차마 비명을 지를 순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굴러떨어지던 몸은 커다란 바위에 부딪히고 나서야 간신히 멈추어 섰다. 

    “으윽.”

    채선은 짧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웅크렸다. 몰매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삭신이 쑤시고 욱신거렸다. 동그랗게 몸을 만 채 몇 번 심호흡을 한 그녀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러곤 감은 눈을 떴다.

    “…….”

    그녀의 눈앞에 낯익은 가죽신이 보였다.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주춤주춤, 움직였다. 검은색 가죽신과 검은색 포 자락, 푸른 허리끈을 거쳐 조금 더 위로.

    마침내 그녀의 시선이 사내의 얼굴에 닿았을 때.

    “!”

    채선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하얗게 얼어붙고 말았다. 

    거기에, 자신의 눈앞에, 익제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한 점의 온기도 없는 눈빛에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채선은 그의 성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문 모를 다정함과 상냥함을 가장했지만, 실은 누구보다 엄혹하고 냉정한 성미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저를 향한 선득한 시선은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차갑고 싸늘했다. 심장이 더럭,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

    칠흑 같은 밤보다 까만 눈동자가 채선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익제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이동했다. 그의 눈길이 채선의 옷에 닿는 순간.

    “하.”

    그의 잇새에서 냉소가 터졌다. 

    만에 하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산길을 미친놈처럼 내달리면서도 그는 만에 하나를 생각했다. 혹여 누군가에게 납치당한 것은 아닐까, 효명을 사주한 자가 자신의 부인까지 노린 건 아닐까, 지난 여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익제에게서 달아났다. 심지어 옷까지 바꾸어 입고.

    그녀에게서 낯선 냄새가 났다. 평소의 무던하고 포근한 향이 아니라 땀에 전 불쾌하고 퀴퀴한 냄새였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서슬 퍼런 빛을 띠었다.

    “…….”

    그리고 채선은 절망했다. 저를 향한 익제의 시선을 보는 순간, 그녀는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그를 파멸시키기 위한 혼인이었음을 고백하는 게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경멸 어린 눈동자였다.

    채선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잇새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젖은 천을 찔러 넣은 것처럼 목구멍이 콱 막혔다.

    “하.”

    익제가 다시 한번 조소를 흘렸다. 그의 입매가 위험하게 뒤틀렸다. 채선을 노려보던 그가 비릿한 어조로 물었다.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실이오?”

    “…….”

    “아니, 그대가 내게 보여준 것 중에 진실이 있긴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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