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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3)화 (3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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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피 냄새가 나느냐?

채선은 목 끝까지 차오른 비명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두 손은 이미 담장을 짚고 있었다. 

“으윽.”

채선이 젖 먹던 힘을 다해 발버둥을 쳤다. 그녀의 두 발이 담벼락을 와다닥, 빠르게 찼고 상체가 서서히 담장 위로 올라갔다. 

간신히 담벼락 위에 가슴을 걸친 채선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하아.”

쿵쿵 뛰는 심장을 누르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담장 위로 나머지 몸을 끌어올린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담장의 높이가 제 키에 두 배는 됨직했다. 마치 까마득한 벼랑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으아악.

숨죽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다리가 욱신욱신했다. 

하지만 멈춰 있을 시간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야 했다. 이제까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게 기적 같았다. 

그녀는 향덕원 뒷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산은 채선에게 익숙한 장소였고, 몸을 숨길 곳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하아, 하아.”

채선의 잇새에서 연신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모든 일이 그녀의 계획대로 술술 풀렸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불길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

턱을 괴고 앉은 익제가 손가락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시각은 어느새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원진이 향덕원 안으로 들어왔다는 보고가 있었으니 아마 오래지 않아 저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단상 위 높은 의자에 앉아 방안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찌한다.”

어떻게 하면 네 놈을 더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까, 그가 냉랭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너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서 저 문을 들어올 것인가. 

그때였다.

“원진입니다.”

문밖에서 크고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한 가령이 사병들에게 “문을 열어라.” 하고 명했다. 사병 두 명이 양쪽에서 커다란 문을 잡아당겼다. 

가장 먼저 원진이 들어와 예를 표했고, 그의 뒤로 한 사내가 병사들의 손에 질질 끌려왔다.

그는 자신의 다리로 설 수조차 없었다. 눈두덩이 찢어져 둥그렇게 부풀었고, 얼굴은 피와 멍으로 울긋불긋했으며, 오른쪽 다리는 기묘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조금의 측은지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털썩.

병사들이 효명을 바닥에 내던졌다. 힘없이 쓰러진 그가 잠시 그대로 꿈틀거리다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주……군.”

그의 잇새로 낮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섞인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익제가 손등에 턱을 괴었다. 그러곤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 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주군.”

효명 역시 익제를 곁에서 모신 지 십수 년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 눈으로 익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순간. 

“누군가.”

익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분노를 터뜨리지도 않았다. 그저 오늘 날씨가 어떠한가, 하고 묻듯 지극히 여상하고 평연한 어조였다. 그 모습이 더욱 소름 끼쳤다. 오싹한 한기가 효명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누가 네 놈에게 나를 죽이라 명하였는가.”

“……주군!”

효명이 바닥을 바득바득 기어 익제에게로 다가갔다. 

스릉, 도영이 단숨에 검을 뺐다. 그가 검 끝을 효명에게 겨누며 “멈춰라.”고 명했다. 효명은 한때 자신의 동료였던 도영을 멈칫멈칫, 올려다보았다. 

도영의 얼굴에서는 그간의 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배신자를 보듯 차가운 눈매가 그를 향했을 뿐이다.

효명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다. 그를 잡아 온 원진 역시 살기등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를 살려서 데려오라는 명이 없었다면, 그는 진작 원진의 손에 죽임을 당했을 터였다.

“윽.”

“주군께서 묻는 말에나 답하라!”

도영이 싸늘한 어조로 일갈했다. 효명은 배신자의 말로가 어떠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 손으로 직접 배신자를 처단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익제는 그 모습을 무감정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팔걸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이윽고 그의 잇새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

번쩍.

효명이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듯 고개를 쳐들었다. 

“주군!” 

그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익제를 불렀다. 익제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하나는 배후가 누구인지 발설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 다른 하나는, 끝까지 함구하여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가는 것.”

“…….”

효명이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에 시나브로 절망이 내려앉았다. 익제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의 앞에 놓인 게 죽음뿐이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효명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가빠졌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그가 가까스로 입술을 뗐다. 효명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듯,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구, 하겠습니다.”

“하하하.”

문득, 익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다음 순간, 그의 눈매가 선득한 빛을 띠었다. 그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네 놈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아는 것인가.”

“주군,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효명이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맹세코 그는 익제를 우습게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원진, 도영과 더불어 그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자애로운 사람을 가장했지만, 실은 누구보다 혹독하고 비정한 것이 익제였다. 그런 그를 우습게 여기다니, 말도 안 된다. 

“!”

익제가 단번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단 아래로 걸어 내려와 곧장 효명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도영의 손에서 검을 낚아챘다. 검 끝이 효명의 목을 겨누었다. 

움찔, 효명의 몸이 떨렸다.

“그래. 누가 이길지 궁금하구나.”

익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효명의 목을 베었다. 피가 튀었다. 

“크윽.” 

효명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죽었구나 싶은 순간. 

“?”

그는 자신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릉그릉, 목에서 피거품이 끓었다. 곧이어 타는 듯한 격통이 온몸을 달렸다. 그는 피가 솟구치는 목을 반사적으로 감싸 쥐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그릉그릉.

숨을 쉴 때마다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익제가 피식 웃었다.

“왜?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주군, 효명이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그의 눈동자에 익제의 얼굴이 가득 찼다. 익제가 도영에게 검을 넘겨주며 한 가령에게 명령했다.

“적당히 치료해주어라. 그래야 다시 저놈 목에 칼을 찔러 넣을 것 아닌가.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구나. 이제까지 가장 오래 버틴 자가 보름이었나?”

“열아흐레였습니다.”

“그래?”

가볍게 눈썹을 까딱이며 효명을 돌아본 익제가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명색이 내 호위무사가 열아흐레도 못 버텨서야 면이 서겠는가. 기대하마.”

그릉그릉.

효명이 그를 부르려는 듯 다시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소리 대신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익제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방을 나섰다. 도영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부인의 처소로…….”

거기까지 말하던 익제가 도영을 돌아보았다. 그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를 들어 올렸다. 킁킁, 냄새를 맡던 익제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 냄새가 나느냐?”

“예?”

도영이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눈살을 팍 찌푸린 익제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내게서 피 냄새가 나느냔 말이다.”

“……예.”

도영이 피가 튄 익제의 옷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가 튀었으니 피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제가 모르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인가, 그가 긴장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쯧, 다시 한번 혀를 찬 익제가 발길을 돌렸다.

“일단 목욕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처소로 가자.”

“예.”

도영은 즉시 고개를 숙인 후 익제의 뒤를 따랐다. 그제야 그의 속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도영은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익제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뒤늦게 작고 겁 많은 안주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

갑작스런 익제의 등장에 연산댁과 송하가 자다 말고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그럴 것 없다는 듯 익제가 한 손을 휘휘 저었다. 허리를 숙였다 드는 송하의 눈에는 아직도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익제는 두 사람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채선의 침실로 향했다. 그의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던 송하가 ‘아니, 뭐가 그리 급하셔서…….’ 하는 말을 삼키고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

“부인께서는 일찌감치 침수에 드셨습니다. 제가 지금…….”

“깨우지 마라.”

익제가 한발 앞서 달음박질치는 송하를 만류했다. 

끼이익, 그 자리에 멈춰 선 송하가 “예.”하며 고개를 숙였다. 부인께서 곤히 주무시니 깨우기 싫으신 모양이지, 하여간 금슬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송하가 무엄한 생각을 하며 비죽 솟는 입매를 손으로 가렸다. 

방문 앞에 선 익제가 다시 한번 소매를 들어 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서슬 퍼런 말 한마디에도 하얗게 질리는 여인이니, 혈향이 났다가는 두 번 다시 제 곁에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손이 많이 가는 부인이군.”

익제가 성가신 투로 불평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가 온기를 품고 있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송하가 연산댁을 힐긋거리며 눈웃음을 쳤다. 연산댁이 채신머리없는 그녀의 행동에 사뭇 엄한 표정을 짓고는 방문을 열었다.

“드시지요.”

익제는 부인의 단잠을 방해할까, 발소리를 죽였다. 문득, 열려 있는 창이 눈에 들어왔다. 눈매를 구부린 그가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더위를 많이 타는 모양이군. 올여름에는 영락없이 별저로 피서를 가야겠어. 한 가령이 업무가 과중하다며 우는소리를 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흔흔하게 혼잣말을 읊조리는 익제의 눈매가 달그림자에 머물렀다. 낮게 깔린 구름이 달빛을 모두 가렸다. 별마저 사라진 하늘은 까마득하게 높은 듯도 했고, 혹은 손에 닿을 듯 낮은 듯도 했다.

묘하게 가슴이 술렁이는 밤이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던 익제가 금세 웃는 낯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다정한 시선이 침상에 닿는 순간.

“…….”

일순,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의 그가 성큼성큼, 침상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이불깃을 잡고 단숨에 젖혔다. 

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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