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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2)화 (3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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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원진.

    채선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의 웃음이 거짓이 아닌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그것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미소가 아니었다. 마치, 그래, 오래지 않은 어느 날, 툇마루에 기대어 앉아 조용히 함소하던 그날과 닮아 있었다.

    쿵. 쿵.

    채선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는 갑자기 바뀐 익제의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익제는 오다 말고 방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가 의아한 듯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제야 채선이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내딛기 시작했다.

    해가 길어졌다. 저녁 식사 시간임에도 창밖은 여전히 환했고,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열린 창으로 산들거리는 바람이 이따금씩 불어왔다.

    채선이 자리에 앉았다. 송하가 그녀의 옆에 숯과 석판을 내려놓고는 물러났다.

    “편히 쉬었소?”

    끄덕끄덕.

    기다렸다는 듯, 하녀들이 차례로 음식이 날라왔다. 

    “드십시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익제의 젓가락은 가장 먼저 고기반찬을 향했다. 그 모습에 채선이 조용한 웃음을 삼켰다. 

    그 기색을 눈치챈 익제가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채선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식사에 전념했다. 무슨 말인가 하려던 익제가 가볍게 눈썹을 들썩이곤 그녀의 입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많은 말이 필요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나직한 목소리와 사각거리는 필담, 그리고 편안한 침묵 속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 간간이 익제의 웃음이 터졌고, 때로는 채선의 소리 없는 미소가 적막을 흔들었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그런 기대가 피어났다. 어쩌면 그냥 이대로 아무 일 없이,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는 이 없이 지금과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치스러운 기대였다. 그 기대는 조심스럽게 싹을 내밀고 작은 잎을 틔웠다.

    그때, 방문 앞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소인입니다.”

    한 가령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익제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들라.”고 명했다. 이내 방문이 열리고 꼬장꼬장한 걸음의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채선에게 예를 표한 후 익제의 곁으로 걸어갔다.

    “방금 원진의 전갈이 당도하였습니다.”

    원진.

    “!”

    무심코 그 이름을 되뇌던 채선이 그대로 굳었다. 깊은 산골, 그녀의 집으로 풍오가 데려온 사내의 이름이 분명 원진이라 하였다. 

    채선은 숨도 쉬지 못하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젓가락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것을 숨기려 채선은 자신의 손을 식탁 밑으로 감추었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었다.

    “언제 도착한다던가.”

    “관원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만 이동을 하느라 예정보다 늦어지고 있답니다. 허나, 오늘 자정에는 당도할 수 있을 거라 하였습니다.”

    “그래.”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익제가 날카로운 눈으로 한 가령을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가 선득한 빛을 띠었다.

    “그자는?”

    “예. 숨은 붙어 있다 합니다.”

    흡, 채선이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제야 그가 측근에게 칼을 맞았다는 끔찍한 사실이 떠올랐다. 반드시 그자를 살려서 데리고 오라던 서슬 퍼런 명령도.

    “부인.”

    움찔, 어깨를 떠는 채선의 기척에 고개를 돌리던 익제가 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낮게 혀를 찼다. 그가 못마땅한 눈으로 한 가령을 노려보았다.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니다. 물러가라.”

    “……예.”

    원진에게서 소식이 당도하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보고하라 명했던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익제였다. 그의 명을 충실히 따른 죄밖에 없는 한 가령은, 그러나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얌전히 물러났다.

    쯧.

    채선을 보던 익제가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하고 겁이 많은 여인이었다. 다정한 한 마디에도 금세 주눅이 들고, 파르라니 질리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관원의 눈을 피한다느니, 숨은 붙어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쏜가.

    익제는 애써 입꼬리를 당기며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잇새로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오늘 밤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어 늦어질 것이오. 새벽에 부인의 침소에 들렀다간 곤한 단잠을 깨울 터이니, 오늘은 혼자 주무셔야겠소.”

    망연자실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채선은 “부인?”하고 재차 저를 부르는 익제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울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익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부인.”

    그 순간, 싹을 틔웠던 기대가 툭 하고 꺾였다. 언젠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고꾸라졌던 그 날처럼.

    원진, 그는 분명 날 기억하고 있을 거야.

    “많이 피곤한가 보오. 이만 쉬시는 게 좋겠소?”

    채선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익제의 상냥한 음성이 귓가에서 웅웅 울렸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수만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여봐라.”

    익제가 문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연산댁이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께서 몸이 안 좋은 듯싶구나. 방으로 모시거라.”

    “예.”

    채선이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며 시선을 떨구었다. 불현듯, 그녀의 눈매가 단호한 빛을 띠었다.

    기회는 오늘밖에 없었다. 그가 오지 않는 밤.

    ***

    멀리서 소쩍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채선은 조용히 이불을 걷고 침상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귀를 기울였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 자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늘 채선의 곁을 지키는 도영도 오늘만큼은 자리를 비웠다. 익제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부름의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효명이란 사내, 남자의 등에 칼을 꽂은 측근.

    “…….”

    채선은 텅 빈 침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이대로 사내의 곁을 지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게, 정말로 군대부인이 되어 조용히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운명은 늘 그렇듯 채선의 편이 아니었고, 그녀는 늘 그렇듯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발이 떼어지지 않는 건 순전히 그가 걱정스러웠던 탓이다.

    익제가 또다시 가까운 이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길까 봐, 그리하여 분노와 슬픔에 휩싸일까 봐 마음이 쓰였다.

    “아닌가. 애초에 나를 믿지도 않았나.”

    채선의 혼잣말이 깊은 밤 속으로 스르륵, 녹아들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편이 나았다. 그녀가 광무대군의 장기 말이라는 사실을,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혼인하였다는 사실을 들키는 것보다는 그편이 나았다.

    심채선.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익제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조금은 거만하고, 또 조금은 못마땅하며, 아주 조금은 다정하던 그 목소리. 

    저를 향한 살가운 눈동자가 배신감으로 물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그 상냥한 얼굴에 분노와 경멸이 담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이대로 사라지는 게 백배 나을 성싶었다. 

    그는 세상에 단 두 명 남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마저 이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역신이 아니라, 혹은 흉인이 아니라, 오롯이 심채선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러니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은 채선이 침상 아래를 뒤적였다. 손끝에 거친 천 자락이 만져졌다. 산책을 한다는 핑계로 향덕원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쌓여 있는 빨랫감 사이에서 몰래 가져온 사내 옷이었다. 

    “윽.”

    누구의 것인지 정체가 불분명한 옷에서는 불쾌한 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채선은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도 대충 하나로 묶었다. 

    챙겨두었던 패물 주머니를 가슴팍에 단단히 쑤셔 넣고 나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당분간 배곯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그다음에는.” 

    방안을 둘러본 채선이 다시금 침상으로 향했다. 그러곤 이불 아래에 베개를 넣어 봉긋하게 만들었다. 

    빛이라곤 창에서 비쳐드는 어스름한 달빛 하나뿐이었다. 혹, 송하가 밤중에 문을 열어 보더라도 눈치채지 못할 성싶었다. 

    “좋아.”

    채선은 살금살금 창가로 다가가 걸쇠를 풀었다. 창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띄운 그녀가 창틀을 넘었다. 사박, 발밑에 젖은 풀이 밟혔다. 그녀는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곧장 뒤뜰로 향했다. 

    그곳에는 하인들이 드나드는 작은 쪽문이 있었다. 채선은 쪽문의 손잡이를 잡고 살며시 밀었다.

    끼이익. 

    “!”

    나무문이 비틀리는 소리에 심장이 덜컹, 하고 떨어졌다.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채선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사위는 고요했다.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빼꼼, 고개를 내민 그녀가 이번에는 바깥쪽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대다수 사병은 익제의 처소에 모여 있을 것이다. 그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 효명이 잡혀 오는 날이니 그게 당연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오늘 밤이 절호의 기회였다. 불운한 그녀치고는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졌다.

    내가 도망쳤다는 사실은 언제 알게 될까? 내일 아침 송하가 나를 깨울 때일까? 그때쯤이면 나는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을까?

    벌렁거리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채선은 입술을 꾹 깨문 채 평소 봐 두었던 담장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나뭇가지가 담장에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송하에게 듣기로는 경비를 이유로 담장의 모든 나무를 베었지만, 그 오얏나무 하나만은 남겨 두었다고 했다. 

    어느 고승이 집 앞을 지나다 나무를 베는 하인들을 향해 “훗날 큰 쓰임이 있을 터이니 저 오얏나무만큼은 남겨 두라.”고 일렀기 때문이다.

    채선은 그것이 저를 위한 쓰임이 아니었을까, 아무도 몰래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그런 운 좋은 일이 일어날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 

    나무 아래에 선 채선이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빠르게 오얏나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무를 오르는 것이었지만, 실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어릴 적, 삼시 세끼 밥을 먹듯이 이선과 함께 나무를 오르며 놀았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하아.”

    잠시 숨을 돌린 채선이 눈앞에 있는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수명이 수백 년은 됨직한 오얏나무답게 가지가 제법 굵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무게를 견디기에는 한없이 모자랐다. 

    “좋아.”

    스스로에게 들려주듯 낮게 속삭인 그녀가 살금살금, 나뭇가지 위를 기어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두꺼운 가지가 아래로 휘어지며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거렸다. 그때마다 채선의 심장은 덜컹,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담장이 코앞이었다. 채선은 최대한 몸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가지 위를 기었다. 

    그녀가 담장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

    빠지직.

    불길한 소리가 채선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나뭇가지가 똑 하고 부러졌다.

    “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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