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부인께서 선 채로
기절을 하셨습니다!
‘도영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제가 부인의 곁을 지킬 것입니다. 그림자처럼 따를 터이니 귀찮다 여기지 마시고 어여쁘게 보아주십시오.’
서글서글한 미소의 사내가 그리 말했다.
어여쁘게?
생뚱맞은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채선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도영은 그 후로 채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다녔다.
말 그대로 어디든.
그것이 익제의 명이라고 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과 달리 행동은 어찌나 민첩한지 따돌렸다 싶으면 어느새 등 뒤에 서 있었다.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실실 웃으면서.
이러다 영영 도망칠 기회를 잡지 못할 것 같아 초조해졌다. 채선은 풀 죽은 얼굴로 안채의 문을 나섰다. 뒤에서는 도영과 송하가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왔다.
채선은 며칠 사이 익숙해진 길을 따라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
그런데 어쩐 일이지 집 뒤편이 소란스러웠다. 의아한 마음에 그리로 걸음을 옮기자, 도영이 앞장을 섰다. 송하가 발긋한 얼굴로 그를 힐끔거리며 채선의 뒤를 따랐다.
어……. 어? 으음.
그 모습에 채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렸다. 어린 동생을 보듯 흐뭇한 시선이 송하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긴, 그녀의 눈에는 아직 어려 보여도 송하 역시 여자였다.
“아이고, 또 왜 그런디야.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대, 으이?”
우는소리를 하는 하인의 푸념이 쪽문을 넘어왔다. 모퉁이를 꺾어 돌자, 앞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는 풍오의 모습이 보였다.
아.
그제야 어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풍오의 심기가 제대로 뒤틀린 모양이었다. 이러 겅중, 저리 겅중 하는 모습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았다. 아니, 망아지가 아니라 덩치 큰 말이라는 게 더 질이 나빴다.
“저놈 또 지랄…… 읍.”
무심코 혼잣말을 하던 송하가 도영의 눈치를 살피고는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인은 미쳐 날뛰는 풍오를 보며 연신 발을 동동 굴렀다. 풍오가 여물통을 걷어찼다. 쏟아진 건초가 바닥에 흩날렸다.
“제발 좀 진정…… 아이고, 부인께서 예까지는 어인 일이십니까?”
그제야 채선을 발견한 듯 하인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채선은 고개만 한번 끄덕이곤 성난 풍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쉬익, 쉬익, 풍오가 거친 콧바람을 내뿜었다.
“건초가 입에 안 맞나 봅니다.”
하인의 변명에 채선이 고개를 숙였다. 데굴데굴 굴러간 여물통이 보였다. 나물 반찬이 입에 맞지 않는다고 투정을 하던 익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인이나 말이나 입맛이 까다로운 건 매한가지였다.
저벅, 저벅.
채선이 풍오에게로 다가갔다.
“위험합니다, 부인.”
도영이 그런 그녀를 만류했으나 채선은 괜찮다는 듯 씩, 웃어 주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진 당근 하나를 주워 풍오의 입가에 가져갔다.
지랄 발광을 하던 풍오가 어느새 움직임을 멈추고 뚱한 표정으로 채선을 내려다봤다.
“…….”
채선이 당근을 조금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어서 먹지 않고 뭐 하냐는 듯.
푹, 한숨을 쉰 풍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가 내민 당근을 베어 물었다. 아그작, 뭉툭한 이빨이 당근을 부러뜨렸다. 풍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당근을 우물거렸다. 맛은 없지만 은혜를 봐서 참아준다는 태도였다.
채선이 잘했다는 듯 풍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다정한 손길에 풍오의 불퉁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입안의 당근을 삼킨 풍오가 채선의 손안에 남은 당근을 쏙 빼갔다.
채선은 동그랗게 웃으며 연신 풍오의 볼을 어루만졌다.
“부인은 어찌 된 게 이 세상에서 나만 빼고 다른 이에겐 죄다 다정하시오?”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등을 때렸다.
“!”
깜짝 놀란 채선이 고개를 돌리자, 심통이 난 듯 미간에 주름을 잡은 익제가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성미 고약한 말의 기분을 풀어주니, 그 주인이 화를 내고 있었다. 역시 주인과 말이 꼭 닮았다.
“틈만 나면 어머님을 뵈러 가고, 안채에서 나왔다 싶으면 풍오를 만나러 가고. 대관절 나는 언제 부인의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이오?”
“!”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그녀의 뺨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그녀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도영은 괜히 하늘을 보며 딴청을 부렸고, 송하는 입을 막은 채 키득거리는 웃음을 터뜨렸으며, 풍오는 그제야 입맛이 돌기 시작했는지 바닥에 엎어진 건초를 입안으로 구겨 넣었다.
“내가 부인의 남편이 맞긴 하오?”
끄덕끄덕.
익제의 끈질긴 시선에 채선이 한참 만에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에 익제의 모난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나와 같이 산보를 가시겠소?”
“?”
“내일이면 도성으로 돌아가야 하니 마지막으로 바다나 한 번 더 보려고 하는데, 부인도 같이 가시겠냐, 이 말이오.”
아.
채선은 이곳을 떠나야 하는 날짜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것을 깨닫고는 새삼 풀 죽은 표정을 지었다. 눈매를 찌푸린 익제가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곧 다시 올 것이오.”
“?”
채선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각 없이 뱉은 말에 익제가 탐탁잖은 기색으로 눈매를 찌푸리다, 슬그머니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부인의 얼굴을 보고 얼른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큼, 등 뒤에서 도영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향덕원을 비우게 되어 수많은 일거리가 산적해 있으니 오래 머물지는 못하오. 다음번에는 여러 준비를 마친 뒤 조금 더 여유롭게 옵시다. 이곳은 여름을 나기에 무척 좋은 곳이라오.”
끄덕끄덕.
채선이 야무지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바다가 근처에 있으니 한여름에도 그리 더울 것 같지 않았다. 그때쯤이면 집채만큼 큰 고등어를 볼 수 있으려나?
“가마를 준비하라.”
익제가 하인을 향해 명령했다.
그때, 채선이 그에게 한발 다가서며 익제의 옷자락을 살포시 붙들었다. 그의 시선이 내려왔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과 제 옷깃을 번갈아 보다가 다시 채선을 응시했다.
“걷겠소?”
끄덕끄덕.
“그래, 그것도 좋지. 갑시다.”
익제가 부인의 손을 그러잡았다. 그녀의 어깨가 또다시 파드득 떨렸다. 얼굴에 불이 붙었다. 부인이 잡힌 손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익제는 대수롭지 않게 그 손에 깍지를 꼈다.
“…….”
부인의 목덜미가 새빨개졌다. 픽, 가벼운 웃음을 흘린 익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영과 송하가 얌전히 그 뒤를 따랐다. 힐끔, 두 사람을 쳐다보던 풍오는 다시 코를 박고 건초를 먹어 치웠다.
모든 것이 평온했다.
마치 폭풍 전야의 맑은 하늘처럼.
***
따지고 보면, 채선이 향덕원에 머문 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의 인생으로 치자면, 찰나에 지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돌아온 순간, 채선은 저도 모르게 마음 깊이 안도했다. 마치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공기가 그녀를 에워쌌다. 국태부인이 있었던 풍주도 좋았지만 향덕원만큼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아무리 풍경 좋고 아름다운 곳에 간다 한들, 집만 한 곳이 없소. 아니 그렇소?”
그녀의 속내를 읽은 것처럼 익제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어째서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은 말을 알아차리는 것일까, 멀거니 서 있던 채선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보는 익제의 눈매가 그도 모르는 사이 한결 상냥한 빛을 띠었다.
“요 며칠, 날이 제법 더워 긴 여정에 심신이 지쳤을 것이오. 나는 밀린 업무를 보고 올 터이니 편히 쉬고 계시오.”
끄덕끄덕.
채선은 바닥을 바라보며 동그란 고개만 열심히 주억거렸다. 익제가 얼른 들어가라는 듯 그녀를 다정하게 응시했다.
하지만 채선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가고 저리 서 계시나, 라는 속내가 그녀의 얼굴 위에 드러났다.
가벼운 웃음을 흘린 익제가 먼저 등을 돌렸다. 두어 걸음 걷던 그가 문득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채선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고작 그게 무어라고.
봄 처녀처럼 가슴이 울렁거리는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고, 그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다음 순간, 그가 채선에게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잊은 것이라고 있으신가?,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익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
그가 채선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린 새의 깃털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일순, 채선이 숨을 멈추었고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연산댁과 송하, 도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익제는 입술에 와 닿는 동그란 이마의 감촉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스한 열기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희미하던 온기가 이윽고 들끓듯이 달아올랐다. 그는 눈을 감고서도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것 같았다.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갈무리한 익제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입술을 뗐다.
“늦지 않게 올 터이니 저녁은 함께합시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포 자락을 펄럭이며 채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구도 믿지 않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사내는 또다시 누군가를 믿고 싶어졌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부인은 자신을 속일 만큼 영악하지 못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수룩함에 도박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
채선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망연한 시선으로 그가 사라진 곳만 바라보았다.
“부인? 부인, 정신 차리셔요.”
한참 만에야 충격에서 깨어난 송하가 채선의 어깨를 흔들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하얗게 굳어 있던 채선의 뺨에 서서히 생기가 돌아왔다. 아니, 그것은 생기라기엔 지나치게 붉었다. 그녀의 얼굴과 목덜미가 타는 듯이 뜨거웠다.
“아이고, 아주머니. 이 일을 어찌합니까? 부인께서 선 채로 기절을 하셨습니다!”
송하의 외침을 뒤로하고 채선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입술이 닿은 이마가 간지러웠다. 마치 누군가 강아지풀로 간질이듯 온몸이 배배 꼬였다.
채선은 그 느낌이 바람결에 날아갈까, 황급히 두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감쌌다.
크크큭.
등 뒤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도영일 것이다. 채선은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도망이라도 치듯 황급히 꽁무니를 뺐다. 깜짝 놀란 송하가 그녀의 뒤를 따라오며 소리쳤다.
“부인, 어디를……! 아니, 오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으시고 또 후원으로 가십니까.”
못 말리겠다는 듯한 한숨이 채선의 발밑을 그림자처럼 졸졸 쫓아왔다.
***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올수록 채선은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못했다.
송하가 그 이유를 짐작한 듯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렸지만, 그런 송하에게 눈을 흘길 정신도 없었다.
“은원군께서 식사를 청하십니다.”
연산댁이 푸근한 음성으로 고했다. 흠칫, 어깨를 떨던 채선이 황급히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어여쁘십니다. 주인님의 혼을 쏙 빼놓으실 만큼 아름다우셔요.”
송하가 입에 기름칠을 했는지 듣기 좋은 아첨을 술술 늘어놓았다. 채선이 그런 송하를 향해 조용히 눈을 흘겼다.
방을 나서자, 문밖의 도영이 곧장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다. 집 안에 있는 채선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야 하겠느냐만, 그는 익제의 명을 칼같이 지켰다.
“들어가십시오.”
연산댁이 방문을 열어주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채선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익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린 창 너머로 시선을 주고 있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습관처럼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