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0)화 (30/131)

16643785935277.jpg

30

진짜? 거짓말 아니고?

“…….”

천천히,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인기척을 느낀 부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닦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펴고 앉았다. 

울컥, 짜증이 났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친에게는 보여주는 얼굴을 제게는 보여주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속내를 감추는 그 모습 때문인지, 혹은 그 둘 다인지.

“그래. 잔소리 많은 의원이 나를 쫓아오기 전에 이만 방으로 가야겠구나.”

채선의 손을 꼭 한 번 쥐었다 놓은 국태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익제가 문밖을 향해 “어머님을 모셔라.”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채선이 그녀의 팔을 부축하려고 했지만 국태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부인이 오죽 걱정되면 은원군이 의원 핑계까지 대며 난입하였겠는가. 먼 여정이 고되었을 터인데 이만 쉬시게.”

“!”

“그런 것이 아닙니다.”

채선이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고, 익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국태부인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고 있던 하녀가 그녀의 한쪽 팔을 붙들었다.

문이 닫혔다.

“…….”

“…….”

방 안에는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어색하고 쑥스러운 적막이다. 

채선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알만 대록대록 굴리는데 눈살을 찌푸린 익제가 곁으로 다가왔다. 의자에 앉은 그가 멀뚱멀뚱 서 있는 채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머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었소?”

“…….”

“무슨 말씀을 하셨는데 그리 섧게 울었나, 이 말이오.”

“!”

그 말에 채선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두 손을 저었다.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생각했는지 숫제 고개까지 도리도리 흔들었다. 

익제의 눈매가 삐뚜름해졌다. 심기가 뒤틀렸다. 배알이 꼴렸다.

“내게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이오?”

절레절레.

부인의 고갯짓이 더 빨라졌다. 저러다 다른 의미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익제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옷자락을 툭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쉬시오.”

그가 싸늘한 기색으로 퇴장하고 나서야 채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많은 감정이 격랑처럼 몰아쳤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짙은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그러고 나자, 참을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

방으로 돌아온 익제는 침상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몸은 피곤한데, 머릿속은 점점 또렷해졌다.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하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익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도영.”

“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 도영이 즉각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익제가 그를 향해 말했다.

“너는 앞으로 부인의 곁을 지켜라.”

그 말이 의외였는지 도영이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익제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예.”하고 응답했다. 

삐뚜름한 눈매는 반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원진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관군의 눈을 피해 효명을 압송하느라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허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태부의 양녀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느냐.”

“예. 사람을 파견하였으니 도성으로 돌아가면 소식이 당도해 있을 것입니다.”

“그래.”

모든 일이 그의 뜻대로 풀리고 있었다. 짜증이 날 이유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익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던 그가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 세웠다. 도성에서부터 따라온 향덕원의 하인이었다.

“부인은 어디 계시느냐.”

하인이 그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곧장 입을 열었다.

***

쏴아아.

파도가 쳤다.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파도가 아니었다. 거대한 물살이 한꺼번에 쓸려갔다 다시 밀려오는 거센 파도였다. 

채선은 제 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어쩌면 경이로움, 어쩌면 감동, 어쩌면 위압감.

“바다는 처음 보는 것이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가 파드득, 어깨를 떨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있던 송하는 어느새 저만치 물러나 있었고, 대신 익제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채선이 깜짝 놀란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인은 어찌하여 나만 보면 그리 놀란 토끼 눈을 하시오? 내가 부인을 잡아먹기라도 할 것 같소?”

익제가 짐짓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한층 더 놀란 표정을 지은 채선이 얼른 두 손을 저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눈치 빠르게 곁으로 다가온 송하가 그녀에게 얇은 백돌 판과 숯을 쥐여주고는 다시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다. 너 나 안 잡아먹는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석판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 글 선생부터 붙여야 하나, 심란한 눈으로 부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그가 짐짓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바다는 처음 보는 것이오?”

그의 물음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던 채선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휙휙, 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세차게 흔들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위태로운 머리를 잡아주려던 익제가 내심 혀를 차며 손을 거두었다. 당최 제가 뭘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나 섬 사람이다. 너도 알지?」

“…….”

그러니까 이게 나를 엿 먹이려는 게 아니란 말이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 나도 모르게 그리 물었소. 그래, 부인은 섬 출신이었소.”

끄덕끄덕.

또다시 채선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바닷바람이 춥지는 않소?”

절레절레.

“섬 출신이니 바다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겠구려. 고래를 직접 본 적이 있소?”

갸웃.

“고래가 무엇인지 모르오?”

익제의 물음에 채선의 뺨이 붉어졌다.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운 듯 그녀가 가만히 시선을 떨구었다. 

고개를 들어 끝없이 넓게 펼쳐진 바다에 시선을 던진 익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바다 한가운데에는 집채만 한 물고기가 살고 있다오.”

「거짓말.」

“호오, 거짓말이라? 무엇이 거짓말이란 말이오?”

「집만 한 물고기 없다. 너무 커서 헤엄 못 친다. 나 속이지 마라.」

채선이 그녀답지 않게 불신 가득한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픽,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린 익제가 “정말이오.” 하고 덧붙였다. 조금 전까지 사납게 엉켜 있던 심기가 어느새 노글노글 풀어졌다.

그가 짐짓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나도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고래를 봤다는 어부가 한둘이 아니오. 큰 놈은 덩치가 집채보다 크다고 하였소.”

갸웃.

채선이 또다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데 익제가 저리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심각한 얼굴로 바다를 바라보던 채선이 숯을 끄적거렸다.

「진짜?」

“진짜.”

「거짓말 아니고?」

“거짓말 아니고.”

우와.

마침내 채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집채만 한 물고기라니, 그렇게 무거운 물고기가 어떻게 가라앉지도 않고 헤엄을 치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굉장했다. 

커다란 고등어 같을까, 아니면 복어 같을까. 그것도 아니면 갈치처럼 생겼을까? 

어쨌든 그 굉장한 물고기가 입을 벌릴 때마다 바닷물이 쑥쑥 줄어들 것 같았다. 고래가 헤엄을 치면 물고기들은 몸을 숨기고, 그가 지나갈 때까지 숨을 죽일 것이다. 그러고 나면 고래는 그곳의 주인인 양 느릿하게 물살을 가로지르겠지.

바다의 제왕.

“언젠가 부인과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소.”

끄덕끄덕.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래를 떠올리던 채선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정말로 언젠가 고래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

그와 동시에 익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새카만 시선으로 부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더없이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늘 보던 불안하고 걱정 많은 표정이 아니라, 무언가를 감춘 듯 애달픈 미소가 아니라, 봄꽃처럼 피어나는 화사한 소태였다. 

밑바닥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의심이 자꾸만 흔들렸다. 그녀는 태부가 제게 보낸 끄나풀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녀를 믿어서는 안 된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할 바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

익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그녀를 믿고 싶어 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잔뜩 들뜬 부인이 바닷가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그녀의 발밑에서 모래가 부서졌다. 

쏴아아.

물살이 그녀의 발치로 밀려왔다. 깜짝 놀란 그녀가 서둘러 뒤로 물러섰지만, 파도는 그보다 빠르게 다가왔다. 부인의 눈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금세 시무룩하게 처졌다.

그 순간.

“!”

익제가 두 손으로 덥석, 그녀를 안아 올렸다. 가벼운 몸이 그의 품에 폭삭 안겼다. 폭넓은 치마가 바람에 나부꼈다. 차가운 파도가 그의 바짓단을 적셨고 가죽신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좌르륵, 거센 물살에 모래가 쓸려나갔다.

익제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굳어 버린 부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있던 그녀가 다음 순간,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는 부인의 얼굴에 당황과 난처함, 곤혹스러움 같은 감정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익제의 눈매가 누그러졌다. 그의 잇새로 다정한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언젠가는 우리 둘이 꼭 고래를 보러 갑시다.”

그렇게 속삭인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석양이 바다를 끄트머리부터 물들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물결이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부인이 기어코 체념을 했는지 그의 가슴에 가만히 뺨을 묻어왔다. 그의 눈매가 흔흔한 빛을 띠었다. 

***

낯선 곳에서의 생활은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채선은 시간이 날 때마다 국태부인의 방문을 두드렸고, 국태부인은 때론 침상에서, 때론 의자에서, 또 때론 앞뜰에서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채선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고, 국태부인도 그리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은 대부분이 침묵이었다. 시끌벅적한 수다도, 커다란 웃음도 없었다. 

그러나 채선은 그 모든 시간이 편안했다. 

「이만 쉬어라. 나 간다.」

채선의 인사에 짙은 웃음이 돌아왔다. 웬만해서는 큰소리를 내지 않는 국태부인이 유일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이 바로 채선의 글을 볼 때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짧은 배움을 비웃는 것 같아 시무룩하던 채선도 어느 순간부터는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녀의 웃음에는 한 점의 조롱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움보다는 국태부인의 환한 미소가 더 좋기도 했다.

그래서 채선은 그녀가 기운이 없다 싶을 때면 괜히 수다스러운 척 석판을 열심히 닦아가며 짧은 글들을 쏟아내곤 했다.

“편히 쉬시게.”

국태부인의 인사에 고개를 숙인 채선이 방을 나섰다. 문 앞에는 빙글거리며 눈웃음을 짓는 사내가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