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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9)화 (2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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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그대는 누구요.

하녀들은 계곡 근처에 짐을 풀었고, 호위무사들과 하인들은 사라진 부인을 찾아 헤맸다.

“부인! 군대부인!”

하인들이 소리쳐 그녀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녀 하나가 옷고름에 눈물을 찍으며 우는소리를 했다.

“아이고, 이게 뭔 일이래. 우리 군대부인께서……. 하늘도 무심하시지. 혼인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부인께서 죽기라도 했니?”

송하가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흐느끼던 하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 

소매를 돌돌 걷어붙인 송하가 한층 더 사납게 소리쳤다. 

“한 번만 더 재수 없게 우는소리를 해 봐,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신경질적인 그녀의 반응에 방금까지 눈물 바람을 하던 하녀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익제는 소란스러운 무리를 떠나 계곡을 따라 아래로 이동했다. 도영과 몇 명의 호위무사들이 지척에서 그를 수행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익제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느새 무리에서 제법 떨어진 곳까지 내려와 있었다.

“말도 타지 않은 여인이 이 이상 도망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

도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어코 익제가 말에서 내렸다. 그는 채선이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작은 나뭇등걸과 덤불까지 쑤시며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군대부인, 어디 계십니까!”

호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점처럼 찍힌 의혹이 점점 더 세를 불렸다. 

도망치다 사고라도 당할 것일까, 혹은 도주하던 중에 다른 산적을 만난 것일까. 그게 아니면 저를 배신하고 이미 안전한 곳으로 탈주한 것일까.

그런데 그때.

“…….”

무심코 지나가던 익제의 시선이 휙 하고 돌아갔다.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넝쿨이 우거진 비탈길이었다. 무엇이 그의 시선을 잡아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때, 풍오가 터벅터벅 그리로 걸어갔다. 풍오는 질긴 덩굴을 입안에서 넣고 우물거렸다.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풍오의 갑작스런 식사에 호위무사들도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저 지랄…… 성격 나쁜 흑마가 또,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찬 그들이 나무 위와 아래를 꼼꼼히 살폈다.

“풍오. 이리…….”

익제가 자신의 애마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

장막처럼 드리운 덩굴 너머로 미세한 틈이 보였다. 대부분은 바위에 가로막혀 있었으나, 오른쪽 가장자리는 검은 동공인 듯싶었다. 풍오가 덩굴을 뜯어 먹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완벽하게 위장된 구멍이었다.

익제가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덩굴을 잘랐다.

시야를 가리던 넝쿨이 모두 사라지고 마침내 작은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

문득,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쩌면 숨도 멈추었던 것 같다.

그 안에 작게 웅크린, 연약한 짐승보다 가냘픈 이가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고 두 팔에 얼굴을 묻은 여인이 쏟아지는 햇살에 움찔, 몸을 떨었다. 

다음 순간.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지와 땀, 혹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조금씩 위를 향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일지 모르는 그녀가 머뭇머뭇, 한없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부인.”

익제가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파드득,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가까스로 고개를 든 그녀와 익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익제는 잘게 파동 하는 부인의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그 안에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이 무엇인지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이.

두려움, 불안함, 고단함, 그리고…… 안도.

저를 본 부인이 안도했다. 

왜?

익제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다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가 잔뜩 웅크리고 있는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

채선은 제 앞에 드리워진 크고 단단한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째서.

끝내 저를 찾지 않길 바랐던 그가 눈앞에 있는데 저도 모르게 안도하고 만 것일까.

그녀의 두 눈이 아래로 축 처졌다. 그에게 들킨 이상 도망갈 방도는 없었다. 자신을 부르는 하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모른 척했지만, 남자는 끝내 그녀를 찾아냈다.

채선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대로 남자의 손을 잡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또 다른 기회를 노리며 그에게서 도망칠 궁리를 할 터였다. 그 현실이 몹시 서글펐다. 

“많이 무서웠소?”

익제가 다정하게 물었다. 그녀가 쉬이 손을 잡지 않자 애가 닳았다. 그는 부인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 순간.

“!”

부인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끈이 떨어진 인형처럼, 어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순,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등 뒤에 있던 도영이 그를 지나쳐 부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안으려는 듯 팔을 뻗는 도영을 보며 익제가 다급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되었다.”

스스로 듣기에도 조급한 목소리였다. 흠칫, 도영이 내민 손을 거두었다. 

익제는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곧장 부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오른손이 부인의 등을 받치고 왼손이 그녀의 허벅지를 감쌌다.

명민한 흑마가 곁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었다. 익제는 그녀를 말 등 위에 태운 뒤 그 역시 풍오의 등에 올라탔다. 거구의 흑마는 두 사람을 태우고도 거뜬히 일어섰다. 

정신을 잃은 부인의 등을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한 익제가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풍오는 고르게 난 길을 골라 천천히 걸었다. 마치 그녀가 떨어질까 두렵다는 듯.

그가 한 손으로 고삐를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힘없이 스러지는 부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문득, 그녀가 산적에게 끌려가던 순간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

그리고 저를 본 순간 스치던 깊은 안도.

그 모든 것이 연기라면 그녀는 팔도 제일가는 광대였다. 

“그대는 누구요.”

익제의 떨떠름한 혼잣말이 물소리에 묻혀 아래로 흘러갔다.

***

채선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눈앞의 여인을 쳐다보았다. 한때 제국의 안주인이었던 그녀는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롭고 처연해 보였다. 깡마르고 창백한 얼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만에 보는 아들과 처음 만나는 며느리를 버선발로 맞아주었다. 

“다들 자리를 비켜주게.”

익제의 모친인 국태부인이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하인들이 허리를 숙이며 즉시 방에서 물러났다. 그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제야, 너도 잠시 물러나 있거라.”

그 말에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익제가 멈칫, 그 자세 그대로 눈동자만 들었다. 그녀의 축객령에 제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익제는 이내 찻잔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옆방에 있을 터이니 말씀이 끝나시면 불러주십시오.”

그의 말에 국태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돌리던 익제의 시선이 부인의 정수리에 머물렀다. 

그녀는 뭐가 그리 두려운지 내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득,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로 자리에 앉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부인을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잔뜩 겁에 질린 그녀를.

“…….”

익제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모친에게 시선을 주었다. 줄곧 그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침묵으로 그를 재촉했다.

“오래 앉아 계시면 힘드실까 염려가 됩니다.”

그러니 긴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국태부인은 아무 대답 없이 옅은 미소로 그를 배웅했다. 

결국 한숨을 내쉰 익제가 다시 한번 자신의 부인을 돌아본 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탁.

방문이 닫혔다.

“말을 하지 못한다고?”

흠칫.

채선이 어깨를 떨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 그녀는 차마 국태부인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세상 어느 어미가 말 못 하는 며느리를 기꺼워할 것인가. 금쪽같은 아들의 반려가 말을 못 한다면, 저라도 속이 문드러질 터였다.

다가올 꾸지람을 기다리는 채선이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자신의 도주가 성공했다면 국태부인의 실망스러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그녀의 발치를 짙게 물들였다.

그때.

“!”

국태부인이 가만히 팔을 뻗더니 채선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다래졌다. 

국태부인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아.

채선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그것은 그녀가 상상한 싸늘한 시선이 아니었다. 실망과 질책이 섞인 시선도 아니었다. 

국태부인은 채선의 손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오랜 지병으로 앙상하게 마른 손은, 그러나 숨결보다 따뜻했다. 

별안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게 무어 그리 큰 흠이겠는가. 단단하고 따스하게, 내 아들의 옆을 지켜주게나. 그리하면 이 늙은이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네.”

조용한 국태부인의 목소리가 너울졌다. 채선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날 때부터 모진 고초를 겪은 아이라네. 내 젖 한번 물리지 못하고,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도성에서 자란 외로운 아이지.”

“…….”

채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멀거니, 그녀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서서히 차오르던 눈물이 봉긋하게 솟았다. 

이윽고 꽃망울이 터지듯 팍, 하고 눈물이 터졌다. 뜨거운 물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국태부인이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말 못 할 일이 많았던 게지. 가엾게도.”

토닥토닥.

그녀가 채선의 손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그것이 마치 그녀의 심장을 다독이는 것 같았다. 

채선의 잇새에서 끄윽, 끅, 하는 울음이 새어 나왔다.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그럴수록 흐느낌은 더욱 거세졌다.

국태부인이 한결 다정하고 친근하게 속삭였다. 

“다 괜찮아질 거다. 아무 걱정 말아라. 이제 우리 집의 사람이 되었으니 내가 너를 지켜주마.”

“흐으으…….”

짧은 시간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흘러가는 상황에 몸을 맡기고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것은 채선이 감내하기에 너무 크고 고단한 일들이었다. 

어미가 죽고, 얼굴도 모르는 태부의 양녀가 되어 제 마음을 구원해 준 사내를 파멸시키기 위한 장기 말이 되었다.

그간의 일들이 새삼 서럽고 서글펐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채선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외로웠다.

미처 참을 새도 없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국태부인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어머니, 양 의원이 말하기를 이만…….”

초조한 듯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익제가 말을 멈추었다. 문 앞에 선 그는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채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녀의 작은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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