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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8)화 (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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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부인을 찾으러 간다.

    산적이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협박을 했다. 채선은 넘어진 자세 그대로 산적을 올려다보았다. 겁먹은 그녀의 얼굴에 산적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얌전히만 있으면 살려는 줄 테니까, 응?”

    끄덕.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에 짓눌린 그녀의 모습에 산적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발씩 다가왔다. 그가 도끼를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그 모습에 채선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흐흐흐.”

    산적이 또 한 발, 가까이 다가왔다. 채선은 그를 노려보며 가만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빛이 바뀐 걸 본 산적이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난 이상하게 그런 사나운 눈이 좋더란 말이지. 너무 고분고분하면 흥이 안 난단 말이야. 좋아, 아주 좋아.”

    그가 채선의 한 팔을 잡더니 휙 하고 잡아당겼다. 우악스러운 손에 붙들린 그녀의 몸이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윽.” 

    짧은 신음을 삼킨 채선이 종잇장처럼 나부꼈다. 그 순간.

    채선이 산적의 눈에 흙을 뿌렸다. 방금 전, 바닥에 넘어졌을 때 조용히 움켜쥐었던 흙이다. 

    “으악! ……이게 좋은 말로 하니까!”

    산적이 눈을 가리며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채선은 황급히 그의 손을 뿌리쳤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는 산적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서 그의 사타구니를 냅다 걷어찼다.

    “아악!”

    산적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상체를 웅크렸다. 채선은 잽싸게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웠다. 그녀의 주먹만 한 돌이었다. 그러고는 두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그의 관자놀이를 향해 돌을 휘둘렀다.

    “으아악!”

    거구의 사내가 털썩,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아, 하아.”

    채선이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세 번의 공격이 모두 먹혔다. 쿵쾅쿵쾅, 심장이 아주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하아.” 

    고르지 못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채선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녀의 공격이 통한 것은 뛰어난 실력 덕분이 아니었다. 오로지 산적이 방심한 탓이었다. 

    그는 겁에 질린 채선이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설령 반항하더라도 한 손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채선은 그의 빈틈을 파고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산적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산적은 성난 기세로 그녀의 뒤를 쫓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출발했을 수도 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가야 했다. 

    “허억, 헉.”

    긴장과 두려움으로 평소보다 맥박이 빨랐다. 긴 치마가 거추장스러웠다. 채선은 치마를 걷어 한 손으로 움켜쥔 채 험한 산길을 쉬지 않고 내달렸다.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흠칫, 몸이 떨렸다. 바람이 잎사귀를 흔드는 소리에도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우악스러운 손이 당장이라도 자신의 뒷덜미를 움켜쥘 것 같았다.

    “어?”

    그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채선은 본능적으로 물소리를 따라 달렸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길을 잃었을 때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기만 해도 산기슭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게다가 냇가 주변에는 돌이 깔려 있었다. 그녀의 발자국을 지워 줄 것이다.

    “으아앗!”

    서두르던 채선이 젖은 낙엽을 밟고 죽 미끄러졌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채선은 산적이 제 목소리를 들을까 봐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아으, 아파라.”

    이 와중에도 넘어진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불운의 끝이 어디인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넘어지면서 다쳤는지 팔꿈치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채선은 이를 꽉 깨물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다시 달리려는 그때.

    “어? 저게 뭐지?”

    그녀의 눈에 동굴 하나가 들어왔다. 길게 늘어진 덩굴에 입구가 가려 있었지만, 제집 안방처럼 산을 누비던 그녀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그것은 동굴이 분명했다. 

    채선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꿀꺽, 그녀가 긴장한 기색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늑대나 멧돼지의 거처가 아니길 바라며 신중하게 덩굴을 걷었다.

    “아.”

    텅 빈 동굴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그녀 하나쯤은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그녀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누런 털 몇 가닥이 들어왔다. 다시금 긴장한 기색으로 털을 살피던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하아. 다행이다.”

    손안의 털은 푸석푸석하고 건조했다. 방금 빠진 것이 아니라, 오래된 털이라는 의미였다. 아마도 이곳에 터를 잡고 살던 짐승이 몸집이 커지자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모양이었다. 

    “맹수가 살던 곳이라면 다른 동물들이 가까이 오지 않을 테니 몸을 숨기기엔 완벽하네.” 

    채선은 동굴 안에 몸을 숨기고, 늘어진 덩굴을 긁어모아 입구를 가렸다. 듬성듬성 비쳐들던 햇빛이 사라지고, 그곳은 옅은 어둠에 잠겼다. 

    “괜찮아.”

    채선이 무릎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다 잘 될 거야.”

    그제야 후폭풍이 한꺼번에 몰아쳤다. 덜덜거리며 몸이 떨렸다. 산적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사실이, 그에게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만약 산적이 저를 발견한다면.

    “흡.”

    채선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웠다. 성난 산적에게 들켜 질질 끌려갈지도 모르는 현실이, 아무도 모르는 낯선 땅에서 홀로 살아가야 하는 미래가.

    “괜찮아.”

    그녀는 습관처럼 그 말을 중얼거렸다.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그 말을 읊조리다 보면 정말로 괜찮아질 거라는 듯이.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까? 하루? 이틀? 아니면 사흘?

    그리 오랜 기간은 아닐 것이다. 산적은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 그녀를 되찾기 위해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을 테고, 익제 역시 금세 저를 포기할 터였다. 

    그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태부의 조카인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애정 없는 부인을 위해 번거로운 수색 작업을 지시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여기서 버티자.”

    채선이 입술을 깨물며 나직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묵직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고단했다. 

    오늘 하루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제는 풍오의 고삐를 당기며 서서히 속도를 늦췄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사내의 걸쭉한 욕설이 들렸다.

    “빌어먹을.”

    소리 나지 않게 검을 빼든 익제가 그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무성한 수풀과 나뭇잎 너머, 그곳에서 보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 부인과 사내의 다정한 모습일까? 아니면…….

    익제의 낯빛이 순식간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 만약 그곳에서 보게 되는 것이 사내와 다정하게 웃고 있는 부인의 모습이라면, 제 손으로 그녀의 심장을 꿰뚫으리라 생각했다. 

    뒷감당은 어렵지 않았다. 마침 산적의 공격을 받았으니, 그는 극악무도한 도적 떼에게 부인을 잃은 비통한 남편을 연기하면 되었다. 

    배신자는 살려두지 않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 세 번, 언제든 다시 배신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 너머에 있는 것을 가늠하듯 익제의 눈동자가 차갑게 굳었다.

    싹둑.

    그가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칼로 쳐냈다. 마침내 시야가 환하게 트이고, 눈앞에 덩치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씩씩거리던 그가 인기척에 뒤를 돌다 익제를 발견하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 부인을 낚아챘던 자가 분명했다.

    익제의 눈동자가 천천히 좌우를 훑었다.

    “…….”

    부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나.”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멈칫하던 산적은 그가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에는 호리호리한 익제가 백면서생처럼 보였던 탓이다. 

    “겁이 없으시군.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서 쫄래쫄래 걸어오시나?”

    산적이 그를 향해 완전히 몸을 틀었다. 익제는 그의 말이 듣지 못한 것처럼 억양 없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어디 있나.”

    “빌어먹을.”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사내가 불쾌한 표정으로 낯을 구겼다. 그의 잇새로 험악한 말들이 쏟아졌다.

    “그년 말인가? 재미 좀 보려고 했더니 감히 내 거시기를 차고 달아나지 뭐야. 안 그래도 잡히면 가만 안 둘 생각이거든. 곱게 대해주려고 했더니 감히 내 뒤통수를 치고 도망을 가? 카악, 퉤.”

    달아났다.

    익제는 산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분노와 짜증, 그 사이 어디쯤에 있었다. 

    다시 한번 익제의 입술이 달싹였고, 그 사이로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놈 배후에는 누가 있나?”

    하, 산적이 걸쭉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거 알 게 뭔가. 돈만 주면 장땡이지.”

    “그래.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도끼를 들고 다가왔다. 우락부락한 근육이 천 너머에서 꿈틀거렸다. 

    “으아아아아!”

    그가 익제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익제가 그의 목을 겨누며 검을 고쳐 쥐었다. 다음 순간.

    푹.

    “?”

    산적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그가 자신의 목에 꽂힌 화살을 바라보았다. 

    “으아아아악!”

    그제야 고통이 느껴진 듯 산적이 울음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그르렁그르렁,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익제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도영이 활을 든 손을 내려놓으며 참았던 숨을 조금씩 흘려보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인을 찾으러 간다.”

    “예.”

    익제가 검을 허리에 꽂고 풍오의 등에 올라탔다. 도영은 어찌 된 영문인지 묻지도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털썩, 뒤늦게 거구의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홉뜬 눈의 산적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

    “이쪽입니다.”

    말에서 내려 땅을 보고 걷던 도영이 앞장을 섰다. 그는 흙에 난 발자국을 보며 부인이 간 길을 더듬고 있었다. 도영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세심하게 바닥을 살폈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도영이 어느 순간 난감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익제의 시선이 기운차게 흐르는 계곡물에 꽂혔다.

    “여기서부터 발자국이 끊겼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눈동자를 돌려 바닥에 널린 돌들을 바라보았다. 

    곧장 계곡으로 이어진 발자국, 순식간에 사라진 흔적. 

    이 모든 게 우연일까. 

    익제의 낯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의심은 마치 먹물과도 같았다. 투명한 물그릇에 한 점의 먹물이 떨어지는 순간, 그 물은 더 이상 예전의 색을 회복하지 못한다. 

    어쩌면 정해진 답에 그녀를 끼워 맞추고 있는 건 아닌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의문이 익제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수색할 인원들을 데려오겠습니다.”

    도영의 말에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잇새로 무심한 명령이 흘러나왔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샅샅이 뒤져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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