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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7)화 (2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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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나를 속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익제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의 앞에는 서른 명 남짓 되는 산적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맨 앞에 선 덩치 큰 사내가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가진 걸 다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으하하하!”

갑작스러운 고함에 몸단장을 하던 새들이 깜짝 놀라 창공 위로 날아올랐다. 

“어림도 없는 소리.”

호위무사들이 즉시 검을 뺐다. 으하하하, 또 한 번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사내가 수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얘들아, 이분들이 저승 구경을 하고 싶으신 모양이다. 까짓것, 그게 소원이라는데 못 들어줄 이유가 무엇이랴! 노잣돈은 필요 없으시다니 저승 문 앞까지 잘 배웅해 드려라!”

“예!”

다음 순간, 호위무사들과 산적들이 동시에 뛰쳐나갔다. 챙챙, 여기저기서 날붙이가 부딪히며 선득한 파열음을 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익제가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산적이라……. 누굴 등신으로 아나.”

그들은 궁핍한 삶을 뒤로하고 산에 들어온 화적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에는 정해진 규칙과 절도가 있었다. 전문적으로 검술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허름한 옷을 입고 산적 행세를 하는가? 

그 이유야 뻔했다. 

자신의 목숨.

“도영.” 

익제의 부름에 도영이 곧장 곁으로 말을 몰아왔다. 호위무사들과 산적들의 싸움은 혼전의 양상을 띠었지만 두 사람 모두 평온한 얼굴이었다. 

둘 중 누구도 호위무사들이 패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일당백의 전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곧장 후방으로 이동하라. 혼란에 빠진 행렬을 단속하고 부인을 보호하라.”

“예.”

도영이 말 머리를 돌리는 것을 보며 익제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가 앞으로 치고 나가며 우두머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육중한 체구의 사내는 제법 민첩하게 익제의 검을 피했다.

“클클클.” 

목구멍으로 웃음을 삼킨 그가 익제를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풍오가 잽싸게 방향을 바꾸었고 익제의 검이 그의 허리를 갈랐다. 철퇴에 달린 쇠사슬이 철그렁거리며 그의 검을 막았다.

휘익.

슥.

검과 철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사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멋대로 자란 수염이 움찔거렸다.

사내와 익제의 실력이 엇비슷하다면 승부를 가르는 것은 그들을 태운 말의 역량이다. 풍오는 익제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았다. 그가 미처 고삐를 당기기 전에 그의 애마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소한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풍오가 바람처럼 내달렸다. 똑바로 달려들던 흑마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측면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익제의 검이 그의 허벅지를 그었다.

“끄윽.”

신음을 삼킨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부우웅, 힘껏 휘두른 철퇴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날아왔다. 익제가 상체를 납작 엎드렸고, 풍오가 여유롭게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흑마가 또 한 번 사내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미처 철퇴를 거두지 못한 그가 두 눈을 부릅떴다.

푹.

그는 부릅뜬 눈으로 익제의 검이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 걸 지켜보았다. 흰자위에 실핏줄이 터졌고 떨리는 입술이 벌어졌다.

“커헉!”

벌어진 잇새로 신음과 함께 붉은 피가 비어져 나왔다. 거구의 사내가 그대로 쓰러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말 아래로 털썩 떨어졌다.

쿵.

검에 묻은 피를 아무렇지 않게 허벅지에 문질러 닦은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장을 잃은 산적들은 방금까지의 기세를 잃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기세를 잡은 호위무사들이 그들을 추풍낙엽처럼 베어 넘겼다. 

익제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들의 배후에 누가 있든, 자신을 너무 만만하게 봤던 모양이다. 그가 호위무사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나는 후방으로 간다.”

“예!”

익제가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흥분한 풍오가 싸움판에 끼어들려 씩씩,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가자.”

다시 한번 고삐를 당긴 익제가 나직하게 명령했고, 그제야 풍오는 간신히 걸음을 돌렸다. 흑마의 등에서 뜨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꺄아아아악!”

송하의 새된 비명이 찢어질 듯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스무 명가량의 산적들이 하인들의 행렬을 휘젓고 다니는 게 보였다. 도영과 호위무사들이 그들과 맞서고 있었다.

챙챙,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귀에 거슬리는 파공음을 냈다.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익제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의 움직임이 선봉을 공격한 산적과 달리 투박하게 느껴졌던 탓이다. 

무기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이는 도끼를, 어떤 이는 도리깨를, 어떤 이는 창을 휘둘렀다.

“도합 오십이라.”

산적들의 수를 대충 가늠하던 익제가 혼잣말을 읊조렸다. 호위무사들과 엇비슷한 숫자였다.

오십이나 되는 무사들이 한 번에 이동하려면 너무 눈에 띄었다. 어쩌면 그중 반은 진짜 산적인지도 몰랐다.

“가자!”

익제가 이윽고 풍오의 허리를 걷어찼다.

“!”

그런데 그때, 반대편에서 누군가 빠르게 말을 몰고 달려왔다. 살이 뒤룩뒤룩 쪘으나 움직임이 민첩한 사내였다. 

곧장 무리의 한가운데에 있는 부인을 향해 달려가던 그가 순식간에 그녀를 낚아채더니 숲속으로 사라졌다. 

“으아아악, 안 돼요! 군대부인! 이보셔요, 부인께서 납치를 당하셨습니다!”

송하가 두 팔을 뻗으며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연산댁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익제의 망막에 남은 마지막 잔상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린 부인의 모습이었다. 

일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니, 그런 것 같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벌렸지만, 잇새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검을 든 익제의 팔이 움칫거렸다.

“이럇!”

그가 풍오의 허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때마침 후퇴하던 산적들이 익제를 발견하더니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한꺼번에 익제에게 달려들며 무기를 휘둘렀다.

익제는 반사적으로 그들의 공격을 막으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가 목표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부인을 납치한 것인가, 저들이 정말로 산적이란 말인가, 그게 아니면.

“애초부터 한 패였던가.”

그의 잇새로 서슬 퍼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 나를 뭘로 보고.”

챙. 찰캉. 

검과 창이 부딪히며 예리한 금속음을 냈다. 익제는 순식간에 네 명의 산적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이 익제를 강하게 몰아붙였으나 움직임은 하나같이 중구난방이었다. 선발대를 공격한 이들과 다른 무리라는 생각이 점점 더 확신을 가졌다.

“주군.”

도영이 바람처럼 내달리며 검을 휘둘렀다. 후방을 경계하지 못한 산적들이 우후죽순 쓰러졌다. 익제의 검이 마지막 남은 산적의 목을 베었다. 

“억!”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

발아래 깔린 시체를 내려다보던 익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고요한 숲길을 응시했다. 

산적과 부인, 그들이 한패인지 아닌지 자신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이 한패라면. 

“나를 속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다음 순간, 익제가 풍오의 허리를 걷어찼다. 눈치 빠른 흑마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세한!”

도영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네발로 기어가는 산적의 등에 검을 꽂아 넣던 세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깊숙이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았다. 비죽, 입꼬리를 올리는 그의 얼굴이 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도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고, 이어 그 역시 도영을 따라 고개를 주억거렸다. 둘 사이에 암묵적 역할 분배가 이루어졌다. 도영은 익제를 호위하고, 세한은 뒤처리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럇!”

도영이 말허리를 걷어찼다. 그가 순식간에 울창한 나무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

“웁!”

말 등에 대충 걸쳐져 있던 채선은 치밀어 오르는 토기를 억누르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뱃멀미는 멀미도 아니었다. 달리는 말에 거꾸로 매달린 그녀는 뇌수가 마구 뒤섞이고,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끔찍한 느낌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으하하하, 오늘은 내 전리품이 가장 크군!”

산적이 걸쭉한 목소리로 파안대소를 했다. 그는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한동안 울퉁불퉁한 길을 달렸다. 

채선의 몸이 통통 튀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그녀의 입매가 토할 것처럼 움찔거렸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 중 어째서 저였을까, 하는 원망도 생기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어.

채선의 잇새로 체념과도 같은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그 역시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에 묻혀 버리고 말았지만.

“우웁!”

입을 틀어막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던 채선이 다음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

하나의 깨달음이 섬광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탓이다.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어쩌면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사람들은 그녀가 도적에게 납치된 줄 알 테니, 이대로 사라진다 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만 따돌리면 도망칠 기회가 생길 거야.

“좋아! ……우웁.”

의욕에 불타던 채선이 치밀어 오르는 토기에 금세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히이잉!

거침없이 산길을 내달리던 말이 비탈길에 죽 미끄러지며 휘청거렸다. 덩달아 채선의 몸도 크게 흔들렸다.

“윽!”

도적이 황급히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이미 균형을 잃어버린 말은 몸을 곧추세우지 못하고 쿵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아악!”

말에서 떨어진 채선이 저만치 튕겨 나갔다. 바닥에 부딪힌 어깨를 감싸 안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더 이상 말 못 하는 이를 흉내 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일어나, 이놈아!”

도적이 걸걸한 목소리로 쓰러진 말을 다그쳤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바르작거리던 말은, 그러나 넘어지면서 다리를 삐었는지 끙끙 앓는 소리만 낼 뿐 결국 일어나지 못했다. 

허리춤에 매단 도끼를 꺼낸 산적이 성난 기색으로 씩씩거리더니 그대로 말목을 내리찍었다.

“흡!”

일순, 채선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가여운 미물의 잇새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황급히 두 눈을 감았지만, 망막에 아로새겨진 처참한 모습은 지워지지 않았다. 우욱, 또다시 토기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에잇, 퉤.”

화가 난 표정으로 가래침을 뱉은 산적이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가 입술을 실룩일 때마다 빳빳한 수염이 들썩였다.

“할 수 없지. 얌전히 따라와. 아니면, 알지? 험한 꼴 보고 싶으면 어디 한 번 마음대로 굴어 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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