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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6)화 (2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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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나 걷는다.

슬며시 배어 나오는 웃음을 삼킨 채선은 그의 신발과 겉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땀이 날 만큼 힘이 들었다. 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

물끄러미, 침상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던 채선이 한참 뒤에야 그의 옆자리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반대편 침상 끄트머리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을 청했다. 

땀을 흘렸다고 좀 전까지 멀리 달아났던 잠이 순식간에 그녀를 찾아왔다.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채선은 옆자리의 온기를 느끼며 순식간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와 동시에 익제의 눈이 반짝 뜨였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미간에는 이미 깊은 골이 생겨 있었다. 

술이 떡이 된 저를 두고 아무 짓도 하지 않는 부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탓이다. 일부러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도 그녀는 속 편하게 잠만 잤다.

그저 저를 조롱하기 위한 인형일 뿐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밤을 가르는 익제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이채를 발했다.

***

“이제부터 산을 넘을 것입니다. 가마가 크게 흔들리더라도 놀라지 마셔요.”

비단 천을 살짝 걷고 그 사이로 속삭이는 송하의 말에 채선은 황급히 숯과 백돌을 찾았다. 여행길에 쓰고 지우기 쉽도록 하얀 돌을 반지르르하게 깎아 만든 백돌 판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서라.」

글을 읽던 송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가마를 멈추라구요?”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하는 여전히 영문 모를 표정으로 또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기울였다.

“소피가 급하십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요강을…….”

채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나 걷는다.」

“음……. 그러니까 부인께서 걸어가시겠다구요?”

채선이 개떡같이 말해도 송하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아마도 글을 읽고 쓰는 수준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 높다. 나 걷는다. 미안하다.」

“누구한테 미안…… 설마, 가마꾼이요?” 

끄덕끄덕.

“부인께서 미안한 일이 뭐 있습니까? 가마를 나르는 것이야 가마꾼들이 해야 할 일인데요.”

채선이 또다시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 단호한 표정에 송하가 푹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아주머니께 여쭤보고 오겠습니다.”라며 걷었던 비단 천을 내리고는 저편으로 뛰어갔다.

잠시 후, 가마가 멈추었다. 문이 열리고 송하의 부루퉁한 잔소리가 날아들었다.

“정말 보통 고집이 아니셔요. 평소에는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하시면서…….”

채선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잡고 가마에서 내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가마를 메고 걷던 이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연산댁에게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금세 싱글벙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채선은 그들을 배려하기 위해 가마에서 내려선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여정 중 산을 넘는 이 순간이 그녀가 노린 절호의 기회였다. 오랫동안 산중에서 생활한 채선은 누구보다 산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곳에서라면 저를 뒤쫓는 이들을 따돌릴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설사 호위무사라 해도 그녀보다 산을 잘 알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가마 안에 얌전히 앉아만 있어선 안 되었다.

“무슨 일인가. 어찌하여 부인이 걷고 있느냐.”

행렬의 선두에 있던 익제가 가마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왔다. 연산댁이 그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채선은 송하가 들고 있는 백돌에 재빨리 숯을 휘갈겼다.

「지루하다. 나 걷는다.」

“…….”

익제가 그 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짧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몇 번을 보아도 그녀의 반말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나를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거지.

삐뚜름하게 변하려던 눈매가 하인들의 존재를 의식하곤 금세 춘풍을 머금었다. 

풍오가 알은체를 하듯 거만한 눈빛으로 채선에게 콧김을 쏘았다. 채선이 포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풍오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흥흥, 풍오의 콧김이 더 거세졌다. 마치 불쾌하지만 네 은혜를 봐서 아주 잠깐은 참아주겠다는 듯 고고한 태도였다.

익제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럼 같이 걸읍시다. 대신 언제라도 피곤하면 내게 말해 주시오.”

“…….”

채선이 얼른 두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말을 타고 선두를 이끌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익제는 풍오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멈춰 선 행렬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행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채선은 저와 나란히 걷는 익제를 보며 쓴 한숨을 삼켰다. 연산댁과 송하, 가마꾼, 심지어는 호위무사도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소피가 급하다는 핑계로 수풀 깊숙이 들어가 조용히 내뺄 계획이었다. 

그런데 익제는.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

채선은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정확하게 저를 향해 걸어오던, 대수롭지 않게 나는 새를 떨어뜨리던 그를 떠올렸다. 언젠가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게 기억났다. 

왠지 그에게선 도망칠 수 없을 것 같다던 생각.

아니야.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어.

다음 순간, 채선은 불안한 마음을 떨치려는 듯 이를 꽉 깨물고 앞만 쳐다봤다.

채선을 다하자. 

자신의 좌우명을 입속으로 읊조리던 그녀가 품속에 넣어둔 주머니를 더듬었다. 때로는 최선의 노력이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녀의 손끝에 패물이 만져졌다. 채선이 도주 자금을 확인하며 마음을 다잡던 그 순간.

“!”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반쯤 입을 벌렸던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커다란 손이 채선의 허리를 휘감았다. 속절없이 무너지던 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단단한 팔이 그녀를 떠받치고 있었다.

익제였다.

“…….”

채선은 그의 품 안에서 소리 없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이번에야말로 콧잔등쯤은 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가슴을 쓸어내리던 채선이 멈칫했다. 허리에 닿은 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던 탓이다. 너무 가까운 두 사람의 거리가 불편했다. 

그녀는 익제의 품에서 벗어나려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익제는 그녀를 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괜찮으셔요?”

깜짝 놀란 송하가 채선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송하가 그녀의 발밑을 살폈다.

“또 치맛자락을 밟으신 거여요? 걷기 불편하시면 치마를 조금 걷어 드릴까요?”

그 말에 채선이 머쓱한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송하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길어지는 침묵에 먼저 항복한 채선이 가만히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발밑을 가리켰다. 

“이건……?”

거기에는 큰개불알풀이 한 무더기 피어 있었다. 멀뚱멀뚱, 하늘색 꽃잎을 내려다보던 송하가 채선에게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설마 꽃을 밟을까 봐 피하시다가 넘어질 뻔하신 거여요?”

끄덕끄덕.

휴우, 송하가 못 말리겠다는 듯 긴 한숨을 흘렸다. 무언가 잔소리를 하려던 그녀는 익제의 눈치를 살피더니 “앞으로는 잘 보고 다니셔요.”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채선이 겸연쩍은 낯으로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익제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또다시 불쑥, 누군가가 떠올랐다. 

하찮은 꽃을 밟을까 봐 제게 잔소리를 하던 간 큰 여인이다. 제 방에 장식해 두겠다며 등나무꽃을 한 아름 꺾어오던 눈치 없는 여인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보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먼저 생각나는 온화한 여인이다.

그러고 나자, 불쾌한 감정이 뱃속에 똬리를 틀었다. 자꾸만 그녀의 흉내를 내는 제 부인이 못마땅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성 밖에서 나고 자란 부인이 그녀를 알 리 만무한데도 심장은 머리보다 먼저 차가워졌다.

그가 서늘한 낯으로 멈춰 선 사이, 부인은 어느새 송하와 함께 저만치 멀어졌다. 익제는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말없이 빈주먹을 움켜쥐었다. 한 품에 쏙 들어오던 익숙한 감각을 떨치려는 듯 그가 고개를 저었다.

곧장 풍오의 등에 올라탄 익제가 채선을 앞질러 행렬의 선두로 향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선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 뒷모습을 두 눈 가득 넘치게 담아 넣었다.

***

“허억, 허억. 힘, 들지 않으……셔요?”

송하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굽혔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늦봄의 햇살이 나무 그늘을 뚫고 송하의 얼굴에 쏟아졌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이 번들거렸다.  

“…….”

채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길게 꼬리를 드리운 행렬은 이미 산 중턱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산세가 제법 험했다. 행렬의 속도가 뒤에서부터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는 선두와 달리 뒤쪽에서 걷는 하인들은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녹초가 된 이들도 더러 보였다. 

하지만 채선은 아직 쌩쌩했다. 숨이 조금 가빠졌을 뿐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송하가 대단하다는 듯 존경 어린 눈으로 채선을 올려다봤다.

“굉장하셔요!”

뭘, 이 정도 가지고.

채선이 쑥스러운 듯 살그머니 시선을 틀었다. 뒤에 있던 연산댁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서두르셔야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합니다. 산중에서 찬 이슬을 맞으면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힘드시면 가마에 타십시오.”

절레절레.

연산댁의 말에 채선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다는 뜻이었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쉰 송하가 “으아, 더는 못 갑니다. 가마에는 제가 타면 안 될까요?” 하며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연산댁이 두 눈을 찌푸리며 송하를 나무라는 찰나.

“응? 이게 무슨 소립니까?”

별안간 송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저 앞에 있는 길모퉁이를 향했다. 선두와 제법 거리가 벌어졌던 탓에 그 너머의 상황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다. 하나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모퉁이 너머에서 하인 하나가 뛰어나오더니 겁에 질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도, 도적이다! 산적이 나타났…… 크헉!”

등 뒤에서 나타난 커다란 검이 하인의 등을 베었다. 왈칵, 핏물을 뱉은 그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꺄악!”

송하의 비명이 하늘을 찢었다. 하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후미에 있던 호위들이 서둘러 채선의 주위를 에워쌌다. 모퉁이에서 말을 타고 나타난 호위 하나가 방금 전, 그 산적의 허리를 베며 아래로 내려왔다.

“모두 침착하라! 흩어지지 말고, 부인과 짐을 챙겨 후방으로 물러나라!”

그제야 허둥지둥 대던 하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곁으로 다가온 연산댁이 굳은 얼굴로 빠르게 속삭였다.

“걱정 마십시오. 선두에 호위무사들이 있으니 오래지 않아 상황이 정리될 겁니다.”

그녀는 노련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겁을 먹거나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연산댁의 모습에 채선도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들을 단속한 호위가 곧장 채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떡해요, 이게 무슨 일이래요, 저는 여기서 죽기 싫어요, 아직도 앞날이 창창한데, 하고 울음을 터뜨리던 송하는 연산댁의 꾸지람을 듣고서야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히끅히끅, 그녀의 잇새로 딸꾹질이 흘러나왔다. 

채선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모퉁이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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