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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5)화 (2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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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하, 재미있군.

    “…….”

    익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까맣게 물든 천장을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고개를 틀었다. 몸을 둥글게 만 채선이 익제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웅크리고 있었다. 반대편 침상 끄트머리까지 내몰린 몸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문득,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밤보다 깊고, 어둠보다 짙은 눈동자가 채선의 동그란 등에 꽂혔다. 그가 무심코 베개 밑을 더듬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긴 장도가 만져졌다. 

    “잠을 잔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손끝으로 장도 집의 문양을 더듬던 익제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그의 목소리가 적막한 밤에 섞여들었다. 이윽고 더 어두운 고요가 찾아왔다.

    ***

    짧은 여정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순탄했다. 

    고된 여행길에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아침까지 거하게 챙겨 먹은 채선은 제 눈앞에 있는 고운 가마에 한 방 맞은 얼굴을 했다. 자신의 신분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그제야 새삼 실감이 났던 것이다. 

    단출하게 꾸렸다는 행렬은 족히 수십은 되는 듯했다. 어쩌면 백이 넘는지도 몰랐다.

    풍오의 등에 탄 익제가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었고, 그 뒤를 짐과 선물을 실은 우마차가 따랐다. 수십 명의 하인이 각자 보따리를 짊어진 채 줄지어 이동했고, 또 수십 명의 호위무사가 앞과 뒤에서 그들을 에워쌌다.

    채선의 가마는 행렬의 중간쯤에 있었다. 가마꾼들은 교대를 하며 걸음을 재촉했고, 그녀는 가마 안에서 이리 휘청, 저리 휘청하는 것 말고는 딱히 움직일 일이 없었다. 오래 걸으면 배가 빨리 꺼질 거라며 꾸역꾸역 밀어 넣은 아침밥이 속에서 부대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나루터였다.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커다란 배에 짐을 싣느라 분주했다. 

    “잡으시오.”

    육지와 배를 잇는 널빤지에 올라선 익제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채선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제게 내밀어진 손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쿡, 등 뒤에서 송하가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서 익제의 손을 잡지 않고 뭐 하느냐는 재촉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는 채선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배가 흔들리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소.”

    “…….”

    그제야 채선이 한 손을 쭈뼛쭈뼛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작은 그녀의 손을 감쌌다. 익제가 앞장을 섰고 채선이 조심스레 그 뒤를 따랐다. 

    불현듯,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것이 흔들리는 바닥 때문인지, 혹은 마주 잡은 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묶여 있던 밧줄이 풀리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반나절을 가야 합니다. 거기서 또 이틀을 걸어야 하지요. 산도 하나 넘어야 하는 고된 여정이니 푹 쉬어 두십시오.”

    산.

    채선의 눈이 반짝, 이채를 발했다. 본능적으로 익제를 찾는 눈에 뱃머리에 서서 너른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들어왔다. 

    호연지기로 가득한 그 모습이 마치 이 세상의 제왕처럼 늠름했다. 그래서 채선은 더 이상 시선을 두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귓불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 순간.

    “우웁.”

    채선이 갑자기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속이 느물거려 참을 수 없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물색없는 송하가 “부인! 설마…….” 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봤다. 그 말에 채선의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

    “부인께서 뱃멀미를 하는구나.”

    어느새 다가온 익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채선을 내려다보았다. 

    뱃멀미?

    채선은 그제야 이 불쾌한 감각이 멀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이.” 하며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않던 송하는 연산댁의 눈총을 받고서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익제가 커다란 손으로 채선의 등을 쓸어내렸다. 

    부드럽고 단단하게.

    “!”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감각이 찌릿, 척추를 타고 울렸다. 채선은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익제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볼 뿐이었다. 채선이 붉어진 뺨을 숨기려는 듯 한층 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배는 처음 타시오? 미리 알았다면 며칠 더 소요되더라도 육지로 돌아갈 것을.”

    채선이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가 절레절레 저었다. 배는 처음 타지만, 다른 방도는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저만 조금 참으면 되는 일인데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안 되겠다. 부인을 눕혀라. 안색이 희게 질렸구나.”

    “예.”

    익제의 명에 연산댁이 그녀의 한 팔을 부축했고, 송하가 잽싸게 다가와 나머지 팔을 부축했다. 

    파도가 쳤고, 배가 커다랗게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몸 안의 장기가 마구 뒤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우웁.”

    “안으로 드시지요. 누워 계시면 조금 나을 것입니다.”

    채선은 익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송하와 함께 갑판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그녀의 치맛자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고 나서야 혼잣말을 읊조렸다.

    “배를 처음 탄다.”

    분명, 태부의 양녀가 자란 곳은 섬이라고 했다. 그런 그녀가 배를 처음 탈 리는 없었다. 

    최소한 도성으로 나올 때는 배를 타고 나왔을 테니 말이다. 그 먼 바닷길을 직접 헤엄쳐 온 게 아니라면. 

    “하, 재미있군.”

    치밀한가 하면 엉성하고, 성긴가 싶으면 촘촘했다. 익제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부인의 뒷모습을 쫓다 이내 눈길을 돌렸다. 

    바다처럼 넓은 강은 계곡물처럼 유속이 빠르진 않았다. 그를 둘러싼 음모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들이 하나씩,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다에 닿을 것이다.

    그 음모의 끝은 어디일 것인가.

    익제의 안광이 서늘한 빛을 냈다.

    ***

    채선은 집 밖에 나와서야 익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새삼 깨닫고 있었다. 황족의 행차를 구경하기 위해 벌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그를 대접하기 위해 버선발로 달려온 호족들로 인해 그들의 여정은 번번이 걸음이 묶이곤 했다.

    익제 역시 그들의 청을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평생 황족의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이들이다. 은원군의 행렬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축제요, 잔치였다.

    덕분에 채선과 하인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편히 쉴 수 있었지만, 밤늦게까지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익제로서는 퍽 즐겁지만은 않을 터였다. 그래도 웃는 얼굴로 자리를 지키는 그가 여러모로 대단해 보였다. 

    채선은 창 너머로 비치는 하얀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인지 선뜻 잠이 오지 않았다. 

    멀거니, 뿌연 달빛만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주먹만 한 비단 주머니가 만져졌다. 그 안에는 태부가 준 패물 몇 개가 담겨 있었다. 

    명색이 양부라는 이가 혼인식까지 얼굴 한 번 내민 적이 없었으니, 정말로 그가 패물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시집을 가는 양딸에게 주는 태부의 선물이었다.

    “……몇 개쯤은 괜찮겠지.”

    채선이 마치 변명처럼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녀는 이번 여정에서 기회를 틈타 도망칠 생각이었고, 그러자면 돈이 필요했다. 타지에서의 삶이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을 테고, 그럴 때는 돈 만큼 귀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

    그때, 딱딱한 무언가가 손에 걸렸다. 

    “아.”

    그것의 정체를 눈치챈 채선의 눈매가 슬며시 아래로 향했다. 부적처럼 늘 품에 넣어 다니는 어미의 유품, 은으로 만든 노리개였다. 

    “……언니에게 주고 올 걸 그랬나.”

    채선은 옷 위로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곧 도망자 신세가 될 예정인 그녀가 침울하게 중얼거리던 바로 그때.

    덜컹.

    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자, 방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복도의 찬 공기와 함께 진한 술 냄새가 확, 하고 풍겨 왔다. 

    그의 뒤를 힐긋거렸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인들은 내일의 고된 여정을 위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모양이었다.

    “…….”

    깊은 밤이었다.

    태어나서 도성 땅 한 번 밟아본 적 없는 지방 귀족들에겐 수도에서 온 황족이 황제와 비견될 만큼 귀해 보일 터였다. 그들은 앞다투어 술을 권하고 말을 걸어왔다. 황족과 술잔을 나누었다는 사실은 후에 그들의 무용담으로 바뀔 것이다. 

    긴 술자리는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던 채선이 기어코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익제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의 한쪽 팔을 부축하며 한 발을 뗐다.

    “?” 

    그러나 그 자리에 멈춰 선 익제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채선을 내려다봤다. 곁에 선 채선이 취할 것처럼 짙은 술 냄새가 풍겨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취한 사람 같지 않았다. 창백한 낯빛은 오히려 술이 아니라 달빛에 젖은 것 같았다.

    “…….”

    채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입술은 이번에도 역시 얌전히 닫히고 말았다. 익제는 잠시 달싹이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이는 붉은 입술이었다.

    “…….”

    채선의 표정이 점점 어색하게 굳었다. 제 입술을 응시하는 익제의 시선이 몹시도 강렬했던 탓이다. 

    딱딱하게 경직된 그녀의 입매가 파르르, 엷게 떨렸다. 움칫, 그의 팔을 움켜쥔 손가락이 굽었다. 그녀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던 찰나.

    “시각이 늦었는데 아직 깨어 있었소?”

    익제가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선은 그것이 그의 진심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붉어지는 귓불을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가슴 속에서 자라난 싹 때문이다. 어떤 곳을 피울지 알 수 없는 싹. 

    그녀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뱃멀미를 하느라 고단했을 터인데 주무시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익제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일순,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멀쩡한 듯 보여도 거나하게 취했나 보다.

    “!”

    채선이 깜짝 놀라 두 손을 뻗었다. 간신히 그를 붙든 그녀는 익제를 부축한 채 조심조심 한 발을 내디뎠다. 익제의 몸이 비틀거릴 때마다 그녀의 몸도 덩달아 휘청거렸다. 

    간신히 침상까지 걸어간 채선이 그를 이불 위에 뉘었다. 

    풀썩. 

    고꾸라지듯이 쓰러진 익제는 그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채선이 낑낑거리며 침상 아래에 있는 그의 다리를 당겨 올렸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생각하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덩치 큰 익제를 옮기는 동안 섬돌이며 문지방에 머리를 쿵쿵 찧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째서 머리에 혹이 나 있느냐며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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