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4)화 (24/131)
  • 16643785631147.jpg

    24

    이게 나를 엿 먹이려는 게
    아니란 말이지.

    “…….”

    짓궂은 물음에 채선의 눈꼬리가 한층 더 시무룩한 빛을 띠었다. 더 이상 변명해봤자 제 꼴만 우스워진다는 걸 아는 탓이다. 

    채선이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잘 다녀오셨냐는 뒤늦은 인사였다.

    익제는 체념한 얼굴로 다소곳이 예를 표하는 채선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말을 하지 못했지만 커다란 갈색 눈동자는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금세 부끄러워했다가 금세 시무룩해지고, 또 금세 기쁘게 웃었다. 

    저러니 계집종까지 놀리는 것이지.

    그런가 하면, 사람이 기껏 다정하게 대해주는데도 곧잘 겁먹은 얼굴을 하곤 했다. 상냥한 말투에도 의기소침하게 뒤로 물러섰으며, 온화한 말에는 우울하게 시선을 떨구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었다.

    불현듯,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익제는 이내 고개를 저어 방금 떠올린 생각을 털어냈다. 

    태부의 끄나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고 우물쭈물하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익제가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안으로 드십시다. 혹, 부인의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오.”

    “…….”

    익제가 앞장을 서자 그제야 채선의 고개가 들렸다. 채선의 시선이 그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아침과 다름없는 모습에 비로소 그녀가 소리 없는 안도를 흘렸다. 

    그와 동시에 한발 앞서 걷던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

    “밤이 깊었소.”

    익제의 말에 채선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침의로 갈아입은 익제가 느릿느릿, 침상으로 걸어왔다. 

    방금까지 그를 수발하던 연산댁과 송하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꿀꺽.

    “!”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던 채선이 천둥 같은 소리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제가 그런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 같았다. 숨통이 꽉 틀어 막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날카로운 긴장감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익제가 천천히 침상 위에 걸터앉았다. 흠칫, 채선의 어깨가 떨렸다. 그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다정한 가면을 썼다.

    “이틀 뒤, 모친을 뵈러 풍주로 간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소?”

    그 말에 채선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자신을 한 가령이라고 소개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늦은 오후에 채선의 처소로 찾아온 그는 채선이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예? 국태부인께요?”

    말 못 하는 그녀를 대신해 송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향덕원의 대소사를 책임지는 이라고 하였다. 송하의 언질에 의하면, 연산댁과 함께 황궁에서부터 익제의 부친을 모셨던 이라고도 했다. 

    연산댁은 익제의 유모였고, 한 가령은 황제의 환관이었다. 그런데 그가 채 젖을 떼기도 전에 황제가 붕어하였고, 그와 그의 모친은 쫓기듯이 사가로 돌아와야 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된 모친은 낙향을 하였고, 한 가령과 연산댁은 도성에 홀로 남은 익제를 친자식처럼 길렀다.

    그렇기에 한 가령과 연산댁에게 있어 익제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광휘로운 옥좌를 강탈당한 비운의 황자.

    “…….”

    한 가령이 주름진 눈으로 채선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언뜻 인자하게 보이는 노인의 시선이 송곳처럼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연륜이 깊은 눈동자는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거짓을 단번에 눈치챌 듯했다.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심장이 거칠게 날뛰는 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채선은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국태부인이시면…… 주인어른의 어머님이 아니세요?”

    “!”

    송하의 물음에 채선의 어깨가 파드득, 떨렸다. 연산댁이 송하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채선을 바라보았다.

    “국태부인께서 병석에 누워 계신 탓에 은원군의 혼인식에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들어서 알고 있다는 듯 채선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 가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의 중매로 혼인이 급하게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엄연히 집안에 어른이 계시는 바, 당연히 인사를 드려야지요.”

    어쩌면 한 가령 역시 말 못 하는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안광이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던 탓이다.

    “…….”

    결국 채선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의 혼례에 참석하지 못한 어미의 심정을 헤아리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틀 뒤에 출발이니 준비를 서두르시게.”

    그 말을 끝으로 한 가령이 방을 나갔다.

    혹시…….

    그때, 섬광처럼 채선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실낱 같은 가능성이었다. 

    어쩌면 도망칠 기회가 생길지도 몰라.

    “…….”

    익제는 딴생각에 잠긴 채선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정말로 말을 할 수 없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가늠하는 듯한 눈매가 깊어졌다. 

    그의 잇새로 마치 꾸민 것처럼 온화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늘 낮에는 무엇을 하고 지내셨소?”

    그제야 내도록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부인의 고개가 들렸다. 

    익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상냥한 눈으로 그녀의 눈동자에 곤혹스러움이 깃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물음은 ‘예’, ‘아니요’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체념한 부인이 협탁에 놓인 숯과 종이를 끌어당겼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녀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이 불쑥, 들이 밀어졌다.

    「꽃. 나무.」

    저 짧은 말투는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일부러 나를 엿 먹이려는 것이 아닐까, 익제의 삐뚜름한 눈매가 부인을 훑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짧은 배움이 부끄러운 듯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가 싶으면 무언가를 감추는 듯하고, 음흉한가 싶으면 순진해 보인다. 익제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꽃과 나무라. 혹, 후원을 다녀오셨소?”

    끄덕끄덕.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저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계책일까? 

    익제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최대한 많은 말을 하게 만드는 것, 그리하여 실수를 유도하는 것.

    그의 눈매가 한층 더 그윽해졌다.

    “이 시기의 후원은 나도 퍽 좋아하오. 그곳이 마음에 들었소?”

    끄덕끄덕.

    “내일은 같이 후원을 한 번 거닐어도 좋겠구려. 그리고 또 무얼 하였소?” 

    또다시 곤혹스럽게 종이를 내려다보던 부인이 마침 무언가 떠오른 듯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법 득의만만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 긴 하나의 문장이 그를 맞이했다.

    「말과 놀았다.」

    ……그러니까 이게 나를 엿 먹이려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익제는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황급히 펴며 제 부인을 마주 보았다. 찰나의 불쾌함을 목격했던 것인지 그녀의 눈매가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러다 무어라 끄적거린 종이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미안하다. 내가 글이 짧다.」

    이게 연기라면 목을 걸어야 할 것이다. 

    익제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짐짓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태부의 목적이 저의 울화통을 터뜨리려는 것이라면, 그는 곧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이라. 그래, 어떤 말을 보았소? 처음 본 부인과 살갑게 지낼 정도라면 천설이려나? 혹 눈처럼 하얀 백마였소?”

    절레절레.

    부인이 고개를 젓더니 다시 한번 숯을 쥐었다. 그녀가 까만 숯을 쥐고는 하얀 종이 위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무얼 하나, 고개를 빼고 보니 입을 앙다문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글자가 생각나지 않거나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거야 원.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익제가 온화한 미소 아래로 혀를 찰 때, 부인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이윽고 숯을 고쳐 쥐었다. 삭삭, 숯이 종이 위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요란했다.

    “…….”

    익제는 제 부인이 의기양양하게 내민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웬 시커먼 덩어리가 하나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으려던 익제가 일순 말을 멈췄다. 

    다시 가만히 보니, 눈앞의 덩어리가 말처럼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의 몸뚱이가 온통 검은 숯칠이 되어 있었다.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 풍오를 만났소?”

    끄덕끄덕.

    “……풍오랑 놀았다고?”

    끄덕끄덕.

    “…….” 

    익제가 침묵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의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동그란 정수리를 보인 채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글을 완성한 그녀가 빙긋 웃으며 또다시 종이를 건넸다. 

    새카만 말 등 위에 새로운 글이 적혀 있었다. 

    「또 놀자.」

    “…….”

    반쯤은 쑥스러운 듯, 또 반쯤은 기쁜 듯 웃는 부인을 보며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그녀는 세상에 다시없을 유능한 광대였다. 

    의혹에 가득 찬 눈과 달리 그의 잇새로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그럽시다.”

    그와 동시에 익제가 느릿하게 한 손을 뻗었다. 열기를 품은 눈동자가 부인의 복숭앗빛 뺨에 머물렀다. 

    그녀는 갑자기 변한 농밀한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큰 눈을 데구르르 굴리기만 했다.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뻗어 부인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

    그 순간, 그녀가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파드득, 몸을 떨었다. 커다랗게 뜨인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갈색 눈동자에 비친 그의 얼굴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일순, 익제의 눈이 차게 식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천천히 훑었다.

    “누가 보면 내가 부인을 잡아먹는 줄 알겠소.”

    픽, 그의 잇새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이 샜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조소에 가까웠다. 그의 가면을 뚫고 나온 서늘한 비웃음.

    놀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흥이 식었다는 듯 그가 손을 거두었다. 

    소리 없는 안도의 한숨을 흘린 채선이 슬그머니 엉덩이를 밀며 침상 끄트머리로 물러났다.

    쯧.

    그 모습에 익제가 다시 한번 혀를 찼다. 별안간 심기가 뒤틀렸다.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말 못 하는 아내를 저처럼 다정하게 대하는 남편이 또 있는지. 그런데 사람을 무슨 저승사자 대하듯 하니 짜증이 나서 참을 수가 있나.

    “좋은 꿈 꾸시오.”

    그 인사를 끝으로 익제가 이불을 덮었다.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았다.

    “…….”

    어색하게 앞만 보고 있던 채선이 한참 뒤에야 머뭇머뭇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그림자 아래에 파묻힌 익제는 어느새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행이다.

    차게 식었던 손끝에 서서히 피가 돌기 시작했다.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불행에 빠뜨린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부의 연을 맺어 몸까지 섞은 이는 과연 얼마나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될까.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깨부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녀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도 더럭 겁이 났다. 

    하아아.

    긴 한숨을 내쉰 채선이 조심스럽게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언제까지고 잠을 못 이룰 것 같던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고요해졌다. 

    방 안에는 폭설이 내린 밤처럼 깊은 침묵이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