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벌써 공처가가
되셨다고 하던데요.
익제는 오랜만에 만난 동기처럼 저를 반갑게 맞이하는 광무대군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건넸다.
그는 눈앞의 사촌 동생이 치가 떨릴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아니, 비단 이 자뿐만이 아니다. 현 황제와 그 피를 이은 이들 모두가 혐오스러웠다.
‘폐하의 죽음에는 분명 현 황제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걸 밝히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일 따름입니다. 죽어서 어찌 폐하의 얼굴을 봬야 할지……. 그 자리는 주인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자가!’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한 가령의 한 맺힌 절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찾아드는 정체불명의 자객, 그들의 배후에 여섯 황자 중 하나가 있다는 사실은 불을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혹은, 그들 모두일지도.
하지만 그는 현명하게도 때를 기다릴 줄 알았다. 어금니를 숨기고, 발톱을 감춘 채 몸을 낮출 줄 알았다. 절호의 기회, 그날이 올 때까지 존재감을 숨겨야 했다.
“형님, 예까지 오시게 해서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광무대군의 말에 그가 권한 차를 입으로 가져가던 익제가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찻잔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당치도 않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 해도 또 그러십니다. 어디 우리가 남입 니까? 형제만큼이나 가까운 사촌 간이 아닙니까.”
“아무리 가깝다 한들 폐하의 아드님이신데 내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하나의 예외를 두면 또 다른 예외가 생겨나는 법. 나는 이게 편하니 신경 쓰지 마시오.”
“형님, 고집도 참…….”
겸연쩍은 미소를 던진 광무대군이 “그건, 그렇고.”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매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묻어났다.
“불미스러운 일을 당하셨다면서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형님이 실종되셨단 얘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손가락으로 찻잔을 매만지던 익제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의 등을 찌른 것은 자신의 왼팔이나 다름없는 효명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황제의 아들이 있었다. 여섯 명의 황자 중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중 하나가 분명했다.
익제의 가느다란 눈매가 마치 가늠이라도 하듯 광무대군의 위아래를 훑었다.
효명, 그는 누구의 사주를 받았을까?
얼마 전부터 황제가 태자에게 양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야심을 가진 황자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었다. 익제 역시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황자의 난에 엮여 들게 될 것이다.
누구인가.
누가 감히 내 목을 노리는 것인가.
누구를 믿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 남은 방법은 딱 하나였다. 누구도 믿지 않는 것. 그리하면 최소한 적에게 등을 내어줄 일은 없을 터였다.
효명을 믿은 것, 그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같은 실수는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걱정해 주어 고맙소. 광무대군께서 사병을 보내어 수색 작업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덕분에 이리 무탈하게 돌아와 말끔히 회복하였다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을요. 저도 저지만, 인애대군 형님의 마음이 좋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형님께서 주최하신 사냥대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어찌 마음이 편하셨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난날, 인애대군께서 직접 향덕원까지 찾아오셨소.”
“그러셨습니까.”
광무대군이 끄덕끄덕,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일순 목소리를 낮추며 익제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헌데 범인은 잡으셨습니까? 듣자 하니, 믿었던 수하라고 하던데요.”
그 말에 익제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는 느릿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뒷말을 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마다 광무대군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찾은들 무얼 하겠소. 다 내가 부덕한 탓이거늘.”
“저런. 그래서 찾지 않으실 요량이십니까?”
광무대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익제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관군이 쫓고 있다 하니 기다리는 중이지요. 관군들이 어련히 알아서 수색을 잘하겠소. 내가 나서봤자 모양새가 나빠질 뿐이오.”
“하여간 형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입니다.”
광무대군이 한숨처럼 익제를 타박했다. 익제가 허허, 하고 또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광무대군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그에게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참, 신혼 생활을 어떠십니까? 혼기가 꽉 차도록 부인 한 명 들이지 않으시는 바람에 남색을 한다는 소문까지 도셨던 분이 이렇게 갑자기 혼례를 올리실 줄 몰랐습니다. 깜짝 놀란 이가 저뿐만이 아닙니다.”
“하하하.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소. 폐하께서 명을 내리셨는데 신하 된 도리로 어찌 황명을 거역한단 말이오.”
“예. 폐하께서도 형님이 오래 혼자 계신다며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익애하는 조카가 아니십니까?”
익애하는 조카라.
익제는 그 말에 비소가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비틀린 입매를 가렸다.
광무대군의 눈동자가 짓궂은 빛을 띠었다.
“태부의 양녀라고 하였지요? 어떻게, 형님 마음에는 드십니까? 듣기로는 형님이 벌써 공처가가 되셨다고 하던데요.”
“하하하.”
익제가 쑥스러운 듯 목 뒤를 긁적이며 웃었다. “이런. 벌써 그리 소문이 퍼졌단 말이오.”라고 대꾸하는 목소리가 겸연쩍다.
그가 흔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하고 속이 깊은 여인이라오. 다만.”
“다만?”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 부인께서 말을 하지 못하시더이다.”
“말을…… 못 한다고 하셨습니까?”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광무대군이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일순,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익제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애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리되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 그리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말을 하지 못한다오. 태부께서 전혀 언질이 없으셨던 걸 보면, 아마 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닌 듯한데……. 말 못 할 일이 있었던 게지. 그렇다고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대놓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언젠가는 말을 해주겠지 하고 기다려 볼 생각이오. 그보다.”
말을 하지 못한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광무대군이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요.” 하며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익제가 태연하게 뒷말을 이었다.
“부인과 함께 낙향을 할까, 생각 중이라오.”
“낙향……을요?”
그 역시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 듯 광무대군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들고 있던 찻잔을 입에도 대지 않고 도로 내려놓았다.
“낙향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여러 차례 생각해 보았는데, 부인께는 그게 나을 듯싶소. 부인의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잡한 도성보다야 한적한 시골이 낫지 않겠소?”
“…….”
광무대군은 저도 모르게 익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익제는 찻물을 들여다 애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그 속에 부인의 얼굴이 있기라도 한 양.
광무대군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는 익제의 혼인식 날, 먼발치에서 보았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행여 옷깃이라도 닿을까, 그리하여 그녀의 불운이 옮을까, 불쾌한 기분으로 흘깃거렸던 얼굴은 그렇게 빼어나지 않았다.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제 부인의 미모가 훨씬 더 뛰어났다.
그런데 익제는 그녀에게 이미 홀딱 빠진 듯이 보였다. 사내를 홀리는 것이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의 능력일까, 그의 난데없는 낙향은 불행의 전조인 걸까, 불운이 벌써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다음 순간, 광무대군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농을 던졌다.
“소문이 틀린 게 하나 없습니다. 아주 형수님께 푹 빠지셨군요. 그런 분이 어떻게 여태 혼자 사셨답니까?”
“하하하.”
익제가 다시 한번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썹을 긁적이며 웃었다. 이윽고 광무대군도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고, 두 사람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서로를 속이기 위한 공허한 웃음은 망연히 허공을 떠돌다 그대로 사라졌다.
***
“그만 들어가시지요. 아무리 따뜻한 날이라 해도 이리 오래 나와 계시면 몸이 차가워집니다.”
송하의 재촉에도 채선은 꼼짝 않고, 시무룩한 눈으로 대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뜰만 왔다 갔다 했지만 굳게 닫힌 문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속내를 눈치챈 송하가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주인님을 기다리시는 것이지요?”
“…….”
채선이 말없이 얼굴만 붉혔다. 히히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송하가 두 눈을 음흉하게 뜨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오늘 아침에 같이 식사하셔 놓고 그새 얼굴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
“!”
무슨 말인가 하려던 채선이 합, 입을 다물고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보고 싶다니!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광무대군의 부름에 응한 익제가 무탈한지 걱정되었을 따름이다. 그런 채선의 모습에 송하가 또다시 “으흐흐.” 하는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하긴, 이제 막 혼인을 하셨으니 얼마나 애틋하시겠어요? 그러시면 딱 일각만 더 기다려 보아요. 그래도 안 오시면 들어가는 거여요, 아셨죠?”
송하의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채선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송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송하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휘파람이라도 불 것 같은 얼굴로 대문을 바라보았다. 결국 채선이 체념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릴 때였다.
삐걱.
나무 문이 열렸다.
“!”
채선의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무심하게 문턱을 넘어서던 익제가 시선을 느낀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 한 점의 의혹이 서렸다고 생각한 순간.
“…….”
익제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웃으며 채선에게로 다가왔다.
“해거름이라 날이 찬데 어찌하여 밖에 나와 계시오?”
채선은 우울함을 감추며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그의 속내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던 탓이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익제는 그녀를 의심하는 게 틀림없었다. 굳이 양녀까지 들여가며 그와 혼인을 시킨 태부의 속셈은 무엇인지, 향덕원에 들어온 채선이 과연 무슨 짓을 저지를 것인지.
그늘이 드리운 채선의 뺨을 내려다보는 익제의 눈매가 슥 가늘어졌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송하가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부인께서 여태 주인님을 기다리셨습니다. 안에서 기다리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렸지만 어찌나 주인님을 보고 싶어 하시던지…….”
“!”
채선이 깜짝 놀라 송하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아니라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다시 익제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으흐흐.”
실없는 웃음을 흘린 송하가 “그럼 전 물러가겠습니다.”라며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의 모습을 망연히 쳐다보던 채선이 익제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눈썹을 들썩인 익제가 채선에게로 몇 걸음 다가왔다.
“무엇이 그리 아니라는 것이오?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는 것이오, 아니면 내가 보고 싶었다는 게 아니라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