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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2)화 (2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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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저, 저게 뭐람?

    그곳은 후원이라기엔 지나치게 넓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후원 한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연못이었다. 따스한 봄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수면이 거울처럼 잔잔하고 맑았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부드러운 곡선의 돌다리가 고즈넉한 운치를 더했다.

    녹색 옷을 입은 나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생명력이 넘쳤다. 수십, 혹은 수백 년은 되었음직한 나무들이 터줏대감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다음으로 모란과 작약, 양귀비 같은 화려한 꽃들이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자주괭이풀이나 개불알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매일 이런 광경을 보고 사니 산중의 소박한 봄에는 관심이 없으셨던 게지. 

    채선이 의기소침해하는데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던 송하가 수선을 떨었다.

    “마치 극락에 온 것 같지 않으세요? 이렇게 아름다운데, 여기가 극락이 아니고 어디가 극락이겠어요? 아니, 극락도 이보다 아름답지는 않을 거여요. 저기, 저곳으로도 가 봐요. 얼른이요.”

    송하가 덥석, 채선의 손을 잡았다. 잡힌 손을 내려다보는 채선의 시선이 당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움찔, 그녀의 손가락이 굽었다. 

    역신.

    마을 사람들은 대놓고 그녀를 피했다.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불현듯, 자신의 불운이 송하에게 미칠까 두려웠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녀는 잡힌 손을 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기에는 맞닿은 손이 너무 따뜻했다.

    “거기 서 계시니까 어느 게 꽃이고, 어느 게 부인인지 모르겠습니다.”

    송하의 능청스러운 아부에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채선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부끄러운 듯 뺨을 붉혔다. 

    원망스러운 눈길로 송하를 흘겨보자 송하가 “으흐흐.” 하는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여전히 채선의 한쪽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계셨으면 부인의 미모에 홀딱 반하셨을 텐데요.”

    “…….”

    채선의 얼굴이 한층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송하가 “이히히.” 하고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채선은 그녀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금방 도망칠 거니까.

    변명 같은 말을 중얼거린 채선이 맞잡은 손에서 시선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담장 아래에 핀 수국이, 물 위에 뜬 덜 여문 연꽃이 대번에 그녀의 시선을 앗아갔다. 걸음마다 꽃잎이 붉은 흔적을 남겼고, 눈 닿은 곳마다 봄이 깊은 향기를 뿌렸다.

    두 사람은 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정처 없이 내딛던 걸음이 후원 반대편에 당도했다. 그 순간.

    “…….”  

    채선이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그 자리에 멈춰 선 송하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더니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어찌 그곳을 잊고 있었을까, 난처해하는 목소리였다.

    그곳은 겨울이었다. 

    아니, 그곳만 겨울이었다.

    누렇게 마른 잎과 고개가 꺾인 꽃들, 바닥에 누운 풀들과 메마른 땅.

    “후원을 가꾸는 하인들이 거름도 바꿔보고, 땅도 갈아엎어 보고…… 백방으로 노력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이곳만 이렇게 황폐하답니다.”

    등 뒤에서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연산댁이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채선은 다시 고개를 돌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삭막한 땅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곳을 보이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연산댁의 말에 채선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부끄럽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문득, 채선의 시선이 그 길 끝에 있는 나무 문에 닿았다. 그녀가 들어온 문과는 정반대 쪽에 있는 문이었다.

    저곳은 어디로 통하는 문일까?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연산댁이 여상한 투로 말했다.

    “이 문 너머에는 주인님의 처소가 있습니다. 이 후원이 주인님과 부인의 처소를 가로지르는 지름길이지요.”

    “!”

    일순,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연산댁이 흐뭇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지금까지는 부인의 처소가 비어 있었던 터라 사용할 일이 없으셨지만, 이제는 종종 이용하시지 않겠습니까?” 

    아.

    채선의 눈매가 살짝 이지러졌다. 그가 후원에 발을 내디뎌 처음 보는 광경이 이처럼 황막한 것이라니. 심장이 아랫부분이 찌르르, 하고 울렸다.

    ‘내 방에 꽃 한 송이라도 꽂아봐라. 진정한 너그러움이 무엇인지 보여줄 테니.’

    불쑥, 남자의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채선의 고개가 반쯤 모로 기울었다. 산중에서의 익제는 퍽 여유로워 보였다. 간간이 통증에 시달리고 심술궂은 말을 툭툭 내뱉긴 했지만, 툇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꽤 느긋했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선잠이 든 듯 나른하게 늘어지던 모습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회화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날도 그랬다. 

    그는 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

    생각에 잠긴 갈색 눈동자가 이윽고 단단하게 여문 그때.

    “어? 이게 무슨 소리지?”

    닫힌 문 너머가 소란스러워졌다. 송하와 연산댁의 시선이 나무 문을 향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저곳은 주인님의 처소가 있지 않습니까? 주인님은 출타하셨는데요?”

    송하가 의아한 듯 연산댁을 돌아봤다. 하지만 연산댁이라고 영문을 알 리 없었다.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연산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수선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워어, 워……. 으악!”

    그와 동시에 덜컹거리며 문이 열렸다. 커다랗고 검은 무언가가 문 너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꺄악!”

    송하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홉뜬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저, 저게 뭐람?”

    송하의 잇새로 망연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연산댁이 눈살을 찌푸렸고, 채선은 말없이 그곳을 쳐다보았다.

    흑마 한 마리가 뒷발로 일어선 채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히힝, 푸르르. 

    흑마가 잔뜩 짜증 난 기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고삐를 놓친 하인이 뒤늦게 허둥지둥 후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흑마는 발아래 꽃을 짓이기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피어보지 못한 황량한 꽃들이 흑마의 발굽에 처참하게 뭉개졌다.

    “아이고. 아이고. 저놈이 또 못된 성질이 났구나. 이를 어쩐대.”

    하인의 곡소리가 들렸다. 그는 날뛰는 흑마의 고삐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그때마다 흑마가 난동을 부리는 통에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어?

    채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눈앞의 흑마를 쳐다보았다. 혀를 쭉 내민 채로 씩씩거리며 흙을 파던 흑마가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사나운 눈망울이 채선에게 꽂혔다.

    “엄마야!”

    송하가 넘어진 자세 그대로 비명을 질렀고 연산댁이 다급하게 채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리를 피하시지요, 부인.”

    “송구합니다. 송구합니다. 저놈이 지금…….”

    채선을 빤히 쳐다보던 흑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흑마가 터벅터벅, 채선에게로 걸어왔다. 

    “이, 이를 어째!”

    송하가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인이 다급하게 고삐를 붙잡았다. 푸르르,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턴 흑마가 끈질기게 걸음을 옮겼다. 

    “안 돼, 안 된다니까, 이 녀석아!”

    하인이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가 고삐를 힘껏 잡아당겼지만, 흑마가 앞발을 들고 쿵쿵 뛰자 그대로 나뒹굴고 말았다. 

    “아이쿠!”

    푸르르, 히힝.

    마치 비웃듯이 콧구멍을 벌름거린 흑마가 속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채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채선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연산댁과 송하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불쑥.

    “!”

    흑마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송하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꽥꽥 소리를 질렀다. 

    “꺄악! 안 돼! 군대부인을 잡아먹지 마!”

    송하의 새된 비명이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던 흑마가 채선의 머리 위에서 킁킁, 커다란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풍오.

    채선은 그 흑마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자존심과 충성심이 강한, 영리한 흑마.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채선이 가만히 손을 뻗자, 그녀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던 흑마가 이내 채선의 손길에 얌전히 머리를 맡겼다. 

    영리한 말은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래?”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하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채선과 풍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것은 연산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벅저벅 다가온 하인이 다시 고삐를 움켜쥐며 채선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여댔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요.”

    채선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하인이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풍오를 쳐다보았다.

    “이놈이 이래 봬도 주인어른께서 가장 아끼시는 말인데.”

    알아요. 

    채선이 풍오를 보며 싱긋 웃었다. 흥, 풍오가 반쯤 고개를 비틀었다. 

    “요 녀석이 성격이 좀 지랄…… 아이쿠. 성격이 좀 별나서 말입니다.”

    그 역시 알고 있다. 

    풍오는 채선이 주는 당근에도 꿈쩍하지 않던 지조 있는 말이었다. 하인의 말이 제 욕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풍오가 태연하게 발밑의 풀을 뜯었다. 

    “주인어른께서 좀 전에 외출하시며 다른 말을 타고 가시자, 그때부터 심기가 뒤틀려서는 마구간을 뛰쳐나와 결국은 이 사달을 낸 거 아니겠습니까요. 성격은 지랄…… 아니 별난데,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저놈이 저희 머리 꼭대기에 있습니다요. 오로지 주인어른의 말만 듣지요. 그런데.”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하인이 채선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목소리에 의구심이 가득했다.

    “참 신기합니다요. 저놈이 저리 얌전하게 굴다니.”

    “신기할 게 뭐가 있어요?”

    그때, 송하가 팔짱을 턱 끼고 잘난 체를 했다. 잔뜩 치켜든 턱이 하늘에 닿을 똥 말 똥 했다.

    “부인께서 주인님과 일심동체이시니 풍오도 그것을 알아본 것이지요. 역시 보통 말이 아니여요.”

    “그런가?”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하인이 채선을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요.”

    그가 고삐를 당기며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풀을 뜯고 있는 풍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쥐어뜯은 풀들이 죄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풍오는 그냥 심통을 부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채선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가 하인이 잡고 있던 고삐를 받아 쥐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눈만 끔뻑이던 하인이 그녀에게 어영부영 고삐를 넘겨주었다. 

    채선이 한 발을 떼자, 풍오가 못 이긴 척 따라왔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일단 따라가 준다는 듯 고고한 태도였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하찮은 말이 아니었으므로.

    “…….”

    채선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슬며시 베어 물었다. 이곳에 저를 알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녀가 태부의 수양딸이 아니라 채선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게다가 그 목격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채선이 지랄…… 아니 별난 풍오를 다독여 마구간으로 돌려보냈다는 소문은 일각도 되지 않아 향덕원 전체에 쫙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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