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저 여인의 뒤를 캐 보아라.
흠칫, 채선의 등이 긴장했다.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놈의 ‘그런데.’ 죽지도 않고 또 찾아왔네.
익제가 흥미로운 눈으로 채선이 써 놓은 글자를 쳐다보았다. 배움이 짧은 것치고는 글자가 꽤 정갈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어찌 너른 공간을 두고 종이 귀퉁이에 글을 적으시오?”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깜빡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투로 멀거니 앉아 있던 채선이 다시 숯을 끄적거렸다.
「아깝다.」
“아하.”
익제는 비어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켰다. 짧고 무례한 글과 힐끔힐끔, 눈치를 살피는 소심한 태도 사이의 간극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여기서 웃었다가는 저이가 한동안 숯을 손에 쥐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때마침 식탁 위에 음식이 모두 차려졌다.
“드십시다.”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입을 다물었다. 채선은 음식을 입에 넣으면 유난히 말수가 적어지던 그를 떠올렸다.
그녀가 힐끔, 곁눈질로 익제를 훔쳐보았다. 질 좋은 비단옷과 온화한 분위기, 누그러진 눈매와 친절한 태도. 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채선이 알던 남자는 차가운 태도에 빈정거리는 말투, 비뚤어진 입매를 가진 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진 턱과 길쭉한 눈, 흠결 없는 콧대는 그녀가 알던 남자가 분명했다.
무엇 때문일까? 모난 사람이 선량한 이의 가면을 덮어쓰고 있는 것은?
채선이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 익제가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 여전히 상념에 잠겨 있던 채선이 반사적으로 나물을 집어 그의 밥 위에 올려두었다.
“…….”
채선이 올려준 반찬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익제가 눈동자만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채선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그러다 다음 순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만큼 어색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린 그녀가 밥 위에 놓인 나물을 바라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서서히 일그러지던 눈매가 이내 곤혹스러운 빛을 띠었다.
그와 동시에 익제의 눈동자가 차게 식었다. 그녀의 행동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군가가 아니었다.
하.
그가 소리 없는 실소를 흘렸다. 제 부인이라는 여인이 채선을 흉내 내는 것 같아 심기가 뒤틀렸다.
태부의 먼 친척이라는 그녀가 산중에 사는 채선을 알 리 없을 테지만, 그조차 태부의 흉계인 것만 같아 그의 눈매가 서늘하게 식었다.
채선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멈칫멈칫,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익제가 온화한 미소를 머금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채선의 동그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가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지만, 당연하게도 그 사이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내 그녀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시각이 벌써 이리 되었구려. 광무대군께서 잠시 들르라며 사람을 보냈는데 자칫하다가는 약속에 늦고 말겠소. 나는 먼저 일어날 터이니 부인께서는 천천히 식사를 즐기시오.”
“!”
방을 나서려던 익제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자신의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그의 옷깃을 틀어쥐고 있었다. 푸른 비단이 그녀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왜?
그는 하얗게 질린 부인의 낯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끝내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딱딱한 어깨가 슬며시 움츠러들었다. 툭, 그녀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
막 한 발을 떼던 익제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부인을 돌아봤다. 움찔, 그녀의 어깨가 떨렸다.
그 모습에 익제는 내심 혀를 찼다. 누가 보면 자신이 해코지라도 하는 줄 알겠다. 저만큼 다정하게 대해주는 이가 어디 있다고.
쯧.
표정을 수습한 그가 희미하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고기반찬을 올려주시겠소? 내가 나물보다는 고기를 좋아한다오.”
머뭇머뭇.
채선의 고개가 조금씩 움직였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익제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파드득, 채선이 못 볼 것을 본 양 겁에 질린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쯧.
또다시 혀를 찬 익제가 “그럼 먼저 자리를 뜨겠소. 느긋하게 식사를 하시오.”라는 인사를 남긴 채 방을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그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하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보폭 큰 걸음이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도영, 거기 있나.”
“예.”
익제의 부름에 곧장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도 없던 텅 빈 복도에 순식간에 검은 형체가 나타났다. 검은 두건에 검은 무복, 검은 신발을 신고 있는 그림자 같은 사내였다.
“원진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가.”
익제의 물음에 도영이 “예.” 하고 대답했다. 잠시 뜰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익제가 금세 입을 열었다.
“나갈 채비를 하라.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호출을 하였으니 얼굴은 비추어야겠지.”
“예.”
“그리고.”
불쑥, 덧붙여진 말에 뒤돌아서던 도영이 다시금 익제에게로 몸을 돌렸다. 두 눈을 가늘게 뜬 익제가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저 여인의 뒤를 캐 보아라. 정말로 태부의 친척이 맞는지. 맞다면 어디 살던 누구인지. 아무리 먼 친척이라도 태부의 이름을 대면 먹고살 만은 하였을 터인데, 썩 넉넉한 삶을 산 것 같지는 않군. 또한.”
그런 그의 머릿속으로 광무대군이라는 이름에 새파랗게 질리던 부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익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변했다.
“광무대군과 무슨 관계인지도 알아보라.”
“예, 알겠습니다.”
익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도영은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잠시 채선이 있는 곳을 돌아보던 익제가 곧장 뜰로 내려섰다.
만춘의 따스한 햇살이 그림자처럼 그의 발밑을 졸졸 쫓아왔다.
***
광무대군이 왜 그 사람을?
채선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물음은 오직 그것 하나였다. 아가리를 벌린 불안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발밑에서 넘실거렸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서 있는 듯 위태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다음 순간, 채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광무대군이 그 사람을 불렀다고 했어. 그러니 오늘은 아니야. 이렇게 대놓고 해코지할 정도로 생각이 얕지 않을 거야.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뭐겠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정적을 고꾸라뜨리는 게 광무대군의 속셈이잖아. 후에 누구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그러니 오늘은 아니야.
“…….”
그제야 요동을 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모든 불안이 깨끗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차츰 침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아, 마침내 긴 한숨이 잇새를 비집고 나왔다.
“괜찮으셔요?”
송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채선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여태 수저를 들고 딴생각에 빠져 있었단 사실에 그녀의 뺨이 민망한 기색을 띠었다.
“억지로 다 드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식사를 물리라고 하겠습니다.”
연산댁의 말에 채선은 미안한 마음을 담아 어설픈 눈웃음을 건넸다. 그러고는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가슴 한편이 묵직했다. 그러니 밥이 넘어갈 리 없었다.
채선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송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차는 안 드셔요?”라고 물었다. 채선이 그런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 어어…….”
채선은 당혹해하는 송하를 등 뒤에 두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연산댁이 하녀들에게 무어라 지시하는 사이,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던 송하가 재빨리 숯과 종이를 들고 채선의 뒤를 따랐다.
“같이 가셔요. 잠깐만 기다려 주셔요.”
채선을 향한 송하의 미움은 이미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를 용서해 준 그 순간부터, 송하는 자신의 안주인이 마음에 쏙 들었다.
자세히 보니, 말만 못 한다 뿐이지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얼굴은 바람꽃처럼 단아하고, 아량은 하해와 같이 넓었으며, 심성이 보드라운 것이 딱 향덕원의 안주인 감이었다.
게다가 제 주인인 은원군도 부인이 마음에 드는지 살갑기가 아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고 있으면 괜히 제 낯이 뜨거워졌다.
그럼 됐지, 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송하가 채선의 곁으로 달라붙으며 친근하게 말을 꺼냈다.
“연산댁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하녀들 중에 그나마 글을 좀 읽고 쓸 줄 알아 부인을 모시게 된 거래요. 이래 봬도 제가 말이죠, 원래는 궁녀가 되려고 했거든요. 사실 궁녀만큼 안정적인 직업이 없잖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월급 따박따박 나오지, 웬만하면 잘릴 걱정 없지, 그런 철밥통이 어디 있대요? 그런데 하필이면 시험 치는 날, 시골에서 왔다며 놀리는 아이와 주먹질을 하며 싸우는 바람에…….”
침울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송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연산댁 아주머니 눈에 들어 향덕원에 오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여기만큼 하인들에 처우가 좋은 곳도 별로 없거든요. 어찌 보면 궁녀보다 훨씬 낫지요. 저자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고, 사내 구경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눈이 맞으면 혼인도 할 수 있고.”
공기가 가볍게 흔들렸다. 송하가 “응?”하고 돌아보자, 가볍게 웃음을 흘리는 채선이 보였다. 내도록 시무룩한 얼굴만 보다 웃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보다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신이 난 송하가 어깨에 멘 보자기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언제든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저를 부르셔요!”
채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눈매를 접었다.
“에헤헤.”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던 송하가 마침 생각난 듯 “아!” 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날이 따스하니 후원을 거니시겠어요? 소화가 안 될 때는 걷는 것만큼 좋은 게 없죠. 게다가 지금쯤이면 봄꽃이 만발했을 거예요. 향덕원의 후원이 얼마나 아름답게요?”
그 말에 채선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채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세 의기양양해진 송하가 “저만 믿고 따라오셔요!”라며 앞장을 섰고, 채선은 조용한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그 사이에도 채선의 눈동자는 분주하게 주변을 훑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은 금세 난감한 빛을 띠었다.
담장이 꽤 높았다. 아무리 체력 좋은 그녀라도 단번에 뛰어넘기는 힘들 것 같았다.
담장 근처에 심어진 나무를 기어오르면 어찌어찌 넘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그녀의 처소 담장보다 저택의 외벽이 관건이었다.
하긴, 명색이 은원군의 저택인데 수월하게 넘을 수 있을 리는 없나.
채선이 실망한 기색으로 시선을 떨구는데 앞에서 걷던 송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처소를 반 바퀴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두 사람은 나무 문 앞에 서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여기가 후원입니다.”
송하가 닫힌 문을 밀었다. 잠겨 있지 않았던 것인지 나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쉽게 열렸다. 다음 순간, 채선의 두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