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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20)화 (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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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아버지. 사망. 글. 짧다.

    토닥토닥, 채선이 가만히 송하의 어깨를 다독였다. 

    “용서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런 것이지요?”

    송하가 다급하게 물었고,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시선을 든 채선이 연산댁을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자신은 괜찮다는 의미였다.

    얼마 전까지 채선은 송하와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녀는 평범한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었다. 높은 이들의 한 마디에 그들의 생사가 좌우된다는 것도. 

    비록 제가 그 높은 분이 될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그 자리가 영 불편하였지만, 그래도 저 때문에 한 사람이 생의 길로 갈 수 있다면 그보다 흡족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제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혹여나 불운을 맞닥뜨릴지도 모를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였다.

    “…….”

    또한, 송하라는 아이의 마음이 고마웠다. 말 못 하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제 주인에 비해 모자란다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곧 익제를 존경하고 경애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표현 방법이 잘못되었다고는 하나 그녀는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익제의 가솔이었다.

    채선과 눈이 마주친 연산댁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군대부인께서 용서하시겠다는데 제가 어찌 부인의 뜻을 꺾겠습니까.”

    군대부인.

    채선은 여전히 그 단어가 익숙하지 않았다. 

    외명부의 계급은 국태부인, 국대부인, 군대부인 순으로 나뉘었다. 현재 국태부인의 칭호를 받은 여인은 단 한 명으로 선 황후이자, 익제의 모친이었다. 

    황자의 정실부인은 국대부인으로 불렸고, 황자가 아닌 황족의 부인은 군대부인으로 불렸다. 그러니 채선은 외명부에서 세 번째로 높은, 까마득한 자리에 앉은 셈이었다. 

    그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어질어질,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연산댁의 말에 송하가 안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은 송하가 채선을 올려다보며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부인. 앞으로 뭐든 말씀만 하시면……!”

    “허나.”

    그때, 연산댁이 단호한 목소리로 송하의 말을 잘랐다. 채선과 연산댁을 번갈아 보던 송하의 얼굴이 대번에 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연산댁의 엄격한 시선은 송하가 아니라 채선을 향해 있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입니다. 부인께서는 좋은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었다고 하나, 기강이 해이해지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부인에 대한 모욕은 은원군에 대한 모욕임을 명심하시고 아랫것들에게 여지를 주지 마십시오.”

    “…….”

    채선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어미에게 꾸중을 들었을 때만큼이나 뜨끔하고 무서웠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거짓말이 언제 탄로 날까 걱정스러운데,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이쯤 되니 제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천만다행으로 여겨졌다. 최소한 말실수를 할 걱정은 덜었으니 말이다. 

    “일어나라.”

    한 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송하를 일으켜 세운 연산댁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채선에게 담담한 시선을 던졌다.

    “은원군께서 조식을 함께 하자고 청하셨습니다.” 

    “!”

    그 말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인가 할 것처럼 당혹스럽게 달싹이던 입술은 결국 아무 소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대로 닫혀 버렸다. 

    맙소사, 조식이라니! 

    이렇게 빨리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자신은 아직도 마구잡이로 엉킨 실타래를 정리하지 못했는데, 엉킨 실타래가 하나 더 생긴 기분이었다.

    “주인께서 곧 처소에 도착하실 터이니 서둘러 준비를 돕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연산댁이 채선의 침의를 벗겼다. 머릿속이 혼란한 와중에도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명확하게 빛을 발했다. 

    도망쳐야 해.

    그 사람을 내 운명에 끌어들여서는 안 돼. 절대로.

    ***

    “주인님께서는 이미 당도하여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밖에서 고하는 시비의 말에 연산댁이 채선을 돌아보았다. 그녀를 위에서 아래로 죽 훑어본 연산댁이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가시지요.” 하고 말했다. 

    그러고 나자, 어젯밤 혼자서 옷을 갈아입는 채선을 보며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놀라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채선은 어째서 익제가 그리 익숙하게 타인의 손길에 몸을 맡겼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익제가 아니었고, 황송한 대접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마다 묵직한 한숨이 짙은 발자국을 찍었다. 

    “들어가십시오.”

    문을 연 하인의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채선은 아무도 몰래 살짝 심호흡을 했다. 

    저 문 너머에 익제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혹은 탄로 날 거짓말에 대한 걱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어떤 감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드시지요.”

    문 앞에서 망설이는 채선을 연산댁이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무심코 오른발을 내밀었다. 연산댁과 송하는 반쯤 허리를 숙인 채 방문 앞에 머물러 있었다. 

    꿀꺽.

    채선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둥근 탁자에 앉아 있는 익제의 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익제가 채선을 발견하고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눈매가 굽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누가 봐도 부인에게 홀딱 빠진 팔불출 같은 모습이었다.

    꿀꺽.

    채선은 저도 모르게 또다시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와 채선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익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쿵.

    “아이구머니나! 이를 어째!”

    송하의 비명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

    “…….”

    짧은 침묵이 흘렀다. 

    “…….”

    “…….”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윽, 채선은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며 바닥에 처박힌 이마를 반쯤 들었다. 그녀의 눈매가 울 듯이 일그러졌다. 좋은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에 제 치맛자락을 밟고 거하게 넘어지는 모습이라니. 

    참을 새도 없이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내가 그렇지 뭐.

    채선은 애꿎은 치맛자락을 원망스레 흘겨보았다. 이제까지 그녀가 입었던 치마는 발목을 겨우 가리는 것들이었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해야 하는 평민에게 치렁치렁한 치마는 사치였다. 

    아무리 발끝을 모두 덮는 긴 치마가 익숙하지 않다고 해도 이리 성대하게 신고식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다.

    으으.

    세어 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넘어진 게 수백, 수천 번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만큼 부끄럽고 비참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괜찮으시오?”

    채선의 눈앞에 커다란 손이 들이 밀어졌다. 굳은살이 박인 거칠고 단단한 손이다. 채선은 그 손의 감촉을 알고 있었다. 

    손끝에서 손가락, 손바닥, 그리고 손목을 따라 차츰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익제의 얼굴이 보였다.

    채선은 그런 그를 생경하게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눈이 보이지 않을 때도 채선의 비명이 들리면 대번에 곁으로 다가오곤 했다. 차갑고 심술궂은 듯 보여도 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그녀의 기대가 싹을 틔웠던 모양이다.

    “울 정도로 아팠소?”

    익제가 숱 많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채선이 반사적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손가락 위에 묻어 나왔다. 

    익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의원을 부르는 편이 낫겠소?”

    절레절레.

    그제야 채선은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익제의 손을 잡았다. 그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줬고 채선이 넘어졌던 몸을 일으켰다. 

    “정말 괜찮소?”

    그의 물음에 채선은 시무룩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그러잡은 손을 끌고 터벅터벅, 식탁으로 걸어갔다. 

    “…….”

    그 순간.

    익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제 손을 잡은 채로 걸음을 옮기는 채선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떠오를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기시감이었다. 

    그가 채선의 손을 응시하며 깊게 맞잡으려 한 순간.

    “!”

    채선이 화들짝 놀란 듯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힐끔힐끔, 익제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겁을 먹은 듯한 그 태도에 그가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고꾸라진 부인이 걱정되어 한달음에 달려가 손을 내민 다정한 남편에게 고맙다고 절은 하지 못할망정 겁이 웬 말인가.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하녀의 말과 함께 진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빈주먹을 그러쥔 익제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어제는 시각이 늦어 처소로 돌아가느라 미처 묻지 못한 것이 있소.”

    “?”

    채선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무엇을 묻겠다는 것일까? 

    긴장된 동공이 파르라니 흔들렸다. 익제는 온전히 제가 담긴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잇새로 다정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혹, 글은 쓸 수 있소? 부인과 이야기 나눌 방도를 찾고 있는 중인데.”

    아.

    그제야 채선이 안도한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익제가 연산댁을 향해 “준비한 것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송하가 종종걸음을 치며 모습을 감췄다가 이내 연산댁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연산댁이 곁으로 다가왔다.

    “?”

    끔뻑끔뻑.

    채선의 의문을 읽은 듯 익제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숯과 종이요. 아랫사람들에게도 시킬 일이 있을 터, 그때마다 어찌 먹을 간단 말이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고안한 방법이니 마음 상해하지 마시오.”

    멍하니 입을 벌렸던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마음 상할 일이 무어 있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그의 배려에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

    숯에는 흰 천이 감겨 있었다. 손에 묻지 않도록 신경을 쓴 모양이었다. 머뭇머뭇, 손을 뻗어 숯을 쥔 채선이 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익제는 그녀를 재촉하지도, 닦달하지도 않았다. 힐끔, 채선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눈이 마주친 익제가 다정하게 입꼬리를 당겼다. 무표정한 얼굴이 금세 화사해졌다.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채선이 종이 귀퉁이에 짧은 글을 적었다.

    글쓰기를 끝내 놓고도 한참 동안 미적거리는 그녀의 행동에 익제가 고개를 쑥 빼고 거기에 적힌 글자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단 한 단어였다. 그게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그의 눈썹이 가볍게 휘어졌다.

    “부친에게 글을 배웠다는 뜻이오?”

    화들짝 놀란 채선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이 쓴 글을 봤다는 걸 깨달은 채선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한참 만에야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멈칫멈칫, 몇 글자를 더 적었다.

    스윽. 

    제가 쓴 글을 내미는 채선의 목덜미가 시뻘겋게 변했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저리 부끄러워하나, 익제의 의아한 시선이 종이를 향했다.

    「아버지. 사망. 글. 짧다.」 

    “아하.”

    뚫어지게 종이를 쳐다보던 익제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글을 미처 다 배우지 못했단 뜻인가 보오.”

    끄덕끄덕.

    “괘념치 마시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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