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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9)화 (1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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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채선을 다해야지.

‘고작 너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남자는 모르겠지만, 채선은 그 말에 구원을 받았다. 

그녀의 불운이 미치지 않는 사람.

그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위로였고 안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익제를 자신의 불운에 빠뜨리려 하고 있었다. 채선은 그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를 역신이 아니라 오롯이 채선으로 보아주는 사람을.

뒤늦은 후회가 발등을 찍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익제의 눈빛에 어떤 감정이 담길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차게 식었다.

어째서?

고작 며칠 밖에 함께 있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채선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어쩌면 그때 싹을 틔웠던 건 기대가 아니라 또 다른 감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더욱 익제를 자신의 불운한 운명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제 손으로 그가 자멸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채선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흠.”

익제는 가늘게 뜬 눈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채선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제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슬픈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비참함과 후회, 체념, 공포 같은 것들이 주먹만 한 얼굴 위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그가 손에 쥔 술잔으로 빙글빙글 허공을 저었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익제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 말을 하지 못하시오? 내 태부께 그런 언질은 들은 적 없소만.”

“!”

일순, 그녀의 눈이 커졌다. 동그란 눈동자가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익제는 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제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그녀가 두 눈을 질끈 감은 것이다.

불현듯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눈앞의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애통하고, 비통하고, 서글픈 표정으로.

아하.

“그리된 것이었군.”

익제가 나직한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는 커다란 죄를 지은 양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 부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비죽,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그래서.”

혼례식 내내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군.

그래서 태부가 먼 친척을 수양딸 삼아 내게 보낸 것이로군. 내가 거절할 수 없게끔 황제를 중매인으로 두고. 

나를 조롱하기 위해서.

“그래. 그렇게 된 것이로군.”

이제야 앞뒤 정황이 이해가 간다는 듯 익제의 입꼬리가 유쾌한 빛을 띠었다. 어쩐지 황제가 갑자기 중매인을 자처한다고 했다. 

그 뒤에 이런 꿍꿍이가 숨어 있었군.

차가운 눈으로 제 부인을 바라보던 익제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었다. 그의 잇새로 봄 햇살처럼 따사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아는데, 내가 그자의 뜻대로 움직여 줄 이유는 없지. 

“걱정 마시오. 그게 어디 부인의 잘못이겠소? 나도 한때 사고로 앞을 보지 못한 적이 있어 부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오. 내 그 사실을 몰랐다 하여 부인을 내치는 일은 없을 테니, 앞으로 서로 의지하며 다정하게 살아봅시다.”

“!”

번쩍, 채선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놀라움과 당혹감, 두려움이 깃들었다.

그 모습에 익제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당혹과 두려움이라니. 

문득, 한 여인이 떠올랐다. 

가볍게 던지는 말에도 금세 주눅이 들고 눈치를 살피며 겁을 집어먹는 여인이었다. 고작 눈 좀 안 보이는 게 무어 대수라고, 사람을 환자 취급하는 여인이었다. 조곤조곤 늘어놓는 말이 지루하지 않고, 매일같이 치는 사고가 지겹지 않은 여인이었다.

전소. 

그리고 행방불명.

익제는 길어지는 상념을 떨치려는 듯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잇새로 온화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 채 혼례식을 치르느라 피곤할 터이니, 나는 이만 내 침소로 돌아가 보겠소. 첫날밤을 부부가 함께 지내는 것이 마땅하나, 내가 곁에 있으면 부인이 편히 쉬지 못할 게 아니겠소?”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익제가 그윽한 음성으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우리 두 사람의 밤이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니고.”

“!”

덜컥, 채선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는 집요한 시선 앞에서 그녀는 마치 벌거벗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채선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속에서 확 하는 불길이 솟구쳤다.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목이 말랐다. 

그러나 마른침을 삼킬 수는 없었다. 그러는 순간, 제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속마음을.

“좋은 꿈 꾸시오.”

그 말을 끝으로 익제가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가 방을 나설 때까지도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문 앞에 선 익제가 힐긋, 시선을 던졌다. 닫히는 문 너머로 우울하게 침묵하는 정수리가 보였다.

“부인께서 피곤할 터이니 잠자리를 봐주어라.”

“예.”

“말을 하지 못하시니 너희들이 눈치 빠르게 부인의 마음을 읽고 재빨리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예.”

익제의 자상한 말에 시비들이 숨을 삼키며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곳을 지켜온 이들은 노련하게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하녀 몇 명이 방 안으로 들어갔고, 하인 몇 명이 익제의 뒤를 따라나섰다.

익제가 혼자 가겠다는 듯 손짓으로 그들을 물리고는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질렀다. 어둠에 잠긴 뜰에 내려서는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다정한 빛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얼음장처럼 싸늘한 표정이 내려앉았다.

익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부인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하, 태부. 이 졸렬한 인간 같으니라고.”

그의 차가운 혼잣말이 미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앞뜰을 배회했다.

***

도망치자.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남자를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끌어들일 수 없다면, 이선의 곁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면, 이대로 도망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 살아가자.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오로지 혼자서.

불현듯, 채선의 눈동자가 서글픈 빛을 띠었다. 더 이상 이선과 익제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또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이 못내 슬펐다. 

“흉인의 별이라…….”

그래서 제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는 모양이다, 라고 생각하며 채선은 쓴 한숨을 삼켰다. 나무를 하러 갔던 아비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도, 홀로 자식을 돌보던 어미가 폐병을 얻은 것도 모두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채선답게, 채선을 다해야지.”

다음 순간, 채선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언제까지고 울상만 짓고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흉인의 별이 제 운명이라면, 제 손으로 그 운명을 깨 보일 것이다. 갈기갈기 찢어 시궁창에 처박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누구도 불행하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천천히 고개를 든 채선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정안궁에 있을 때는 차마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광무대군에게 필요한 말이었고, 사방에서 그녀를 감시하는 눈들이 번득였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고, 숨 돌릴 틈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한 번쯤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 여종들이라면 쉽게 따돌릴 자신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약초를 캐느라 산속을 누빈 덕에 다른 건 몰라도 체력만큼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기침하셨습니까?”

채선이 비장한 표정으로 결의를 다지는데 문밖에서 나이 지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심코 대답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채선이 합, 하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잠시 방 안의 기척을 살피는 듯하던 여인이 다시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문을 열겠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하녀가 곧장 침상으로 걸어왔다. 귀밑머리가 희끗한 여인은 채선의 어미보다 나이가 많은 듯 보였다. 그녀의 등 뒤에는 채선보다 대여섯 살 어린 시비가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간밤에는 편히 주무셨습니까? 잠자리가 낯설어 잠을 설치지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나이 든 여인의 말에 채선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두 여인의 얼굴이 낯익었다. 어젯밤에 그녀의 잠자리를 보아주었던 이들이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나이 많은 쪽은 연산댁이고, 어린 쪽은 송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여도 자신이 그들의 이름을 부를 일은 없을 테지만.

쓴웃음을 짓던 채선이 무심코 고개를 들다 송하와 눈이 마주쳤다. 두 눈을 부루퉁하게 뜬 송하는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연신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연산댁이 그런 송하를 눈으로 나무랐다. 

송하가 채선을 힐긋거리며 부루퉁하게 중얼거렸다.

“우리 주인님이 뭐가 모자르셔서, 하필이면 말 못 하는 부인을…….”

“닥치지 못하겠느냐!” 

대번에 연산댁의 호통이 날아왔다. 그녀는 송곳 같은 시선으로 송하를 노려보았다. 송하가 아랫입술을 툭 내민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아주머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주인님을 업어 키우셨잖아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입을 모아…….”

“네가 정녕 이 집에서 쫓겨나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잘못하였습니다.”

송하가 눈을 내리깔며 사과했다. 전혀 잘못한 것 같지 않은 목소리였다. 

송하는 속에 있는 말을 모두 내뱉은 덕분인지 일견 시원해 보이기까지 했다. 또다시 채선과 눈이 마주친 송하가 입술을 삐죽이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연산댁이 그녀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주인을 깔보는 시종은 이곳에 필요 없다. 너는 지금 즉시 짐을 싸서 네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아주머니!”

송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쫓겨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린 송하의 얼굴이 더럭, 겁에 질렸다. 그녀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송하가 연산댁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제가 돌아가면 저희 동생들은 어쩝니까? 여섯 동생이 저 하나만 믿고 있는데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겠습니다!”

“네가 사죄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느냐.”

연산댁의 말에 “흡!” 하고 고개를 든 송하가 무릎걸음으로 기어 채선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채선의 치맛자락을 붙들고는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실룩거리는 입매가 금방이라도 대성통곡을 할 것 같았다.

“제가 정말로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두 번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려요. 제가 이렇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겠습니다. 예, 군대부인?”

송하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통통한 뺨 위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멀거니 내려다보던 채선이 문득 손을 뻗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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