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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8)화 (1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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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스스로를
익제라 부르던 남자.

“나도 광무대군의 생각을 모두 알지는 못해.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실 만큼 신중한 성격이시니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뜻이 아니실까? 이곳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인 세계니까.”

“광무대군께서는 그들을 모두……?”

죽이실 생각이냐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잘 벼린 칼날 같은 그의 욕망이 손에 잡힐 듯 선연했다. 형제와 사촌을 모두 죽이고 끝내 황위를 거머쥐겠다는 사나운 욕심.

이선은 하얗게 질린 채선의 얼굴만 보고 그녀의 의중을 짐작했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입을 열었다.

“채선아. 그분께서 황제가 되시면 나는…….”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이선이 그 어느 때보다 해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고 생각한 순간, 상냥한 음성은 이미 채선의 귓가에 내려앉아 있었다.

“황후가 되는 거야.”

“……언니.”

채선은 그녀가 무서웠다. 

황후. 

그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손이 덜덜 떨렸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광무대군에게는 이미 한 손가락으로 꼽지도 못할 만큼 많은 부인이 있었다. 그런데 이선은 황후가 되겠다고 했다.

“어, 어떻게 언니가 황후가 된다는 거야……?”

그 많은 부인을 제치고, 라는 말은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이선이 가느다란 눈썹을 휘었다.

“그 옛날, 평민이었던 윤씨 부인도 국대부인의 자리에까지 올랐어. 가장 힘없는 후궁의 궁녀로 들어와 그녀가 모시던 후궁을 귀비로 만들었지. 황자를 낳은 황귀비 말이야. 그 공을 인정받아 작위와 땅을 하사받고, 황귀비의 오라비인 대장군과 혼인까지 하였지.”

윤씨 부인, 서희.

표정을 잃은 얼굴로 멍하니 있는 채선을 향해 이선이 조용히 속삭였다. 예전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걱정하지 마, 채선아. 일이 끝나면 너를 다시 내 곁으로 부를 테니까. 그때쯤이면 너 하나 지킬 힘 정도는 생길 거야. 그럼 우리,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채선은 참담한 심정을 삼키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 잘못도 없이 자신의 불행한 운명에 엮이게 된 이를 어찌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란 말인가. 

“신부가 부끄러움이 많은가 봐. 어찌 혼례식이 다 끝나가도록 고개 한 번을 안 들어?”

“그러게 말이야.”

“신랑의 잘생긴 얼굴이 궁금하지도 않나?”

나이 든 여인들이 수다가 채선의 상념을 흐트러뜨렸다. 

“설마 혼인하기 싫은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깨춤을 춰도 모자란 판에 저리 죽상을 하고 있을 수 있나?”

“누가 아니라나. 나 같으면 뚫어지도록 신랑 얼굴만 쳐다보겠구먼. 저 얼굴을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겠어.”

그제야 채선은 주춤주춤, 발끝에 머물러 있던 시선을 뗐다. 

그들의 말처럼 기나긴 혼례는 어느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음식을 데우는지 진한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오랜 머뭇거림 끝에 채선은 시선을 살짝 들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헤매던 눈동자가 마침내 맞은편에 선 신랑을 향했다. 행여 저로 인해 신랑이 욕을 먹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

채선의 숨이 멎었다. 

아니, 어쩌면 시간이 멈춘 것인지도 모른다.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차츰 멀어지더니, 시야를 가득 채우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 고요하고 적막한 그곳에 남은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푸른 옷을 입은,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는 한 남자가 채선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채선은 두 눈을 홉뜬 채 그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웃는 얼굴로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던 신랑이 채선의 시선을 눈치챈 듯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남자와 채선의 눈이 마주쳤다. 

“…….”

그가 다시 한번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신부를 향해 춘풍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다정한 남편의 얼굴이었다.

맙소사.

채선은 숨을 멈춘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등 뒤의 하녀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채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도망이라도 치듯, 채선은 또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남자가 두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익숙한 표정이다. 채선의 심장이 더럭 내려앉았다. 참았던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그곳에 그가 있었다.

스스로를 익제라 부르던 남자.

그 남자가 푸른 옷을 입고 자신의 신부, 채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채선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다정한 얼굴로. 

맙소사, 은원군이라니.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가 그리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었다. 익제는 채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다.

안 돼. 

그리고 그녀는 그를 파멸로 이끌어야만 했다.

‘고작 너 따위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몸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만한 말로 자신을 구원해 준 남자를.

“곧 끝날 겝니다. 힘드셔도 조금만 참으셔요.”

등 뒤의 하녀가 채선의 한 팔을 붙들었다. 채선은 더 이상 물러서지 못한 채 파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린 익제가 마침 연주를 끝낸 악동들에게 수고했다는 듯 온화한 미소를 건넸다.

다행이다.

불현듯, 그 생각이 들었다. 경악스럽고 두려운 와중에도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나으셨구나. 이제는 눈이 보이시는구나. 참으로 잘되었어.

꾹 다문 채선의 입매가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주변을 훑다가 다시 돌아온 익제의 시선이 별안간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파르르 떨리는 채선의 입매를 지그시 쳐다보던 그가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밀어 올렸다. 그러다 채선과 눈이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다정한 웃음을 흘렸다.

“어쩜, 살갑기도 하시지. 처음 보는 색시를 오랜 정인 보듯 하시는구먼.”

“눈에서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네. 앞으로 신부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실지……. 아이고, 부러워서 못 살겠네.”

농담 반, 진담 반 섞인 아낙들의 수다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그와 동시에 어떤 깨달음 하나가 그녀의 뇌리를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 

앞을 볼 수 있는 남자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신부가 채선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

꿀꺽.

채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마치 천둥처럼 울렸다. 지레 놀란 채선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캄캄한 밤, 촛불이 일렁이는 방안은 태초의 혼돈처럼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일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채선이 슬그머니 곁눈질했다.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술잔을 기울이는 익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곳에는 익제와 채선,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서로의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사방이 적막했다. 닫힌 창문이 이따금씩 덜컹거렸고, 간간이 소쩍새 울음소리가 날아들긴 했지만, 채선은 방안의 침묵이 숨 막힐 정도로 고요하다고 생각했다. 

익제의 매끄러운 입매를 더듬는 그녀의 시선이 마치 낯선 것을 보듯 생경한 빛을 띠었다. 한쪽이 비틀어진, 반쪽짜리 미소만 봤던 터라 그의 온전한 웃음 앞에서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 빙글빙글, 술잔을 돌리는 익제를 보며 채선은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

‘넌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그저 은원군의 곁에 머무르기만 하면 돼. 그럼 그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걷게 될 테니까. 그게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자의 운명이란다.’

불현듯, 이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불행으로 끌어들인다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 채선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떠안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은 얼굴도 모르는 은원군보다 자신의 동기인 이선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인을 하여도 은원군에게는 마음을 내어주지 말자, 은원군의 마음도 가져가지 말자, 모질게 다짐을 했었다. 

그런데 그 은원군이 익제라니, 이런 운명의 장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차라리 언니한테 못하겠다고 말할 걸 그랬어.

“…….”

채선의 눈매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자신의 불운한 삶에 끌려온 사람이 익제라는 이유만으로 채선은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몹시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채선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모든 건 인과응보, 그녀가 뿌린 씨앗이었다.

흘깃, 눈동자만 들어 채선을 응시한 익제가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태부 어르신의 먼 친척이라 하였소?”

“…….”

채선은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녹록지 않은 남자였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순식간에 집 구조를 파악했고, 돌멩이 하나로 나는 새를 떨어뜨렸다. 

그러니 채선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녀가 산중에 살던 말만 한 처녀임을 단박에 기억해낼 것이다.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까. 그리고 혼인은 없던 일로 해 달라고, 혹 산중에서의 일을 은혜로 여기신다면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울며 빌까. 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게 내 죄를 더는 길은 아닐까.

제 발치를 내려다보는 채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빌자.

채선이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듯 붉은 치마를 움켜쥘 때였다. 익제의 온화한 목소리가 탁자를 건너왔다.

“폐하를 중매인으로 삼아 나와 혼인을 시킬 정도면 부인을 참 많이 아끼셨나 보오, 태부께서.”

“!”

일순, 채선은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동그란 눈동자에 익제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그는 혼례식에서 그랬던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눈앞의 신부가 어여쁘고 아까워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

아.

그러나 채선은 그 다정함 속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가시를 눈치챘다. 동시에 그것이 진심 한 조각 담기지 않은 달콤한 가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그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태부의 의중을 의심하고, 그의 수양딸이라는 여인을 가늠하고 있었다. 

익제는 머지않아 태부의 속내를, 나아가 광무대군의 속셈을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광무대군의 장기 말이 되었다는 것도.

채선이 비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익제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허나, 부인께서는 실권 하나 없는 허수아비 같은 황족을 남편으로 맞게 된 게 영 석연치 않은 모양이오. 혼례식부터 지금까지 줄곧 울 것 같은 얼굴이니 말이오.”

“…….”

그 말에 채선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그것을 눌러 삼켰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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