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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7)화 (17/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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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현 황제 폐하의 조카이신
    은원군.

    “그런 내가 쓰임새를 다하면? 그땐 어떻게 될까? 내게는 나를 지켜줄 든든한 가문도, 차고 넘치는 재력도 없는데 말이야. 다른 부인들에 비해 배움도 짧아서 그들이 주고받는 말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해. 그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없단다. 그러니 광무대군께서 내게 가지고 있는 건 찰나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지. 점술가의 예언이 맞을까, 내가 그분에게 얼마나 큰 행운을 가져다줄까 하는 호기심.”

    “하지만!”

    “그러니까 나 역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비장의 패를 쥐어야 해, 채선아. 그리고 그 비장의 패가 바로 너야. 네가 아니면 난 반쪽짜리 패에 불과해.”

    채선의 얼굴이 대번에 울 듯이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그녀가 이선의 손을 잡았다. 채선이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그러지 말고 그냥 나랑 같이 가자. 우리 둘이라면…….”

    “있어야 해.” 

    “…….”

    “채선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야.”

    채선이 저도 모르게 잡았던 손을 떨구었다. 이선의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 확고했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삶을 살 마음이 없었다. 

    채선의 시선이 멈칫멈칫, 아래로 이동했다. 하얗고 고운 손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채선은 방금 전 마주 잡은 이선의 손가락이 더없이 부드러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채선이 한 풀 누그러진,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광무대군의 정적이라며?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이라면 분명 고관대작일 텐데 내가 감히 어떻게 그분과 혼인을 하겠어? 그러니까 아무리 언니 생각이 그렇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너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중매자가 특별하거든.”

    “특, 별?”

    왠지 모를 불길함에 채선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선이 살포시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폐하께서 네 중매인이 되실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채선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무서웠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거대한 음모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공포에 빠뜨렸다. 아무리 발버둥을 쳤다 광무대군이 쳐놓은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니, 아무리 폐하의 명이라도 나처럼 하찮은…….”

    “태부께서 너를 양녀로 들이실 거야.”

    “…….”

    “채선아?”

    “하, 하하.”

    채선은 그제야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작 장기 말 하나에 불과했고, 그녀의 의지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채선의 잇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끝내 이선의 부탁을 모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이자,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이선이 우는 얼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채선이 체념한 듯 두 눈을 감았고 이선이 그런 그녀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채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선은 그녀의 잇새로 흘러나올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선의 입매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고마워, 채선아. 네가 나를 도와줄 줄 알았어.”

    ***

    “말씀은 잘 끝나셨습니까?”

    복도를 가로지르던 이선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생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가 보였다. 이선은 눈짓만으로 하녀들을 물렸다. 

    불현듯,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러니 당신과 나는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신은 광무대군의 귀인이자, 나의 귀인이지요. 당신이 광무대군을 행운으로 이끌수록 나에 대한 광무대군의 신임은 두터워질 것이고, 당신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광무대군께 데려갈 터이니 당신은 나를 권력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한배를 탔다, 그 말을 조용히 되뇌던 이선이 매혹적인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달지가 성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부인께 여동생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애먼 곳을 뒤지느라 헛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참 이상하지요? 두 번이나 그 집에 갔는데 여동생을 보지 못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일이 그렇게 되었군요.”

    이선이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한낱 점술가보다야 광무대군의 부인이 더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녀는 늘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태생이 미천했고, 그녀를 지켜줄 든든한 가문조차 없었다. 이럴 때는 몸을 낮추는 게 상책이었다.

    게다가 사내는 직책과 상관없이 현재 광무대군이 가장 신임하는 자였다. 매일 밤, 광무대군이 그에게 침수에 들 처소를 점치게 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자가 없는 이야기였다.

    혹자는 그가 세 치 혀로 광무대군을 현혹시킨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이선은 달랐다.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달지였고, 광무대군이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도 결국은 달지 덕분이었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장기판 위의 말로 쓴다면, 그녀 역시 그를 장기 말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이 탄 배는 각자의 동상이몽 속에서 닻을 올렸다.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배를 되돌릴 방도는 없었다. 

    “흐음.”

    달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습관처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것은 갈색 나무 천장뿐이었다.

    “하필 이때 숨어 있던 흉인의 별이 밤하늘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 아무리 뒤져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는데 부인의 여동생이 보낸 전갈이 도착한 것, 우연찮게 그 자리에 제가 있었던 것……. 이 또한 모두 운명이겠지요.”

    “운명.”

    이선은 달지가 한 말을 입속에서 조그맣게 되뇌어 보았다. 조금 전, 자신의 운명에 절망하던 채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달아날 수 없는 덫, 운명.

    그렇다면 그곳을 자신의 낙원으로 만들리라. 

    “부인에 대한 광무대군의 기대가 크십니다.”

    달지에 말에 상념을 떨친 이선이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습니까?”

    “최근 하시는 일이 술술 풀리시는 모양입니다. 이게 다 부인 덕분이 아니겠느냐며 흡족해하시더군요.”

    “그렇습니까?”

    “딱 하나.”

    달지가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추었다. 이선의 눈길이 그의 뾰족한 입술에 꽂혔다. 씨익, 입꼬리를 당긴 달지가 생쥐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교활하고, 또 한편으로 영리한.

    그가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자가 살아 돌아온 것만 빼면 말입니다.”

    “아.”

    “섬뜩하지요. 죽었다고 생각한 자가 멀쩡히 살아 돌아왔으니, 그가 광무대군의 가장 큰 적이 될 거라는 예언이 새삼 걱정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부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꼭 그 자에게 흉인의 별을 보내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예.”

    이선이 살짝 눈을 내리뜨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던 달지가 용건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 등을 돌렸다. 

    그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이선이 천천히 눈을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달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그녀가 조용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러나 있던 하녀가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뒤를 따랐다.

    ***

    제 발치만 내려다보는 채선의 시야에 붉은 치맛자락이 너울거렸다. 자신은 평생 입어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옷이었다. 

    비단옷은 부드럽게 그녀의 몸에 감기며 화려하고 부드러운 광택을 드러냈다. 그러나 채선은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개명과 양녀 입적, 그리고 혼례 준비까지. 그녀를 둘러싼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신을 못 차리고 어영부영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채선이 한 일이라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밖에 없었다. 가라면 가고, 입으라면 입고, 먹으라면 먹고.

    그녀는 오늘까지 제 양아버지라는 태부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채선은 그가 몹시 아끼는 수양딸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서 자신의 혼례를 치러야 했다. 

    혼례식.

    그 말을 떠올린 채선은 저도 모르게 큰 숨을 들이켰다. 가슴이 답답했다.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크게 심호흡을 해도 가슴에 얹힌 납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광무대군이 벌인 일을 되돌릴 만한 힘이 없었다. 도망갈 곳 또한 없었다. 그곳은 막다른 길이었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체념뿐이었다.

    채선은 혼례식 내내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악공들이 자아내는 음률이 하늘 높이 울려 퍼졌고, 구름떼같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지만, 어쩐지 모두 남의 일인 것만 같았다. 

    은원군.

    이선으로부터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의 놀라움과 당혹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채선의 남편이 될 사람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전 황제의 유일한 아들이자 현 황제의 조카. 

    “정말 늠름하시지.”

    “헌헌장부가 따로 없으셔.”

    “여태 부인 한 명 안 들이시더니 결국 혼인을 하시네.”

    “폐하께서 직접 하명을 하셨다잖아. 폐하께서도 혼인이 늦는 조카가 오죽 걱정되시면 그리하셨겠어?”

    “하긴. 남들 같으면 혼인해서 자식이…… 어머, 저 웃는 모습 좀 봐. 어쩜 저리 인물이 훤하실까.”

    “하인들한테도 그렇게 다정하시다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채선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다정한 헌헌장부, 그렇게 좋은 사람을 자신의 운명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죄스러웠다.

    ‘그래. 선황 폐하의 유일한 핏줄이자, 현 황제 폐하의 조카이신 은원군.’

    이선의 목소리가 또다시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가 얼어 있는 채선을 향했다.

    “선황께서는 태자 시절부터 유약하셨고, 잔병치레가 끊이질 않으셨지.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기 전에 명을 달리 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예상을 깨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어.”

    “언니, 누가 듣겠어.”

    채선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이선은 태연자약했다. 방 밖의 그림자들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어. 대전에 나와 정무를 보시는 날보다 병석에 누워 지내시는 날이 더 많았고, 나중에는 선황 폐하의 아우이자 현 황제 폐하이신 인평왕께서 정무를 대신 보기 시작했지. 선황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어린 아들을 대신해 인평왕에게 황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셨고 말이야.”

    채선은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에 딱딱한 얼굴로 연신 마른침만 삼켰다. 이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현 황제 폐하께서 슬하에 여덟 명의 아들을 두셨는데, 굳이 조카에게 황위를 물려주실 리는 없을 테고.”

    이선이 빙긋, 입꼬리를 당겼다. 채선은 낯선 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는 누구일까.

    “폐하께서도 장자가 아니신데 결국 황위에 앉으셨듯이 여덟 명의 아들 중 누가 옥좌에 앉느냐는 것은 끝까지 두고 봐야 알 일 아니겠니?”

    “언니…….”

    채선이 말끝을 흐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누군가 차가운 손으로 뒷덜미를 움켜쥔 것처럼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선득해졌다. 

    “언니 말 대로라면 은원군께서는 이미 황위에서 멀어진 것 같은데 굳이…….”

    “글쎄.”

    이선이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다 채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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