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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6)화 (16/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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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귀인의 별과 흉인의 별?

노련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익제의 속내를 파악하는데 능숙한 한 가령이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반문한 백발의 노인을 보며 익제가 낮게 혀를 찼다.

“무슨 말이든 해보란 말이다.”

“예.”

여전히 영문 모를 요구였지만 한 가령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글주글, 주름진 그의 입술 사이로 노쇠하지만 송곳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폐하께서 입궁을 명하신 연유는 알지 못하나, 물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8황자이신 안명대군께서 명을 달리하신 것이야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탓이려니 하겠지만, 몇 달 전 4황자 조이대군께서 낙마하여 사망하신 것, 수족이나 다름없던 효명이 주군을 공격한 것까지. 폐하께서 태자 전하께 양위하시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신 이후로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늙은이의 기우라면 좋겠…….”

“되었다.”

줄줄 이어지는 한 가령의 잔소리에 익제가 성가신 표정으로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시끄럽군.”

“…….”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익제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허공을 응시했다. 문득, 그가 나직한 혼잣말을 읊조렸다.

“좀 더……가 좋은데 말이다.”

그가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한 가령은 얌전히 침묵했다. 그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한 가령은 노련한 가신답게 자신의 의문을 드러내지 않았다.

***

“뭐라고?”

채선은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며 이선을 바라보았다. 

일 년 만에 보는 그녀는 이미 채선이 알고 있던, 장난기 가득한 이선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비단옷에 익숙했고, 화려한 방 안 풍경에도 주눅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방의 주인인 양 고고해 보였다. 

가시방석에 앉아 전전긍긍하는 것은 오로지 채선, 그녀 하나뿐이었다. 

힐끔.

채선은 이선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값비싼 도자기에 시선을 던졌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그녀의 목숨값보다 비싼 도자기일 것이다. 

그것이 놓인 문갑은 또 어떠한가. 희미한 광택이 도는 가구는 별다른 장식이 없었지만, 섬세한 세공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가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 광무대군의 집, 정안궁. 

그곳은 담장 밖에서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웅장하고 화려했다. 눈 닿는 곳마다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고, 심지어는 창살의 문양조차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 속에서 이선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연신 엉덩이를 들썩이는 채선과 달리 그녀의 자태는 우아하고 여유로웠다. 

채선은 문밖에 어른거리는 하녀들의 그림자를 힐긋거리다가 도로 이선에게 시선을 주었다. 일순, 그녀와 이선의 눈이 마주쳤다. 이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채선은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고 방금 전 이선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갑자기 이상한 말을 들어서 헷갈리는데, 그러니까 언니 말은…….”

이선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녀는 채선이 자신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채선은 운이 나쁠지언정 멍청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의 동생은 누구보다 영리하고 총명했다. 다만 자신의 잇속을 챙기지 않는 탓에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귀인의 별과 흉인의 별?”

“응.”

채선이 미심쩍은 듯 되물었고 이선이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이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그러니까 언니는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덕분에 남들보다 운이 좋은 거고, 나는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탓에 남들보다 운이 나쁘단 말이야? 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라고?”

“응.”

이선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수정이 흔들리며 차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잠시 보랏빛 수정에 시선을 빼앗겼던 채선이 다시금 이선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여태까지 운이 나빴던 게,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싫어했던 게 그냥 그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곁에 있는 사람을 내 불운에 빠뜨리면서? 말도 안 돼. 그런 게 운명이라니……. 아니, 그보다!”

말을 할수록 화가 나는지 채선의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려는 듯 그녀가 잠깐 말을 멈추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선은 잠자코 채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 모습은 이제껏 채선이 알고 있던 이선과 다름없었다. 

그녀와 다른 세상에 사는 이선이 아니라 그녀의 분신과도 같은, 채선이 사랑하는 바로 그 이선이었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녀를 꺼려 할 때도 이선만큼은 그녀의 기쁨에, 슬픔에, 분노에, 억울함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조금씩 누그러지던 채선의 눈매가 또다시 일그러졌다. 흡, 숨을 들이켠 그녀가 빠르게 속삭였다.

“나보고 혼인을 하라고?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단지 그의 인생을 불운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 위해서?”

“불운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다니. 듣기 거북하구나, 채선아.”

낯선 이선의 말투에 움찔하던 채선이 금세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게 그 말이잖아! 장차 광무대군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에게 시집을 가라며? 그래서 그자를 파멸로 이끌라며! 그럼 내가 옳다구나, 하면서 그 자에게 시집을 갈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 운명 따위 개나 주라고 해!” 

날 선 목소리는 흡사 절규와도 같았다. 슬픔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내게 불운한 일이 생길 때마다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언니도 알잖아. ‘세상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단다. 지금의 이 불운이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 그러니 너는 우울해하지 말고, 매사 채선답게 최선을 다하면 된단다. 채선을 다해라.’라고 말이야.”

“채선아.”

이선이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선은 고요한 시선으로 채선을 응시했다. 반쯤은 화가 나 보이고, 또 반쯤은 슬퍼 보이는 자신의 동생을. 

한날한시에 한배에서 나왔다지만, 채선과 그녀는 모든 면에서 상반되었다. 

이선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거짓 웃음을 지을 수도 있었고, 거짓 아양을 떨 수도 있었으며, 거짓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채선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고지식했고, 또한 지나치게 선량했다. 동네 사람들이 아무리 못되게 굴어도 채선은 늘 시무룩하게 울상을 지을 뿐 단 한 번도 그들을 욕하거나 저주한 적이 없었다.

이선의 고운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녀가 한 손을 뻗어 채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화난 동생을 달랠 때면 언제나 그러하듯.

채선의 동그란 눈매가 아래로 처졌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선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위협적인 존재라기보다는…… 그냥 좀 신경이 쓰이는 존재라고 하자. 광무대군께서 신뢰하는 점술가가 그를 두고 지금은 볼품없는 사내지만, 후에 광무대군의 가장 큰 적이 될 거라고 예언했거든. 굳이 말하자면, 그래, 유비무환 정도가 좋겠구나. 광무대군께서 저리 대범해 보이셔도 실은 예민하고 잔걱정이 많으신 성격이란다.”

“안 해. 그로 인해 어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해도 난 안 할 거야. 흉인의 별? 곁에 있는 사람을 불행에 빠뜨린다고? 언니 말이 모두 맞다고 쳐.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처럼 혼자서 살아갈 거야. 누구와도 엮이지 않고 나 혼자서. 돌아갈래. 아니, 돌려보내 줘, 언니.”

채선이 울상을 지으며 이선을 올려다봤다. 이선이 그런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이선의 입술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돌아갈 곳은 없단다, 채선아.”

“……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채선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선이 가여운 아이를 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살던 그 집은 깡그리 불에 타 버렸거든. 남은 건 잿더미뿐이야.”

“언니!”

채선이 경악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이선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채선의 흔들리는 동공을 마주 보았다.

“그러니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말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언니가……!”

“채선아.”

“다른 곳도 아니고, 어떻게 우리 집을!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집을! 아부지가 손수 지은 그 집을!”

“채선아.”

비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다르다고 해도 두 사람은 쌍둥이였다. 세상 누구보다 가까웠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이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채선이었고, 채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선이었다.

이선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고, 눈가에는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혔다. 이선의 목소리가 연약한 빛을 띠었다.

“도와줘, 채선아.”

“뭐, 뭘?”

채선이 당황한 눈으로 이선을 쳐다보았다. 이선이 손을 뻗어 채선의 손등을 감쌌다. 그녀의 뺨 위로 구슬처럼 영롱한 눈물 한줄기가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채선은 이선에게 잡힌 손을 마주 잡지도,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못한 채 두 눈만 깜빡였다.

이선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젖어 들었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건 내 미모가 광무대군의 귀에 들어가서도, 광무대군께서 나를 마음에 품어서도 아니야. 단지…… 내가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야. 광무대군께서는 나를 곁에 두면 언젠가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믿으신단다.”

“!”

일순, 채선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채선의 잇새로 새어 나오는 것은 색색, 바람이 빠지는 숨소리뿐이었다. 그만큼 이선의 말은 놀랍고 무서운 것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켠 채선이 마침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황제! 하지만 광무대군께서는 폐하의 여섯 번째 아들이신데! 태자 전하께서 버젓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광무대군이……!”

하지만 정작 파문을 던진 장본인은 그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선의 목소리가 의미심장했다.

“꼭 태자 전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란 법은 없지. 살아남는 자가 황제가 되는 거란다. 이곳은 그런 곳이야, 채선아.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등에 칼을 꽂는 세계.”

흠칫. 

채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 순간, 불쑥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등에 칼이 꽂힌 남자, 앞을 볼 수 없음에도 한 치의 망설임이 없던 남자, 고약한 말을 서슴지 않던 남자, 입매를 비틀면서 웃던 남자. 

데리러 올 테니 기다리고 말하던 남자. 

“…….”

채선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선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채선에 대해서라면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했던 이선은 지금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가볍게 머리를 턴 채선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정안궁에 들어온 계기야 어떻든, 지금 광무대군의 총애를 받고 있는 건 언니잖아. 그 소문이 내 귀에까지 들리는 걸 보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내 입지가 위태로워.”

“……응?”

“손바닥만 한 작은 마을, 산중에 숨어 살던 내가 예뻐 봤자 얼마나 예뻐서 광무대군의 눈에 들었겠니? 이곳에는 나보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고귀한 여인들이 발에 채도록 많단다. 난 단지 광무대군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인형에 불과해, 채선아.”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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