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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5)화 (1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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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데리러 왔어, 채선아.

무심코 대꾸하며 뒤돌아서던 채선이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툇마루뿐이었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리던 남자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채선의 눈동자가 겸연쩍은 빛을 띠었다. 

“이쯤 되면 병인가?”

익제와 함께 지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이레 남짓. 그중 이틀은 정신을 잃은 채 앓기만 하였으니, 따지고 보면 닷새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남자가 산을 내려간 지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사나운 태풍처럼 채선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던 남자는 아마도 지금쯤 산중에 사는 말만 한 처녀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렸을 터였다. 

채선은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미련스럽게 한 줌의 기대를 품었다. 그녀의 안에서 싹을 틔운 ‘기대’는 몇 번, 혹은 몇십 번의 절망을 거듭해야만 비로소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채선은 기대가 꺾이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고요한 대문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머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응?”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채선은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에 속아 길모퉁이까지 달려갔던 것이 여러 번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짓궂은 장난에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녀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

그러나 다음 순간, 채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 이 길이 맞는지 외쳐 묻는 소리. 

선명한 인기척이었다. 

최소한 여남은 명은 넘는 사람들의 소리.

“아……!” 

별안간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날뛰기 시작했다. 꿀꺽, 목울대가 울렸다. 갈증이 났다. 뺨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했다. 조금씩 시들던 기대가 다시금 싹을 틔우는 게 느껴졌다.

그 사이, 사람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채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채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거친 호흡 소리가 느껴졌다. 

채선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녀가 초조한 시선으로 길모퉁이를 바라보았다. 숨도 크게 쉬지 않았고,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우거진 나뭇잎이 흔들리며 그 사이로 말 한 마리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어?”

흑마는 아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갈색 말이었다. 그 위에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채선은 두 눈을 깜빡이며 제게 다가오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익제가 보낸 사람일까?

채선이 의아함 아래 반가움을 숨기고서 그를 향해 한 발 내딛는 순간.

“!”

갈색 말 뒤로 화려한 가마가 나타났다.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가마였다. 호위무사가 가마를 에워쌌고, 하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 

채선은 살짝 뗐던 걸음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다가오는 가마를 지켜보았다. 마당 안으로 들어온 가마가 이윽고 땅에 내려앉았다. 몸이 빠른 하인이 문을 열었고, 젊은 하녀가 그 옆에 섰다. 

개나리색 치맛자락이 채선의 시야를 온통 노랗게 물들였다. 붉은색 비단 신이 살포시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한 송이 꽃 같은 여인이 가마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흙에 발을 딛고 선 여인은 감회에 젖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낮은 담과 옹색한 집, 지붕 위로 삐죽 튀어나온 나무들, 그리고 산도라지가 심겨 있는 텃밭까지.

느리게 움직이던 시선이 마침내 채선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일순, 봄꽃이 핀 것처럼 주변이 화사해졌다. 부드럽게 올라간 여인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고, 꿈에도 잊은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데리러 왔어, 채선아.” 

채선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그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한참 후에야 채선의 입술이 열렸다. 그 사이로 망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언……니.”

이선이 조금 더 진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이선이 채선에게로 한 발을 내디디며 한 손을 내밀었다. 채선은 제게 내밀어진 하얗고 고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의원이 긴장된 손길로 붕대의 끄트머리를 풀었다.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크음.”

화들짝 놀란 그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정작 환자는 평연한데 의원 혼자 마음을 졸이는 꼴이 우습기는 했지만, 어디 이게 보통 일이던가.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의원이 비장한 표정으로 붕대를 풀었다. 한 겹, 한 겹, 익제의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가 얇아졌고, 마침내 짙은 눈썹과 기름한 눈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익제는 마치 선잠이라도 자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의원의 잇새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처, 천천히 눈을 떠 보십시오.”

익제의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눈꺼풀이 벌어졌다. 칠흑 같은, 밤보다 짙고 어둠보다 깊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는 초점을 잡으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허공을 응시했다.

“어떠십니까? 앞이…… 앞이 보이십니까?”

의원이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빈혈이라도 일으킬 듯, 그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익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의원은 연신 식은땀을 닦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어질기로 유명한 익제의 무표정한 얼굴에 이유도 없이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가 저도 모르게 익제의 등 뒤를 힐긋거렸다. 집안의 대소사를 담당하는 백발의 한 가령이 꼬장꼬장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흠칫, 등이 곧추섰다.

“안…… 보이십니까? 해독은 완벽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익제와 가령의 눈치를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던 익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밀려 올라갔다.

“보인다.”

의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하고 양해를 구한 의원이 익제의 시야 안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익제는 슬며시 찌푸려지려던 미간을 펴며 짐짓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잇새로 온화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허나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군.”

“예. 아직 예전처럼 선명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러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내일보다는 모레가 더 좋아지실 겁니다. 한 마디로 시간문제라는 것이지요.”

“수고 많았다.”

그가 의원을 부드럽게 치하했다. 허리를 깊숙이 숙인 의원이 뿌듯함을 감추며 애써 겸양하는 태도를 보였다.

“독이 퍼진 지 시일이 꽤 지났음에도 이렇게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워낙 강건한 체질이셨던 덕분이지 제 능력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굳이 제가 아니었더라도 스스로 회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런가.”

“예.”

그때, 방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익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익숙한 방문을 생경한 듯 쳐다보았다. 캄캄하던 시야에 빛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문득, 떠오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멀리서나마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이가 지금의 저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기뻐할지, 당혹스러워할지, 혹은 조용히 눈물을 흘릴지.

하루아침에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진 덕분에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간혹 그녀의 얼굴이 궁금하기는 했다. 조잘조잘 수다를 떨다가도 그의 한 마디에 금세 시무룩해지고, 하찮은 물까치에게도 무시를 당하며, 못된 핀잔을 들어도 짧은 한숨으로 화를 누그러뜨리고 마는 그녀가 어찌 생겼을지. 

어쩌면 조금 아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원진입니다.”

“이만 물러가라.”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익제가 온화한 표정으로 의원을 돌아봤다.

“예.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불편하신 곳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몇 번이고 꾸벅꾸벅 허리를 숙인 의원이 방을 나가고 교대라도 하듯 원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익제의 낯이 일변했다. 방금 전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그가 원진의 등 뒤를 힐긋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잇새로 마뜩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서 혼자인가?”

정중한 태도로 예를 취한 원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익제만큼이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다?”

그 말에 익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 궁핍한 삶이다. 아마 약초라도 캐러 갔을 것이다.”

“집이 불에 타 전소하였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전소?”

익제가 의자에게 등을 떼며 원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익제의 목소리가 한층 서늘해졌다.

“방금 전소라 하였는가.”

“예. 지붕이 내려앉을 만큼 큰불이었던 듯합니다. 잿더미를 들춰 보았지만,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실화였나, 방화였나?”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교류가 전혀 없었는지, 그 집에 불이 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

기어코 익제의 잇새로 싸늘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가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던 익제가 “불이라.” 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검지가 느릿하게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윽고 결심한 듯, 그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라. 만약 화재에 휩쓸려 명을 달리했다면 불에 탄 시체라도 가져와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것이다.”

말을 뱉고 나서야 자신이 채선의 얼굴을 모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익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가슴께에 닿는 작은 키와 조곤조곤한 말투, 귀에 거슬리지 않는 목소리, 시도 때도 없이 눈치를 살피는 소심한 성격.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던 손.

문제는 불에 탄 사체를 보고서도 그걸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익제의 입매가 사나운 빛을 띠었다.

“예. 하옵고.” 

원진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일순, 그의 눈동자가 선득하게 빛났다.

“추격대가 효명의 꼬리를 잡은 듯합니다. 제가 직접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에게서 허락의 말이 떨어졌는데도 원진은 쉬이 방을 나서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익제가 “무슨 일인가.”하고 다시 물었다. 

무표정한 얼굴의 원진이 한층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폐하께서 입궁을 명하셨습니다.”

“하.”

꽉 다문 익제의 잇새로 실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등 뒤의 가령이 움칠했다. 

잠시 후, 익제가 고개를 끄덕였고 원진은 그제야 용건이 끝났다는 듯 곧장 방을 나섰다. 

익제가 차가운 시선으로 허공을 노려봤다. 한참 후, 그의 잇새를 비집고 무감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하라.”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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