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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4)화 (1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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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다려라.
곧 사람을 보내겠다.

익제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지금만큼 안타까운 순간이 없었다. 채선은 머리 위로 지나가는 연둣빛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걸었다. 

매끈한 감나무 이파리가 햇빛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부서졌다. 이제 막 돋아나는 잎사귀들은 그 자체로 봄인 듯했다.

이처럼 가슴 아리는 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채선의 눈동자가 짙은 아쉬움을 품었다. 눈앞의 싱그러운 연둣빛은 하룻밤 사이 그만큼 더 짙어질 테고, 비가 내린 뒤에는 조금 더 푸른빛을 품을 터였다. 

찰나와 같은 지금 이 순간.

그것이 마치 익제와 저, 두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찰나와 같은 지금만이 존재했다. 회상할 수 있는 과거도, 약속할 수 있는 미래도 없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채선은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얀 봄볕이 연한 이파리 사이로 비쳤고, 일렁이는 그림자들이 물비늘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또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것인가.”

익제의 핀잔이 채선의 상념을 꿰뚫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채선이 후다닥 발밑을 살폈다. 두어 걸음 앞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구덩이가…….”

“알고 있다. 나물을 캐러 갈 때 이쯤에서 그리 말하지 않았더냐.”

“예.”

채선은 익제의 동물적인 감각에, 혹은 비상한 기억력에 새삼 숨을 삼켰다. 아마 남자는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도 살아남았을 것이다.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채선이 시선을 떨구었다. 일순, 그녀의 눈매가 허물어졌다.

“자주괭이밥이 아주 어여쁘게 피었습니다.”

“자주괭이밥?”

처음 듣는 말인 듯 익제가 무심코 되물었다. 채선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작고 하찮아 눈에 잘 띄지 않는 꽃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봄꽃보다 귀엽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 소박한 꽃을 좋아합니다. 아, 저기 큰개불알풀도 한 무더기 푸른 꽃을 피웠습니다. 혼자서는 보잘것없지만 수많은 개불알풀꽃이 모이면 구름처럼 아름답습니다.”

“큰개불알풀이라. 이름 한번 요상하군.”

익제가 마뜩잖은 표정으로 혼잣말을 뇌까렸다. 그녀가 어떤 얼굴로 ‘큰개불알풀’이라는 말을 읊조리는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앗! 잠깐만요! 거기 밟으시면 안 됩니다!”

채선이 그의 손을 당기며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무심코 발을 내딛던 그가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허공에 뜬 한 발이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익제가 살짝 고개를 틀어 채선을 응시했다. 천 너머의 눈동자가 미심쩍은 빛을 띠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채선이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채선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패랭이꽃을 밟을 뻔하셨습니다. 그래도 미리 발견해서 다행이지요?”

“하, 고작 그딴 이유로.”

익제가 어금니를 꽉 깨문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발밑의 꽃을 의식하며 걸었던 적이 없었다. 행여 봄꽃을 밟을까, 걸음을 물렸던 적 또한 없었다. 

말도 못 하는 그깟 꽃이 무엇이라고.

“언제는 도라지꽃이 좋다더니, 헤프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군.”

익제가 심술궂은 표정으로 뇌까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주변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채선은 그의 혼잣말을 듣지 못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여기서 모퉁이만 돌면…….”

조잘조잘 수다를 떨던 채선이 다음 순간,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비뚜름한 입매로 걷던 익제 역시 덩달아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대뜸 눈썹을 찌푸렸다. 눈을 가린 천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채선의 잇새로 나직한 탄식이 흘렀다.

“아…….” 

그제야 익제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채선을 응시하던 시선이 앞을 향했다.

여기까지구나.

채선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익제를 돌아보았다. 과거와 미래가 얽히지 않는, 찰나와 같은 두 사람의 지금 이 순간은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그녀가 느릿느릿, 잡았던 손을 놓았다. 익제의 눈썹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채선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풍오입니다.”

그녀의 나직한 말에 텅 빈 제 손을 내려다보던 익제가 고개를 들었다. 인기척을 느낀 풍오가 뒤를 돌아보았고, 동시에 누군가 채선의 집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곧장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 타박타박, 그의 등 뒤로 풍오가 따라왔다. 무표정한 사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늦었습니다.”

그 말에 언제까지고 굳게 닫혀 있을 것 같던 익제의 입술이 열렸다. 그 사이로, 묵직하고 진중한 음성이 비어져 나왔다.

“원진.”

“예.”

짧게 대답한 원진이 고개를 들어 익제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익제의 눈을 가린 천에 머물렀다. 원진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어느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곁을 지키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되었다. 그보다 나를 이렇게 만든.”

익제가 거기서 잠깐 말을 끊었다. 으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 떨며 익제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이런 일이 익숙한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원진이 정중한 태도로 익제의 말을 가로챘다. 그의 입에서 한 사내의 이름이 나왔다.

“효명.”

익제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렸다.  

“그놈은 어디 있나.”

모골이 송연할 만큼 선득한 목소리였다. 원진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주군을 수행하던 효명이 혼자 돌아와 말하기를, 사냥감을 쫓는 풍오의 속도를 따르지 못해 주군을 놓쳤다고 하였습니다. 종종 있었던 일이라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행방불명이 된 주군을 수색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풍오가 저를 찾아오자마자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더군요. 현재 추격대가 그자의 흔적을 쫓는 중입니다.”

“반드시 숨이 붙어 있는 상태로 데려와야 한다. 감히 내 등에 칼을 꽂은 놈이다.”

“예.”

익제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당겼다. 그러나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채선을 향하던 조소조차 따스하게 여겨질 정도로 차갑게 식은 냉소였다.

그녀의 등골이 서늘하게 식었다. 불현듯, 제 목을 조르던 익제의 억센 손아귀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이 남자의 본성일지도 몰랐다. 

그때.

“…….”

익제의 고개가 느릿하게 이동했다. 허공을 더듬던 시선은 정확하게 채선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만큼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찰나의 침묵이 흘렀다. 

익제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고, 채선 역시 조용히 침묵했다. 무슨 말인가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던 그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쯧, 낮게 혀를 찬 익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풍오.”

타박, 타박.

그의 부름에 흑마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가왔다. 흥, 거하게 콧김을 내뿜은 풍오가 마치 채선을 깔보듯이 눈을 내리떴다. 익제가 그런 풍오의 목을 쓰다듬었다. 흥, 흑마의 콧김이 조금 더 거세졌다.

“잘했다.”

히이잉.

흑마는 제법 기분이 좋은 듯했다. 익제가 풍오의 등에 올라타려는 듯 흑마의 옆으로 돌아가는 순간. 

“잠깐만요.”

채선이 익제의 발길을 잡았다. 그녀는 곧장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시 돌아온 채선의 손에는 처음 그가 입고 왔던 자색 비단옷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핏물을 빼려고 해보았는데 비단은 물빨래를 할 수가 없어 깨끗이 지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찢어진 부분은 감쪽같이 꿰매어 놓았으니 제 아비의 삼베 저고리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돌아가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옷입니다, 라는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익제는 입매를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누런 천 너머의 시선이 오래도록 채선에게 머물렀을 따름이다. 

그가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채선이 익숙하게 곁으로 다가가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남자의 비단옷을 입혀주었다. 

무표정한 사내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다 되었습니다.”

단정하게 옷고름까지 매어 준 채선이 조용히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문득,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느껴졌다. 

심장 아랫부분이 저릿저릿했다. 그것은 마치 외로움 같기도 했고, 씁쓸함 같기도 했으며, 혹은 기꺼움 같기도 했다.

아.

그러고 나서야 채선은 자신의 분신과 같던 언니를 떠올렸다. 정안궁 대문 앞에서 그녀를 보았던 날, 이선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 순간, 채선은 깨달았다. 이선은 더 이상 그녀의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고, 앞으로 두 사람의 세상은 겹쳐질 일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선의 화려한 모습에 채선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익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채선과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길에 몸을 맡겼지만, 그것은 남자에게 일어난 예기치 못한 비일상이었다. 익제는 이제 그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모두가 변하는데 늘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채선뿐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채선은 비어져 나오는 쓴 한숨을 삼킨 채 화사하게 웃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멀리서나마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

익제는 이번에도 굳게 침묵했다. 드러난 입매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짧은 침묵 후 익제가 선뜻 등을 돌렸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흑마에 올랐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날렵한 동작이었다.

한 발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남자도 이내 자신의 갈색 말에 몸을 실었다.

고삐를 움켜쥔 익제가 잠시 그대로 있는가 싶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목소리가 채선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기다려라. 곧 사람을 보내겠다.”

채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똑바로 고개를 들어 앞을 보던 익제가 일순 풍오의 허리를 걷어찼다.

“가자!”

히이잉.

우렁찬 울음을 뱉은 풍오가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흑마는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순식간에 채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르던 갈색 말도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채선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이미 멀어진 익제의 그림자를 눈으로 더듬었다. 바구니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등나무꽃이 빛바랜 얼굴로 처연하게 웃었다. 

연노란 나뭇잎이 한 움큼 짙어졌다.

***

“아.”

멍하니 대문을 바라보던 채선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쓴웃음을 흘렸다. 머쓱한 듯 그녀의 콧잔등에 엷은 주름이 잡혔다.

또다.

또 이렇게 정신을 놓고 대문을 쳐다보고 말았다. 요즘 채선에게는 전에 없던 습관이 하나 생겼다. 산도라지를 돌보다가도, 삯바느질을 하다가도, 나물을 말리다가도 문득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대문 너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늘은 높아졌고, 나뭇잎들은 어느새 초록빛을 띠기 시작했으며, 바람은 조금 더 온화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문 너머는 인적 하나 없이 고요했다. 

푸드덕. 

우거진 나무 위로 산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채선의 고개가 창공을 가르는 새를 따라 하늘을 헤맸다. 

어디선가 요란한 종달새 울음소리가 들렸고, 아주 먼 곳에서 산짐승의 울음소리도 희미하게 울렸다. 평소와 다름없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조용하군.’

문득, 남자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조용하다니요, 산새 소리가 저리 유난스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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