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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3)화 (1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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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내가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잊은 것인가.

    푹. 푹.

    호미가 땅을 파헤쳤다. 달래 한 뿌리가 딸려 나왔다. 채선은 뿌리에 묻은 흙을 탈탈 턴 후 짊어진 가방에 쑤셔 넣었다. 

    갈대로 짠 가방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봄나물들이 가득했다. 돌나물과 쑥, 두릅, 원추리나물 등. 남자가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눈에 띄는 대로 모두 캤다.

    톡톡, 채선이 허리를 두드리며 고개를 들었다. 햇볕이 뺨을 때렸고, 이마에는 송골송골 옅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곁눈질로 익제를 훔쳐보았다. 커다란 회화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는 남자는 마치 유랑이라도 나온 한량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

    하지만 채선은 제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따라붙는 시선을 알고 있었다. 끈질기게 들러붙는 그의 시선은 채선이 다시 호미질을 시작하고 나서야 스윽 멀어지곤 했다.

    도망이라도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문득, 채선의 눈매가 아래로 처졌다. 도망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를 밀고해야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채선이 제 귀에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여전히 앞을 보지 못했지만 채선이 도망치는 순간 덥석, 하고 그녀의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시무룩한 시선이 다시 남자를 향했다. 

    그 순간, 산들바람이 불었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따스한 봄바람이다. 회화나무 잎사귀가 흔들렸고, 남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고집스럽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매가 살짝 느슨해진 듯싶었다. 

    바람에 들썩이는 누런색 저고리가 유독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우두커니, 그를 쳐다보는 채선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의 기억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풀이 많아 길이 미끄럽습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가.”

    “예?”

    “방금 전 휘어진 나뭇가지에 뺨을 얻어맞고 비명을 지른 게 누군가.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발밑을 잘…….”

    “으아앗!”

    익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선이 젖은 풀을 밟고 죽 미끄러졌다. 채선의 몸이 휘청하고 흔들리며 뒤로 넘어갔다. 

    “쯧.”

    익제가 혀를 찼다. 순간적으로 손을 뺄까 고민하던 그가 자빠지는 채선의 허리를 붙들었다. 덕분에 간신히 균형을 잡은 채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후다닥 몸을 곧추세웠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마도 갑자기 미끄러져 놀랐던 모양이다. 가슴 언저리를 꾹 누르던 채선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든 것은 둘 중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맙습니다.”

    “도대체 누가 눈이 안 보이는 건지.”

    남자가 빈정거리듯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찔리는 바가 있는지라 채선의 목이 거북이처럼 어깨 아래로 쑥 들어갔다. 짐짓 표정을 가다듬은 채선이 남자의 한쪽 손을 잡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딱딱하고 거친 손이었다. 동시에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희미한 온기가 스민 손이었다.

    “조심하십시오. 여기는 사람이 잘 안 다니는 길이라 덤불이 우거져서 발밑에 갑자기 비탈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너나 조심해라. 애먼 사람 저승길 동무로 삼지 말고.”

    “……예.”

    우거진 나무 그늘 아래를 지나던 채선이 조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춥지 않으십니까? 몸이 성치 않으신데.”

    그 말에 남자가 문득 잡힌 손을 뺐다. 채선이 두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가 그녀의 등을 문질렀다. 느릿하고 집요하게.

    “!”

    어깨에 닿았던 남자의 손이 척추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은밀한 손길에 놀란 채선이 파드득 놀라며 어깨를 떨었다.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입술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밭은 숨이 새어 나왔다. 

    “무, 무슨 짓을……!”

    “혼자 솜옷을 입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로군.”

    “아.”

    채선의 입술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렀다. 픽, 웃음을 흘린 익제가 가만히 주먹을 그러쥐며 빈정거렸다.

    “하긴. 솜옷을 살 돈도 없는 가난한 집이던가.”

    “그러니까 그놈에 가난 타령 좀…….”

    채선의 시무룩한 혼잣말은 언제나 입안에서만 뱅글뱅글 맴돌았다. 

    그때, 걸음을 멈춘 남자가 뒤틀린 입매를 하고서 채선을 응시했다. 그것은 심기가 상했다는 뜻이었다. 

    채선의 머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기분이 상했으면 상했지, 익제가 기분 상할 일은 없었다. 그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앞이 안 보인다는 걸 잊은 것인가.”

    그렇게 말하며 익제가 불쾌한 표정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손을 뺀 사람은 제가 아니었음에도 채선은 남자의 불평을 고스란히 받았다.

    “내가 험한 산길에서 발을 헛디뎌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져야 정신을 차리겠는가.”

    “아닙니다.”

    결국 이번에도 한 수 접고 들어간 것은 소심하고 착한 채선이었다. 그녀가 남자의 손바닥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익제가 손가락을 꽉 오므렸다. 그의 손가락이 채선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며 단단한 깍지를 꼈다.

    “흠.”

    먼저 한 발을 내디딘 익제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채선을 돌아보았다. 얼른 오지 않고 무얼 하느냐는 듯이. 

    그제야 채선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또 한 발.

    그녀가 나란히 서자 익제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고 채선은 그와 발을 맞추어 걸었다. 힐끔, 곁눈질로 훔쳐본 남자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를 그리고 있었다. 채선은 못 볼 것을 본 듯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달음박질했다. 그것이 온화한 봄바람 때문인지, 혹은 나른한 봄 햇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채선은 그 뒤로도 한참을 제 발치만 내려다보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쑥스러움을 떨치려는 듯, 코끝을 긁적인 채선이 쪼그리고 앉아 있던 다리를 폈다. 한동안 구부리고 있던 탓에 발가락이 저릿저릿했다. 발끝을 까딱이던 채선이 조용한 걸음으로 익제에게 다가갔다. 

    풀을 밟는 작은 소리만으로도 남자는 채선에게 정확히 시선을 맞추어 왔다. 누런 약초 천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채선은 어쩐지 그의 시선에 묶인 것 같았다. 

    언뜻 수줍음을 품은 목소리가 그에게로 날아갔다.

    “바람이 차지 않으십니까?”

    “되었다.”

    채선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남자가 콧방귀를 뀌었다. 익제의 상처는 쉬이 좋아지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도 붉은 핏물과 누런 진물이 상처를 감싼 천을 진득하게 물들였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채선은 꼼꼼한 시선으로 남자의 몸을 살폈다. 그의 말처럼 딱히 불편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고통을 겉으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님을 감안하면 마냥 안심할 수만도 없었다.

    “넉넉히 캤으니 사흘은 족히 드실 수 있을 겁니다. 이제 돌아가시죠.”

    채선은 두둑한 가방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으스대는 듯한 태도였지만 안타깝게도 익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쓴맛 나는 나물이 아닌 게 확실한가.”

    “예. 나무 아래에 자라고 있는 버섯도 한 아름 땄습니다.”

    “고작 버섯 가지고 잘난 체는. 내가 무사히 돌아가면 생전 구경도 못 한 고기를 보내줄 터이니, 그때 가서 배 터져 죽었다는 소리나 하지 마라.”

    빈정거리는 말과 달리 익제는 퍽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저녁상에 올라올 버섯이 기꺼운 것인지, 그를 둘러싼 봄 내음이 흔흔한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그를 흡족하게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의 입매가 모처럼 기분 좋은 빛을 띠었다.

    덩달아 채선의 눈매가 보드랍게 풀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채선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살며시 손을 잡았다. 남자가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배 터져 죽을 만큼 많은 고기는 무슨 고기일까? 소고기일까, 돼지고기일까, 닭고기일까, 아니면 말고기일까? 어쩌면 그것들 다일지도 몰라.

    익제의 어깨너머를 보며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채선이 별안간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 못 박혔다.

    다음 순간.

    “잠깐만요!”

    그 말과 함께 채선이 잡은 손을 놓고 익제의 뒤쪽으로 달려갔다. 남자의 소리 없는 시선이 그림자처럼 쫓아왔다. 그의 입매가 살짝 뒤틀렸다. 익제가 빈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오래지 않아, 채선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느라고 제 손을 팽개치고 갔는지 어디 핑계나 들어 보자, 하며 팔짱을 끼고 있던 익제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채선이 가까워질 때마다 봄 내음이 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이건……?”

    그답지 않게 뒷말을 흐린 익제가 마뜩잖은 목소리로 “먹지도 못하는걸.”이라고 중얼거렸다. 채선이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성질 급한 등나무 한 그루가 벌써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익제의 목소리는 여전히 삐딱했다. 그깟 등나무꽃 때문에 이 귀하신 분의 손을 팽개치고 뛰어갔던 것이냐, 라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을 뱉는 순간 자신의 꼴만 우스워질 거라는 사실을 아는 탓에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만 꾹 다물었다.

    품에 안은 등나무꽃에 시선을 맞추고 있던 채선이 온화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가는 길에 어머니 무덤에 들러 놓아 주려구요. 매일 꽃을 가져다드렸는데, 요즘에는 집 밖을 나가지 못했으니까요.”

    “흠.”

    돌아가신 어미를 운운하는 말에 익제가 멋쩍은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혀끝에서 달랑거리던 핀잔이 흔적도 없이 쏙 들어갔다. 

    등나무꽃을 바구니에 꽂은 채선이 그의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깍지를 낀 익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꽃을 보면 마음이 너그러워지잖아요. 그래서 반은 어머니 무덤에, 반은 익제님 방에 장식해 두려 합니다. 물론, 익제님은 꽃은 보실 수 없지만 향기는 맡으실 수 있으니까 없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익제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일순,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서늘하게 변했다.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북풍한설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악의가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악의라니요?”

    뜬금없는 말에 채선이 억울한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바구니에 꽂혀 있던 등나무꽃 몇 송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

    익제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이걸 죽일까 살릴까, 고민이라도 하듯이 그녀를 끈질기게 응시했다. 

    채선은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잔뜩 주눅 든 기색으로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말인가 하려던 익제가 결국 체념한 듯 낮게 혀를 찼다. 그가 먼저 등을 돌렸다.

    “되었다. 돌아가자.”

    “예.”

    채선이 얼른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두어 걸음 걷던 익제가 어금니를 깨문 채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내 방에 꽃 한 송이라도 꽂아봐라. 진정한 너그러움이 무엇인지 보여줄 테니.”

    “……예에.”

    채선이 시무룩하게 어깨를 떨구었다. 봄의 한가운데에 있는 남자의 모습이 유독 기꺼워 보여 침상 맡에 꽃을 꽂아두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헌데 남자가 성을 냈다. 채선은 도무지 익제의 비위를 맞출 수가 없다며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엉키던 두 사람의 걸음이 금세 속도를 맞추었고, 이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구니에서 떨어진 등나무 꽃잎이 두 사람의 등 뒤에 푸른 발자국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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