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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12)화 (1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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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아, 악의라니요!

    “운이 없다는 이야기 말이다. 얼마나 운이 없는지, 어디 한 번 들어 보자.”

    “아니, 남의 불행을…….”

    “뭐 어떤가. 내 일도 아닌데.”

    채선이 원망스레 익제를 흘겨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나 저 무시무시한 남자에게 불평을 터뜨릴 만한 배짱은 없었다.

    익제는 따스한 봄 햇살 아래에서 제법 늘어진 얼굴을 했다. 그가 채선을 돌아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를 재촉했다.

    “무슨 말이든 해보라는 뜻이다.”

    “……예에.”

    결국 채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있는 곳이 환한 봄 햇살 아래가 아니라 캄캄한 어둠 속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린 탓이었다. 

    별수 없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베어 문 채선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 십 년은 족히 넘었을 겁니다. 제가 꼬맹이였을 때니까요. 언니랑 싸우고 집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새똥을 맞거나 벌에 쫓길 때마다 언니가 배를 잡고 웃지 뭐예요. 그러니 어린 맘에 어찌 화가 안 나겠습니까?”

    “그 나이에 가출이라니. 발랑 까진 꼬맹이였군.”

    “……얘기하지 말까요?”

    “해라.”

    “그렇게 엉엉 울면서 무작정 산길을 걷는데 별안간 등 뒤의 풀이 부스럭거리지 않겠습니까? 언니가 나를 달래려고 쫓아왔나 보다 했지요. 하지만 아직 화가 풀린 건 아니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남의 불행을 우스갯거리로 삼는 언니에게 제법 화가 났으니까요.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지요.”

    거기서 잠깐 말을 멈춘 채선이 찌무룩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선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불행을 우스갯거리로 삼던 익제가 느릿하게 몸을 틀더니 한 발을 툇마루 위로 올렸다. 그가 무릎에 왼팔을 괸 채 채선을 응시했다. 

    그의 주위로 노란 저녁 햇살이 부서졌다. 마치 졸고 있는 듯 느른한 그 모습이 제법 평화로워 보였다.

    채선은 그의 평온을 깨뜨리지 않으려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그런데 웬걸. 언니가 아니라 집채만 한 멧돼지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냥 멧돼지도 아니고 성난 멧돼지가요.”

    피식, 익제의 잇새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의 입매가 흐물흐물, 풀어졌다. 흡사 웃음 같은 부드러운 곡선에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서 한 박자 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의 웃음이 자신의 불행 때문이라는 것을. 

    채선의 눈매가 스윽 하고 가늘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 누구보다 기쁘게 웃는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이선과 익제.

    “…….”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 역시 허물어진 얼굴로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불운이 옮을까 봐 저를 피하는 마을 사람들보다는 제 불운에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나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녀를 역신이 아니라 ‘채선’으로 보아 주었으니까. 

    이선과 익제.

    툭툭. 

    손을 털고 일어선 채선이 남자를 향해 빙글, 몸을 돌렸다. 담담한 이야기가 봄바람을 타고 남자에게로 살포시 날아갔다.

    “어찌나 무섭던지, 오금이 저려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리가 굳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고, 목구멍이 꽉 막혀서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지요. 아무리 운이 나쁘기로서니 어떻게 멧돼지와 마주칠 수 있는지, 그 와중에도 어이가 없더라구요. 이 정도로 운이 나빠도 되는 건가……,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언니가 나타났지 뭐예요.”

    “흠.”

    “저와 달리 언니는 정말로 운이 좋아요. 애초에 잘 넘어지지도 않지만, 설령 넘어진다 하더라도 빈손으로 일어나는 법이 없거든요. 꼭 땅에 떨어진 돈을 주워서 일어나지 뭐예요. 그런 언니 덕분에 저는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구했다?”

    익제의 목소리가 얼핏 흥미로운 빛을 띠었다. 채선이 남자의 곁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그녀가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며 뒷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시선은 마당 어디쯤에 두었고, 입가에는 해사한 미소를 머금었다. 두 다리가 기분 좋은 듯 대롱대롱 흔들렸다.

    “하필이면 언니가 저를 찾으러 오는 길에 어미 잃은 새끼 멧돼지 하나를 주웠답니다. 낑낑거리며 울고 있길래 불쌍해서 데리고 왔대요. 그런데 언니가 새끼 멧돼지를 데리고 오자마자 마치 거짓말처럼 성난 멧돼지의 화가 누그러지지 뭐예요. 아마도 새끼를 잃어버려서 그렇게 예민해졌던 모양이에요. 언니가 새끼를 돌려주니까 멧돼지 두 마리가 다정하게 풀숲 너머로 사라지더라구요. 덕분에 저는 또 목숨을 구했죠. 아마 언니가 없었다면 저는 진작 죽었을 겁니다.”

    “그 운이 좋다던 동기는 지금 어디 있나?”

    “언니는…….”

    채선이 말을 하다 말고 흘깃,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앗!”

    채선의 잇새에서 당혹스러운 외침이 터졌다. 익제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또 무슨 일인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은 물음 대신 그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어렴풋하게 젖은 흙냄새가 느껴졌다. 장독대를 두드리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툭. 투둑.

    “조금 전 나물을 널어놓지 않았던가?”

    “맞아요! 나물! 으아아아. 이를 어째!”

    두 눈을 홉뜬 채선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허둥지둥 마당으로 뛰어갔다. 그새 빗방울이 굵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운이 없긴 하군.”

    “으으으.”

    희미하게 입꼬리를 당긴 익제를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채선이 덜 마른 나물을 그러안고 부엌으로 향했다. 익제의 희미한 혼잣말이 빗방울에 묻혀 느릿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확실히 심심할 틈은 없군.”

    ***

    남자와의 생활은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익제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싸늘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입도 험하고, 빈정거리는 악취미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선은 그와 함께 하는 일상이 썩 나쁘지 않았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아니었다. 그는 간혹 심술궂은 말들로 채선을 난감하게 만들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용한 성향이었다. 

    남자가 툇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볼 때면 채선은 삯바느질을 했고, 채선이 잡초를 뽑을 때면 그는 조용히 마당을 거닐었다.

    그뿐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지만, 서로에게 살갑진 않았다. 그것이 좋았다. 외롭지 않을 만큼 가까운 곳에,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 

    덕분에 채선은 엄마를 잃은 상실감에 짓눌릴 틈이 없었다. 불현듯, 어쩌면 그가 자신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를 이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채선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딱 좋다.”

    “예?”

    난데없는 남자의 말에 소반을 내오던 채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당을 거닐던 익제가 눈치 빠르게 소반 앞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몸이 아픈데도 식욕이 어마어마했다. 침상에서 일어난 날부터 미음 대신 밥을 찾았고,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을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중간중간 감자며 고구마 따위로 입가심을 했다.

    채선은 소반을 그의 앞으로 조금 더 밀어놓으며 익제에게 조용한 시선을 던졌다. 무엇이 딱 좋으냐는 물음이었다.

    “있는 듯 마는 듯 존재감이 희미해서 딱 좋다는 말이다. 네가 무얼 하든, 내 생각을 방해하는 법이 없으니.”

    “아.”

    일순, 채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가끔 남자는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경우 깊이 생각해 보면 대체로 욕이었다.

    “식사하십시오.”

    “닥치고 밥이나 먹으란 뜻인가.”

    “그게 아니라…….”

    체념의 한숨을 내쉰 채선이 남자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었다. 익제는 나머지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밥그릇을 찾았다. 그가 밥을 뜨자 채선이 정갈한 손놀림으로 반찬 하나를 올려주었다.

    “머위장아찌입니다.”

    “흠.”

    익제가 또다시 밥을 한술 떴다. 채선이 기다렸다는 듯 반찬을 올렸다. 

    “비름나물입니다.”

    “흠.”

    익제가 입매를 찌푸리며 밥을 씹었다. 남자는 입안에 음식을 머금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게걸스럽지도 않았고, 성급하지도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귀한 태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을 넘긴 남자가 딱 하고 숟가락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깜짝 놀라 어깨를 떤 채선이 동그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그러십니까? 찬이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고기반찬 하나 없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니 말이다.”

    익제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힐끔, 그의 눈치를 살피던 채선이 차마 말대꾸는 하지 못하고 소심하게 입속으로 웅얼거렸다. 

    “그 정도로 가난한 건 아닌데……. 저자에 못 가게 하시니까 고기반찬을 사러 갈 수 없는 건데요…….”

    “내가 너의 무엇을 믿고, 너 혼자 마을로 내려보내겠는가. 네가 나를 밀고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던가 말이다.”

    “안 할 건데요…….”

    “흠.”

    익제는 채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채선이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다물었다. 남자와의 사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끈끈하지만 헐겁고 따스하지만 차가운 묘한 유대관계가 생겼다고 생각한 것은 혼자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채선의 표정이 시무룩한 빛을 띠었다. 다른 어떤 모진 말보다 저를 믿지 못한다는 그 한 마디가 가장 서운했다.

    그때, 익제가 고개를 들어 채선을 쏘아봤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고 나서야, 남자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머쓱한 듯 코끝을 찡그렸다.

    “그런데.”

    또 나왔다. 

    저놈의 ‘그런데.’

    채선은 불안한 눈으로 익제의 얼굴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입매가 비뚜름했다. 그가 뒤틀린 입술을 뗐다. 그 사이로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밥 위에 올려주는 나물마다 족족 쓴맛이 나는 연유는 무엇인가. 악의가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아, 악의라니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남자의 말에 채선이 정색을 하며 두 손을 휘휘 저었다. 들고 있던 젓가락이 휙휙, 시야를 어지럽혔다. 

    채선은 익제의 얼굴을 찌를 듯이 위협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젓가락에 놀라 얌전히 두 손을 내렸다. 그녀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혼자서는 약초나 나물을 캐러 가지도 못하게 하시니까! 대문 밖에도 못 나가게 하시니까 그렇지요. 텃밭에 있는 나물이나 뒷마당에 자란 나물들만으로 반찬을 만들다 보니 그런 겁니다. 정말로 악의는 없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의 무얼 믿고 혼자 내보내란 말인가. 그대로 줄행랑을 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다고.”

    “그럼 같이 가면 되잖아요!”

    “…….”

    채선이 저도 모르게 왈칵 소리를 질렀고, 익제가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자신이 한 말을 곱씹은 그녀가 “아니, 그게 아니고…….” 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익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선의 소심한 시선이 그를 따라 천천히 위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어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익제가 그녀를 향해 가볍게 턱짓을 했다.

    “뭘 꾸물거리는가.”

    “예?”

    “앞장서라. 대신 저녁 밥상에도 쓴맛 나는 나물이 올라왔다가는 네 악의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악의가 아니라니까요…….”

    채선의 의기소침한 대꾸는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하고 공기 중에서 스르르 흩어졌다. 성질 급한 익제는 이미 마당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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