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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9)화 (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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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결국은 선한 사람이
이기는 법이거든.

마당 한 편에서 찬물에 약초를 우리던 채선이 잠깐 허리를 펴고는 고개를 들었다. 툇마루에 앉아 있는 남자는 아까부터 대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끈질긴 시선이 그곳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남자의 무심한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감정이 눈에 보일 듯 선연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로 낯선 곳에 떨어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섭고 지치는 일일까. 

그 생각만 하면 치밀어 오르던 울화가 사라지고, 퉁명스러운 남자가 가여워졌다.

‘그러다 눈 뜨고 코 베여도 모른다? 그렇게 착하게 살면 너만 손해 보는 거야.’

언젠가 이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채선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내가 손해 보는 게 나아. 적어도 두 발 뻗고 잘 수는 있잖아.’

이선의 커다란 한숨이 돌아왔으니 아마 그 비슷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건 진심이었다. 이득을 보고 마음이 불편해지느니, 손해를 보고 마음 편한 게 나았다. 그런 채선의 신념 가장 밑바닥에는 어릴 적 아비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깔려 있었다.

“이선아, 채선아.” 

“응?”

“왜요, 아부지?”

한쪽 다리에 한 명씩, 두 아이를 나란히 앉힌 아비가 가을 햇살 속에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때가 몇 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 옷에서 나던 노란 햇볕 냄새와 희미하게 풍기던 마른 낙엽 냄새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애비는 다른 건 안 바란단다. 그저 착하게만 살아라. 길게 보면, 결국은 선한 사람이 이기는 법이거든. 그것이 세상의 이치란다.”

불현듯 떠오른 소중한 기억에 채선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순간, 남자의 눈길이 곧장 채선을 향했다. 

채선은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약초 물에 담가 놓은 천을 꺼내 물기를 짰다. 그러고는 남자의 곁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무슨 일이냐.”

채선은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에 습관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남자의 기세에 항상 주눅이 들곤 했다. 

문득, 채선의 눈매가 미심쩍은 빛을 띠었다. 

다음 순간, 그녀는 남자를 향해 아주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굴을 괴상하게 찌푸리고 혀를 내밀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돼지 코도 만들었다.

“…….”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불쾌한 침묵뿐이었다. 남자는 정말로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큼큼.”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한 채선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이거요.”

채선이 손에 든 것을 슬쩍 내밀었다. 남자는 이번에도 정확히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채선은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한 번도 눈이 멀어 본 적 없는 그녀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를 놀리는 것이로군.”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약초 천입니다! 의원도 부르지 말라 하시고, 약방에도 다녀오지 못하게 하셔서 일단 급한 대로 집에 있는 약초를 우려 천을 담가 두었습니다. 차가운 성질을 가진 약초니 눈에 오른 열을 내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 아마도요.”

“아마도?”

채선이 조그맣게 덧붙인 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은 남자가 불신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동그란 어깨를 움츠리며 슬그머니 시선을 떨구었다.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어깨너머로 들은 것이라…….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 그리고 어디서 들었는데, 갑자기 시력을 잃었을 때는 천으로 눈을 가려두는 것이 좋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약해진 눈이 자극에 노출되지 않도록……. 아마도요.”

“마음대로 하라.”

남자가 포기한 듯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채선은 짐짓 발소리를 내며 남자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는 채선이 등 뒤에 서는 것을 싫어했다. 또한, 기척을 내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에 예민했다. 아마도 믿었던 이에게 등 뒤를 공격당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리라, 하고 짐작했지만 상처받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

채선의 태도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언제 다시 남자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기분 탓인지, 남자의 손자국이 남은 목덜미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자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참으로 아쉬웠다. 시퍼렇게 멍이 든 자신의 목을 봤다면, 아무리 안하무인이라도 조금쯤은 죄책감을 느낄 텐데 말이다. 

남자가 의식적으로 힘을 푼 것인지 그의 등이 느슨해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선은 몰래 조용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녀가 기다란 천으로 남자의 눈을 감쌌다. 다행히 걱정하던 공격은 없었다. 신중하게 매듭을 묶던 채선이 그에게 물었다.

“너무 헐렁하거나 조이지는 않으십니까?”

“됐다.”

고맙다는 말은 없었다. 수고했다는 말도 없었다. 남자는 당연한 것처럼 채선의 호의를 받았다. 그게 밉거나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남자에게는 그것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던 탓이다.

“상처에 두른 천도 새것으로 갈겠습니다.”

그 말에 남자가 순순히 옷고름을 풀었다. 거침없는 손길에 금세 남자의 등이 드러났다. 옷을 걸치고 있을 때는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이지만, 맨몸이 드러난 순간 분위기가 반전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꽉 짜인 근육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유려하게 춤을 췄다. 

남자를 간호하면서 몇 번이나 본 몸이지만 볼 때마다 채선의 뺨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흡.”

채선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녀의 시선이 상처를 여민 천에 닿았다. 누런 약초 천에는 묽은 피와 진물 자국이 잔뜩 엉겨 있었다. 오늘 아침에 새로 간 천인데도 벌써 이렇게 되었다. 정작 남자는 무덤덤한데, 채선의 눈매가 고통스러운 양 일그러졌다.

느리게 심호흡을 한 채선이 천천히 천을 풀었다. 흉물스러운 상처가 그녀의 눈앞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진물이 눌려 붙은 천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으.”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낸 채선이 눈살을 찌푸리며 천을 떼어 냈다. 후우, 후, 상처에 입김을 불며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지겨울 만큼 느리게 천을 벗긴 채선이 깨끗한 천으로 상처 주변을 닦았다. 

분명 말로 표현하지 못할 통증이 느껴질 텐데도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채선은 그의 독함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엄살이 심한 저였다면 이미 죽는다고 드러누웠을 것이다.

하긴, 지금은 내 엄살을 받아줄 사람도 없구나.

소리 없는 한숨을 흘린 채선이 깨끗한 약초 천을 상처에 감았다. 어느 한 군데 불편하지 않도록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의 시선이 어깨 너머를 힐긋거린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남자가 벗어둔 옷을 집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채선의 손놀림이 소심해졌다. 채선은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뱉어야 할지 삼켜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남자의 입술이 열렸다.

“무슨 일인가.”

채선은 제 옆에 있는 옷을 힐끔거리며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의기소침한 눈동자가 바닥을 배회했다.

“입고 계신 옷이 찢어지고 헤져서 다른 옷을 준비했는데…….”

채선이 머뭇거리며 뒷말을 흐렸다. 남자가 대뜸 눈살을 찌푸렸다.

“왜, 옷에 독이라도 묻혔는가?”

남자의 심술궂은 말에 채선이 코끝을 찡긋거리며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짧은 한숨을 삼키며 뒷말을 덧붙였다.

“뒤져 보니 아비가 입던 옷이 있어서 깨끗이 빨아 말렸는데……. 그게 삼베로 만든 옷이라 거칠고 하찮아…….”

“새삼스럽군.”

남자가 빈정거리듯 혀를 찼다. 

“예?”

“이 집에서 하찮은 것이 어디 옷뿐이던가 말이다. 몸을 뉘는 침상부터 이불, 의자, 마당, 식사. 모든 것이 하찮은데 이제 와서 그리 말하는 게 새삼스럽다는 뜻이다.”

“아.”

남자의 차가운 대꾸에 채선은 소심한 표정으로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제 귀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죽은 이의 옷이라 꺼림칙하실 수도…….” 

“되었다. 무서운 건 죽은 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니.”

남자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한 팔을 들었다. 그제야 채선이 허둥지둥, 그의 손에 옷을 꿰었다. 그리고 남자의 앞으로 돌아가 야무진 손끝으로 옷고름을 매었다. 

남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옷을 입혀주는데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마치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여상하고 자연스러웠다.

옷고름을 매만지는 채선의 머리 위로 남자의 숨소리가 떨어졌다. 정이 뚝 떨어질 만큼 차가운 성정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따스한 숨결이었다. 그것이 몹시 이질적이라 채선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되었, 습니다.”

채선은 슬며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남자의 고개가 다시 대문을 향했고 그의 어깨 위로 나른한 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어쩌면 아주 먼 훗날, 오늘의 기억은 잊더라도 바스락거리는 햇볕의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 그리고 쓴 약초 냄새가 불현듯 떠오를지도 모르겠다며 채선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

짹짹.

짧은 두 다리로 총총거리며 마당을 뛰어다니는 참새가 가슴을 부풀리며 요란하게 울었다. 

“조용하군.”

“예?”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에 채선은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소란스러운 참새를 바라보았다. 통통한 참새는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을 쪼아대더니 이내 부리를 달싹였다. 손톱만 한 부리 사이로 쉴 새 없는 수다가 쏟아져 나왔다.

짹짹짹.

“조용……하다구요?”

채선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의 눈을 멀게 한 독이 기어코 귀까지 멀게 한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운 시선이 그를 훑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채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당에서 우는 참새 소리,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 멀리서 날아가는 까마귀의 날갯짓 소리. 혹, 이런 것들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혹시……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쯧.”

남자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의 잇새로 싸늘한 조소가 떨어졌다. 

“인간들의 아귀다툼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적막강산에 있는 것처럼 고요하기 짝이 없다는 뜻이다.”

“……아, 예에.” 

채선은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의 말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초췌한 낯에 정말로 평온이 깃들어 있었기에 더 이상 반문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가 사는 세상은 채선이 결코 알지 못하는 세계지만, 지친 듯 보이는 눈앞의 남자가 어쩐지 안쓰럽고 가여웠다.

‘그러니까 네가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거야.’

어디선가 이선의 핀잔이 들리는 듯했다.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는 채선의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그런데.”

남자가 똑바로 채선을 응시했다. 이제는 저 정확한 시선도 제법 익숙해졌다. 매서운 눈매는 천 속에 모습을 감췄고, 그것만으로도 남자는 한결 유순해 보였다.

물론, 보기에만 그렇다는 거다. 알맹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무얼 하는 것인가. 땅을 파는 소리가 들리는데, 설마 시체를 묻으려는 것은 아닐 테고.”

남자의 말에 채선은 그제야 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담벼락을 따라 일구어 놓은 텃밭 한가운데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파릇하게 돋아난 도라지가 아직 여물지 않은 꽃망울을 품었다. 

채선은 손끝으로 작은 꽃망울을 톡, 건드렸다. 배시시,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누그러진 그녀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났던지 천속에 숨은 남자의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담장을 따라 텃밭이 있다는 건 말씀드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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