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개의 별이 뜨는 밤 (7)화 (7/131)

16643784984046.jpg

7

말 대가리 맞는데……?

채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남자의 등에 닿았다. 

채선은 조용히 침묵하며 남자의 상처가 가지는 의미를 떠올렸다. 그는 가슴이 아니라 등에 치명상을 입었다. 그 말은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뜻이다. 

남자는 등을 맡기는 것이 당연했던 이에게 뒤를 공격당했다. 그리고 남자를 베었으나 시체를 찾지 못한 사내는 저 밖 어딘가에서 남자를 찾아 헤매고 있을 터였다. 선량한 아군의 가면을 쓰고서.

그에 반해, 남자는 아직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사내가 만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번에 말로 손쓸 새도 없이 삼도천을 건너겠지. ……참으로 고단한 인생이구나.

채선의 시선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가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풍오.”

“……예?”

그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한 채선이 무심결에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마당으로 난 창문이 덜그럭거렸다. 그 너머에 어른거리는 시커먼 그림자가 보였다. 흑마가 창문을 부술 듯이 머리로 쿵쿵 찧기 시작했다. 

히이잉. 

자리에서 일어난 채선이 얼른 그리로 다가가 걸쇠를 풀었다. 그리고 흑마가 집을 다 때려 부수기 전에 서둘러 창을 열었다. 

불쑥.

기다렸다는 듯 흑마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커다랗고 까만 머리가 방 안 깊숙이 들어왔다. 흐응 하는 콧소리와 함께 뜨끈한 콧김이 뺨을 데웠다. 무심결에 손을 든 채선이 흑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흥.

흑마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채선을 보더니 이내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채선의 은혜를 생각해 무례한 손길을 참아주겠다는 태도였다. 그 오만한 모습에 그녀가 슬며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이동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 남자는, 그러나 다음 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정확한 시선으로 흑마를 응시했다.

아, 흑마의 이름이 풍오인가 보구나.

흑마의 갈기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채선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남자의 무심한 목소리가 풍오를 향했다.

“네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로군.”

히힝.

“고생했다.”

푸르르.

가볍게 머리를 턴 흑마는 고집스럽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났다. 흑마는 한 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예?”

“어찌 한 번에 말을 알아듣는 법이 없나.”

남자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의기소침하게 어깨를 움츠린 채선이 입술을 삐죽인 뒤에야 말을 이었다.

“수도 남쪽에 있는 남도산 중턱입니다.”

“남도산이라. 분명 황궁 동쪽 숲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하긴 그놈이 끈질기게 뒤를 쫓았을 테니 풍오가 예까지 온 것이겠지.”

잠시 침묵하던 남자가 생각을 끝낸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묵직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풍오, 너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 가서 원진을 데려와라. 되로 받았으니 말로 갚아주어야지.”

“아니, 그렇게 말한다고 말이…….”

히힝.

채선이 입을 떼기 무섭게 풍오가 코를 울리며 대답했다. 오만한 눈동자가 채선을 힐긋거리더니 금세 순종적인 빛을 띠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이는 안 된다. 반드시 원진, 그를 데려와야 한다.”

푸르르.

저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머리를 턴 흑마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커다란 머리가 조금씩 창을 빠져나갔다. 

채선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두 눈만 끔뻑였다. 창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자, 곧장 집을 나서는 흑마의 뒷모습이 보였다. 풍오는 마치 한 줄기의 바람처럼, 혹은 한 마리의 까마귀처럼 순식간에 그녀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풍오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보던 채선이 한참 뒤에야 남자를 돌아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풍오가 다른 사람을 잘못 데려오면 어쩌죠?”

다른 사람.

아마도 남자는 채선이 하려는 말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남자는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했고, 그는 남자의 측근이었다. 그러니 풍오가 잘못하여 살수를 데려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기우는 아니었다는 거다. 

“흡.”

몸을 뒤척이던 남자가 짧은 신음을 삼키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격통이 조금씩 사그라드는지 남자의 찌푸려졌던 미간이 살짝 펴졌다. 남자는 어떤 진통제도 복용하지 않았고 맨정신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채선은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깨끗한 천을 둘러준 것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남자를 보는 채선의 미간이 덩달아 일그러졌다.

“그자가 내 등을 찌를 때 풍오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놈을 데려온다? 하, 그렇다면 멍청한 정도가 아니라 말 대가리겠지.”

말 대가리 맞는데……?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채선이 한참 후에야 마지못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예.”

남자는 그새 고른 숨을 내쉬었다. 

창을 닫고 돌아선 채선이 베개 위에 떨어진 물수건을 주웠다. 찰박찰박, 맑은 물소리가 방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흥건하게 젖은 물수건을 꽉 비틀어 짰다. 수면 위로 떨어진 물방울들이 저마다 튀어 오르며 반짝이는 빛을 냈다.

채선은 물수건을 곱게 접어 남자의 이마 위에 올렸다. 

“큽!”

아니, 올리려고 했다. 남자가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조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무슨 짓인가.”

남자의 잇새로 서늘한 경고가 떨어졌다. 남자의 손아귀가 순식간에 숨통을 죄어 왔다. 채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그녀의 입에서 “끅끅.” 막힌 숨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크흡.”

채선이 다급하게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당기고 비틀어도 남자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그녀는 급기야 남자의 팔을 때리고 꼬집으며 발버둥을 쳤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차올랐다.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이게 대체 무슨 망나니 같은 짓이야.

채선의 정신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던 그 순간.

“으읍, 윽!”

목을 죄는 힘이 느슨해졌다.

“하아, 하아.”

폐부 깊숙이 공기를 실어 나르던 채선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좁아진 시야가 서서히 넓어졌다. 채선은 남자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조차 잊고 입술을 삐죽였다. 

“물수건, 을 놓아주는 게 그렇게 죽을죄입니까?”

그녀의 잇새로 밭은 숨소리와 함께 반쯤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수건?”

남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채선의 말을 되뇌었다. 그가 목소리에 깃든 의심을 숨기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아니면 밤새도록 누가 물수건을 갈아주고 열을 식혀 주었겠어요? 설마, 풍오가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채선의 목소리에 살짝 날이 섰다. 그것은 평소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살아가는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남자가 온전히 손을 거두었다. 채선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삼도천에 한쪽 발을 담그고 온 기분이었다. 잠깐 사이, 엄마가 이리 오라며 손짓하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도로 눈을 감았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번들거렸고 근처에만 가도 홧홧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정신도 못 차리던 사람이 그렇게 무리를 했으니 상태가 악화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채선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흘렸다. 남자는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새 잠이 든 것 같기도 했고, 혹은 정신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채선은 어째서 그가 믿었던 이에게 등을 찔렸는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남자 몰래 심술궂은 생각을 떠올렸다.

“아무리 내가 운이 없기로서니,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자신의 귀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은 불평이 채선의 입술 근처를 배회했다. 남자는 운이 없는 채선의 일상에 찾아온 또 하나의 불운 덩어리였다. 새똥이나 소낙비, 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커다란 불운 덩어리.

“……그래도 어쩌겠어. 다 죽어가는 사람을 내쫓을 수도 없고.”

결국 체념의 한숨을 흘린 그녀가 남자의 뺨이며 목덜미를 닦기 시작했다. 차가웠던 물수건은 순식간에 미지근해졌고 남자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연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신세 한탄을 하며 물수건을 빨던 채선이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는 조금 전 자신의 목을 조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순하고 연약해 보였다.

“하아.”

채선의 잇새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이 흘렀다. 그러고 나자, 방금까지의 원망스러움이 눈 녹듯 사라지고 가여운 마음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딱 사기당하기 좋은 성격이라고, 언니가 그랬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채선은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만약 자신이 남자의 입장이었다면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반쯤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전신을 휩싸는 격통도 끔찍한데 눈까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도 강했다. 대뜸 채선의 목을 조를 만큼.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남자를 응시하는 채선의 눈동자가 알 수 없는 빛을 띠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돌보지 않는다면 남자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고, 채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못 본 척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어쩌겠어……. 내 업보가 그런걸.” 

마침내 그녀는 자신에게 떨어진 불운 덩어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

보통 채선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물을 길어놓고, 밥을 한 뒤 깨끗이 빤 수건으로 엄마의 몸을 닦는다. 약을 달인 뒤에는 아침 식사를 차려주고,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하거나 마당에 있는 밭을 일궜다. 

점심을 차려주고 나면 중천에 뜬 해와 함께 산속을 누볐다. 약초 바구니는 꽉 찰 때도 있고 텅 빌 때도 있다. 해거름에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하고 또다시 약을 달였으며, 한밤중에는 호롱불 옆에서 삯바느질을 했다. 

숨 돌릴 틈 없이 분주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그 바쁜 일상이 하루아침에 뚝 끊겼다. 

더 이상은 새벽부터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약을 달이지 않아도 되었으며, 삼시 세끼를 챙기느라 부지런을 떨 필요도 없었다.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여유는, 그러나 느긋함보다 오히려 허무에 가까웠다. 하릴없이 멍하니 하늘을 보는 일이 잦아졌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런 채선의 일상이 다시 분주해졌다.

쿵.

“무슨 일……!”

새로 길어온 물을 들고 방으로 향하던 채선은 커다란 타격음에 깜짝 놀라 헐레벌떡 방문을 열었다.

“어.”

그리고 다음 순간,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남자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의 앞에는 삐죽 튀어나온 나무 기둥이 있었다. 기분 탓인지 남자의 이마가 벌건 것 같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던 채선이 방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얼 하시는 중이십니까?”

“네 눈에는 내가 심심해서 기둥에 머리를 갖다 박는 머저리처럼 보이나?”

남자가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채선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어쨌든 남자는 환자였고,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다소’가 ‘다소’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