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은으로 만든 노리개.
“엄마.”
채선은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자신의 어미를 불러 보았다. 사막의 모래알처럼 건조한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흰색 머리끈이 바람에 쓸려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 채선은 혼자가 되었다.
“언니.”
이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엄마의 임종도, 마지막 가는 길도 지키지 못했다. 그런 이선이 원망스럽거나 서운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달포 전, 채선은 아무도 몰래 정안궁 대문 앞을 서성였던 적이 있었다. 어미의 병세가 심상치 않아 꼭 한 번 이선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끝없이 높고 기다란 담장을 보니 차마 대문을 두드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웅장한 대문 앞에 선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때, 문이 열리며 가마가 한 채가 나왔다. 채선은 황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어린 하녀 하나가 가마 곁으로 다가가더니 비단 천을 걷고는 무어라 속삭이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비단 천 너머에 있던 이선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
그녀는 제가 아는 이선이 아니었다. 거기 앉아 있는 여인은 채선의 기억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곱게 화장을 하고, 생전 처음 본 화려한 머리꽂이로 장식을 한, 채선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채선은 끝내 알은체를 하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하아.”
짧은 한숨이 바람에 흩날렸다. 응어리가 맺힌 것처럼 가슴 언저리가 갑갑했다. 무심코 가슴께를 더듬는 채선의 손끝에 동그란 무언가가 만져졌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채선이 이내 그것의 정체를 떠올리곤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은으로 만든 노리개.
“어째서 엄마가…….”
옷 위로 노리개를 더듬으며 채선이 생각에 잠기던 그때.
부스럭.
등 뒤에서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
깜짝 놀란 얼굴로 등을 돌렸다. 수풀이 파스스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잠잠했으니 바람의 장난은 아니었다. 갈수록 흔들림이 점점 커지는 걸 보니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누가?
이곳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외길이었다.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연륜 있는 약초꾼이라면 결코 이 길로 들어올 리 없었다.
길 잃은 초짜 약초꾼일까? 설마, 도적은 아니겠지?
그게 누구든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야 했다. 채선이 입술을 달싹이는 찰나, 검은 형체가 불쑥 그녀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어?”
다음 순간, 채선은 마치 허를 찔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깜빡.
상대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락거렸다. 채선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새까만 눈망울을 들여다보았다. 순진한 눈동자의 주인은 신입 약초꾼도 아니었고, 길을 잃은 도적도 아니었다.
히이잉.
그래, 말.
풀숲을 헤치고 나온 것은 비에 젖은 까마귀처럼 새카만 말 한 마리였다.
“어어…….”
눈앞의 흑마는 채선의 눈에도 꽤 범상치 않아 보였다. 보통 말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덩치도 한 배 반은 되는 듯싶었다.
반지르르 윤이 나는 털을 보니, 이런 외진 산속이 아니라 호화로운 마구간이 더 어울릴 성싶었다. 몸통의 반만 수풀 밖으로 빠져나온 말은 그 자리에 서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흐응.
옅은 콧김을 내뱉은 흑마가 채선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왜, 왜……?”
흑마의 시선은 채선을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 어디서 갑자기……?”
채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푸르르, 투레질을 한 말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긴 고뇌를 끝낸 모양이었다. 흑마가 곧장 채선에게로 다가왔고, 채선도 흑마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순간.
“맙소사! 저게 뭐야?”
채선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직한 비명을 터뜨렸다. 두어 걸음을 남겨두고 멈춰 선 흑마가 다시 채선을 응시했다. 이번에도 역시 뚫어질 듯이 날카롭게.
“이게……!”
채선의 홉뜬 시선이 흑마의 등에 머물렀다. 말 등 위에는 검은색 보따리가 대충 걸쳐져 있었다. 아니, 그것은 보따리가 아니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마치 앞으로 고꾸라지듯이 엎어져 있었다. 고개는 말 목 옆에 툭 떨어졌고, 사지는 아래로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정신을 잃은 게 분명했다.
터벅. 터벅.
흑마가 남은 두어 걸음의 거리마저 좁혔다. 채선은 그제야 흑마가 어째서 저를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았는지 알아차렸다. 흑마는 채선이 자신의 주인을 도와줄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늠했던 것이다.
히이잉.
흑마가 마치 재촉하듯 고개를 비틀며 울었다. 말이 내뿜는 콧김이 뺨에 닿을 만큼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
채선의 시선이 또다시 남자에게 닿았다.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남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흑마는 정신을 잃은 제 주인을 업고서 도와줄 사람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너, 엄청 영리하구나.”
히이잉.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렇게 재촉하지 마.”
채선은 차마 그 마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눈앞의 흑마에게는 그의 주인이 더없이 소중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채선의 어미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채선이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죽 훑어 내렸다. 그와 동시에.
“피?”
채선의 눈이 또 한 번 커다랗게 벌어졌다. 남자의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긴 검에 베인 상처가 나 있었다.
찢긴 옷 사이로 벌겋게 입을 벌린 상처가 보였고, 그 주변에는 반쯤 말라붙은 핏자국들이 엉망진창으로 엉겨 있었다.
불현듯, 좋지 않은 일에 엮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채선의 눈매가 시무룩하게 변했다.
“하긴. 내가 좋은 일에 엮였을 리가 없지. 괜히 역신이라 불리는 심채선이냐.”
그녀가 체념한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 손을 높이 들어 흑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가자.”
채선이 앞장을 섰고, 영리한 흑마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흑마의 등에 업힌 남자의 팔다리가 맥없이 흔들렸다.
***
“이제 어쩐다?”
집 앞에 도착한 채선이 남자와 방문을 번갈아 보며 난감하게 중얼거렸다. 저보다 큰 남자를 어떻게 방으로 옮겨야 할지, 도무지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히이잉.
“알았어, 알았어. 재촉하지 말라니까. 나도 지금 막 옮기려고 했어. 그나저나…… 죽은 건 아니겠지?”
채선은 마치 변명 같은 말을 읊조린 후 남자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잔뜩 긴장했던 그녀의 표정이 안도로 물들었다.
“좋아. 희미하지만 숨은 쉬고 있네. 이제 옮길게.”
채선이 남자의 겨드랑이 두 손을 끼우며 비장하게 읊조렸다. 흑마가 다리를 굽히며 그녀를 도왔다. 확실히 영리한 말이었다.
“자, 진짜로 옮긴다?”
히잉.
“끄응.”
채선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젖 먹던 힘까지 냈지만, 정신을 잃은 채로 축 늘어진 남자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해 보이는데 마치 바윗덩이를 드는 것처럼 무거웠다.
“으갸갸. 그윽……!”
채선의 잇새로 정체불명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남자의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세를 모아 두 팔에 잔뜩 힘을 줬다. 온몸에서 땀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남자의 몸이 멈칫멈칫, 한 뼘씩 움직였다.
다음 순간.
쿵.
“으앗, 이를 어째!”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순간적으로 겨드랑이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지만 무거운 남자를 안아 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채선은 행여 남자와 함께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얼른 두 손을 뗐다. 결국 말 등 위에서 떨어진 남자는 혼자서 흙바닥 위를 나뒹굴었고, 채선은 머쓱한 표정으로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히이잉!
“미, 미안. ……고의는 아니었어.”
채선이 흑마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흑마가 다리를 굽히고 있던 터라 그리 세게 구르지는 않았다.
푸르르, 흑마가 고개를 흔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연신 거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채선이 그런 흑마를 힐끔 곁눈질하며 시무룩하게 속삭였다.
“조심할게. 조심하면 되잖아.”
크게 심호흡한 채선이 남자의 다리 한쪽을 잡고 방으로 향했다. 등 뒤의 남자가 흙바닥 위에 긴 궤적을 남기며 질질 끌려왔다.
히잉!
“미안해. 근데 나 혼자 옮기기에는 너무 무겁단 말이야. 대신 이제부터는 조심할…… 으아!”
쿵.
남자가 섬돌에 머리를 박았다.
히잉!
채선이 다시 흑마의 눈치를 살폈다.
흥흥!
기분 탓인지 흑마가 내뿜는 콧김이 조금 더 험악해진 것 같았다.
“실수야, 실수. 그러니까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지…… 으앗!”
쿵.
남자가 툇마루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히이잉.
흑마가 저벅저벅 툇마루 앞으로 다가왔다.
“으앗!”
쿵.
남자가 또 한 번 문턱에 머리를 찧었다.
푸르르.
흑마가 뒷발을 굴렀다. 당장이라도 채선을 들이받을 듯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움찔, 어깨를 움츠린 채선이 남자를 황급히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다 왔어. 이제 더 이상 부딪힐 데도 없어! 정말이야!”
낑낑거리며 간신히 방에 도착한 채선이 남자의 다리를 털썩 내려놓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거운 남자를 옮기랴, 흑마의 눈치를 살피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며 가쁘게 들썩이던 어깨가 차츰 가라앉았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채선은 긴 한숨을 내쉬며 방 안에 누워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남자가 누구인지, 무슨 사연으로 검 상을 입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바깥에 있는 흑마와 마찬가지로 남자를 둘러싼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찢어지고 헤졌지만, 그것은 비단옷이 분명했다.
“어쩌지?”
채선은 바닥에 누워 있는 남자와 침상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위에 있던 베개와 이불을 끄집어 내렸다. 그녀는 바닥에 깐 이불 위로 남자를 데굴데굴 굴린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닥은 냉골이었지만, 남자를 침상 위로 올리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한 번만 더 남자를 옮긴다면 남자의 사망 원인은 검 상이 아니라 타박상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사망 원인은 성난 흑마의 뒷발에 채어 죽은 것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