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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별이 뜨는 밤 (3)화 (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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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가슴을 쑥 내밀며 허세를 부리던 약방 주인이 대뜸 목소리를 낮췄다. 민망한 기색을 감추려는지 그가 또다시 “큼큼.”하며 헛기침을 했다. 채선은 약방 주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대신?”

    “이선이한테 내 이야기나 잘해주거라. 내가 걱정하더란 말도 잊지 말고.”

    “예.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꼭 그리 전하겠습니다.” 

    “내게 시집오면 평생 모친의 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도 덧붙이고.”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채선은 약을 품속에 챙겨 넣으며 가게를 나섰다. 문턱을 넘자마자 등 뒤에서 약방 주인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선이가 왔다 가면 그날 하루는 가게가 북새통을 이루는데, 오라는 이선이는 오지 않고 역신만 왔다 가는군. 칠복아, 뭘 멀뚱히 서 있느냐. 어서 소금 뿌리지 않고.”

    “예이.”

    채선은 저도 모르게 또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방금까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던 약방 주인의 표변한 모습에 심장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그것은 채선의 기저에 깔린 두려움과 맞닿아 있었다. 저와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속으로는 꺼림칙함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 공포는 늘 그녀를 주눅 들게 했다.

    그때였다.

    “어?”

    몇 걸음 걷던 채선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툭.

    그녀의 이마 위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툭.

    이번에는 콧등 위에. 

    투둑. 

    뺨과 눈꺼풀 위에도.

    가게 앞에 소금을 내어놓고 파는 털북숭이 사내가 푸른 하늘을 한 번, 우두커니 서 있는 채선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급하게 언성을 높였다.

    “얼른 소금 들여놔라. 비 온다!”

    “예? 비라니요?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

    “저기 봐라, 저기. 역신이 지나가잖느냐. 분명 비가 올 것이다! 잔말 말고 소금이나 들여놓아라.”

    그와 동시에 후드득 빗방울이 쏟아졌다. 불평을 늘어놓던 젊은 청년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다가 주인의 호통 소리에 놀라 헐레벌떡 소금 독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채선이 의기양양하게 비옷을 꺼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놀라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채선만이 여유롭게 우장을 걸쳤다. 기름 먹인 겉옷을 어깨에 척 두르고, 역시나 기름 먹인 삿갓을 머리에 썼다. 

    “아이고,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이게 갑자기 뭔 일이래?”

    얼굴을 가리고 나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아차. 꾸물거릴 때가 아니지.”

    마을로 내려올 때와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톡톡, 머리를 때리는 빗방울이 마치 노랫소리처럼 경쾌했다. 채선은 빨라지는 빗소리에 맞춰 조금씩 걸음을 서둘렀다. 

    비에 젖은 산길은 제법 험했다. 여기저기 움푹 파인 구멍에 흙탕물이 고여 있었다. 웅덩이를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채선이 “으악!” 하며 나직한 비명을 질렀다. 

    미끄덩한 흙을 밟은 발이 죽 밀렸다. 균형을 잃은 몸이 커다랗게 휘청거렸다. 채선은 두 팔을 휘저으며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으아아, 안 돼. 여기서 넘어지면…….” 

    빨래가! 아니, 언니 잔소리가!

    “으라차차!”

    간신히 넘어지는 것만은 면한 채선이 기우뚱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며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휴, 큰일 날 뻔했네.”

    사투를 벌이느라 쩍 벌어진 두 다리를 모으며 채선이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응? 누구지?” 

    찰박찰박.

    질퍽한 흙을 지르밟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말발굽 소리도 들렸다. 채선의 얼굴이 점점 더 영문 모를 빛을 띠었다. 

    그녀의 집은 마을과 동떨어진 산자락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버지가 그곳에 터를 잡은 연유는 알지 못했지만 궁핍한 살림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른 지역으로 통하는 길목도 아니었고, 귀한 약초가 나는 비밀의 숲도 아니었다. 간혹 길을 잃은 약초꾼이나 마주칠 뿐 사람 그림자라곤 볼 수 없는 외진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채선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두 발은 얌전히 풀숲으로 물러섰다. 말을 타고 온다는 건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괜히 그들과 엮여서 좋을 건 없었다.

    커다란 떡갈나무 나무 아래에 선 채선이 반쯤 고개를 숙였다. 삿갓이 늘어지며 그녀의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그와 동시에 길 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말을 탄 남자를 필두로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좁은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들은 빗방울에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내디딜 따름이었다. 

    기분 탓인지, 묘하게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정말 이상하네?

    채선은 삿갓 너머로 사내들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말을 타고 있는 이는 눈이 작고 턱이 뾰족한 게 꼭 생쥐처럼 생겼다. 그 뒤를 칼을 찬 무사들이 마치 호위하듯이 걸어갔다. 

    높은 사람인가?

    그들이 모퉁이 너머로 모습을 감추고 나서야 채선은 검지로 삿갓을 살짝 밀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무도 없는 모퉁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는 물음에 채선의 고개가 한 뼘쯤 기울었을 때.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퍼뜩 정신을 차린 그녀가 풀숲에서 나와 다시금 걸음을 서둘렀다. 채선은 가파른 산길을 쉴 틈도 없이 걸어 올라갔다. 약초를 캐기 위해 온 산을 누비느라 체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런 채선의 숨이 턱에 찰 즈음, 눈앞에 허름한 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 다녀왔어.”

    마당에 들어선 채선은 곧장 툇마루로 향했다. 비옷을 벗자 맺혀 있던 물방울들이 주르륵 떨어지며 발밑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기름 먹인 천 한 장으로 쏟아지는 비를 모두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채선의 어깨며, 발목이 흠뻑 젖어 있었다.

    부르르, 몸을 덮치는 한기에 가볍게 어깨를 떤 채선이 삿갓을 기둥에 걸었다. 방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채선의 눈썹이 의아한 듯 치켜 올라갔다. “거봐, 역시 비가 올 줄 알았다니까? 내 말이 맞았지?” 하며 웃음을 터뜨릴 이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렇다고 이선의 놀림을 기대했다는 건 아니고.

    “언니?”

    집 안이 유난히 고요했다. 콜록콜록,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듯 방 안에서 어미의 마른기침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왔다. 이유 없이 등골이 서늘했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킨 후 조심스럽게 툇마루 위로 올라섰다. 

    “고생했어.”

    삐걱, 방문이 열리며 이선이 방 밖으로 나왔다. 영문도 모른 채 안도의 한숨을 터뜨린 채선이 “뭐야, 왜 이제 나와.” 하며 괜한 투정을 부렸다. 

    채선은 비에 젖지 않도록 품속에 고이 넣어온 약을 꺼냈다. 으스대는 듯한 목소리가 이선을 향했다.

    “이건 엄마 약이고, 이건 약방 주인이 언니한테…….”

    “채선아.”

    이선이 채선의 말을 중간에서 싹둑 잘랐다. 

    “응?” 

    채선은 두 눈을 끔뻑이며 이선을 쳐다보았다. 왠지 심상치 않은 모습에 반쯤 벌렸던 입을 도로 다물었다. 길어지는 침묵에 채선의 인내심이 점점 얇아질 즈음 이선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공기를 갈랐다.

    “할 말이 있어.”

    “무슨 말?”

    채선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기운을 느낀 탓이었다.

    “여기서 할 말은 아니고. 일단 방으로 들어와.”

    이선이 먼저 등을 돌렸다. 콜록콜록, 안방에서는 여전히 어미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채선은 안방 문에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이선의 뒤를 따라갔다.

    차가운 손이 목덜미를 움켜쥔 것처럼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채선의 경악성이 좁은 방을 흔들었다. 채선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동요를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운 시선이 이선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툭. 투둑.

    흙빛이 된 채선과 달리 정작 말을 꺼낸 이선은 담담했다.

    그래서 채선은 이 상황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우습지도 않은 농담을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조금 전 마주쳤던 한 무리의 사내들이 떠올랐다. 

    설마, 그들이?

    그때, 이선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녀의 눈 밑에 짙은 그늘을 드리웠다. 우수에 젖은 아름다운 여인은 빗물을 머금은 한 떨기 수선화처럼 가련하고 애처로워 보였다.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

    더럭, 겁이 났다. 채선은 저도 모르게 이선의 손을 움켜쥐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겉보기와 달리 제법 거칠고 메말랐다. 그것은 흙 속에서 약초를 캐고, 찬물에서 빨래를 하는 손이었기 때문이다.

    쿵쿵, 채선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의 입술이 몇 번이고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한참 만에야 채선의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더듬거리는 말이 공기 중으로 뿌옇게 흩어졌다.

    “과, 광무대군이라고? 광무대군이라면…… 폐하의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던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 어쨌든 폐하의 아드님이시잖아! 그분이 왜!”

    당혹스러운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격양되더니 이윽고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

    채선의 쩌렁쩌렁한 외침 뒤에 찾아든 침묵은 평소보다 더 고요했다. 그새 비가 잦아들었는지 지붕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불온한 적막 위로 채선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만이 나직하게 춤을 추었다.

    잠시 후, 이선이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내 미모에 대한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 보지.”

    그녀의 무덤덤한 자기 자랑에 채선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하지! 눈 달린 사람이라면 언니가 예쁜 건 다 알지. 오늘만 해도 언니가 아니라 내가 약을 사러 왔다고 약방 주인이 어찌나 투덜…….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뒤늦게 정신을 번쩍 차린 채선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자가 언니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처럼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광무대군께서 왜?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글쎄.”

    이선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조용히 시선을 떨구었다. 짙게 드리운 눈 그늘 탓에 그녀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해진 채선은 그녀에게로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뭔가 불길해. 아무리 언니가 예쁘기로서니 광무대군 쪽 사람들이 수도 외곽, 게다가 산중에 사는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고? 백번 양보해서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단 말이야.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래서? 언니는 뭐라고 했어? 설마 승낙한 건 아니겠지? 거절하고 돌려보냈지?”

    조급한 채선과 달리 이선은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가 말없이 채선을 들여다보았다. 

    어깨를 짓누르는 침묵에 채선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목구멍이 콱 막혔다. 채선의 입술이 달싹였다.

    “……아, 니지?”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이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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