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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인의 별?
하늘은 까마득하게 높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부서지는 햇살은 봄날의 온화함을 품었고, 자잘한 바람은 청명하게 흩날렸다. 날씨마저 완벽한 최고의 하루였다.
악공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너른 공간을 빈틈없이 채웠다. 허공을 가르는 선율은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며, 질세라 목소리를 높이는 휘파람새의 노래는 마치 그들과 합을 맞춘 것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 채선뿐이었다. 붉은빛 치맛자락이 너울너울 춤을 췄다.
“…….”
그녀는 혼례가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도록 발끝만 쳐다보는 시선이 이따금 바람에 흔들렸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곤 하나 바윗돌같이 무거운 죄책감이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다.
“신부 되시는 분이 수줍음을 많이 타시나 봐.”
“그러게. 여태 얼굴 한 번을 안 보여 주시네.”
“설마 신랑 되시는 분이 마음에 안 드시나?”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하인들의 목소리에 채선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행동에 신랑이 욕을 먹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조금씩 움직이는 시야 속으로 매끈하게 무두질 된 가죽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 푸른색 포 자락과 옥으로 만든 허리띠, 너른 어깨가 차례로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침내 채선의 시선이 신랑의 얼굴에 닿는 순간.
“흡!”
채선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동그란 눈이 한계까지 벌어지고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가볍게 미소 띤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신랑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가볍게 눈썹을 들썩였다.
“?”
채선은 흙빛이 된 얼굴로 한 발 뒤로 물러섰고, 남자는 봄바람처럼 다정한 미소를 건넸다. 일순,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시야가 아찔했다.
“괜찮으십니까?”
등 뒤의 하녀가 비틀거리는 채선을 붙잡았다. 그러나 채선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맙소사.
채선의 잇새로 소리 없는 경악성이 터졌다. 주춤주춤, 겁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영산홍이 분홍빛 꽃망울을 터뜨리고, 연두색 나뭇잎이 너울너울 흔들리던 봄. 그 시작의 순간이.
***
“때가 되었습니다.”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턱이 뾰족하고 체구가 작은 사내는 묘하게 생쥐를 닮았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동자가 더욱 그랬다.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혼자였던 사내의 등 뒤에 어느새 또 하나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달지.”
광무대군이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사내는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했다. 그는 눈앞의 청년이 좋았다. 황제의 여섯 번째 아들임에도 황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는 그가.
“제가 일전에 귀인의 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군.”
광무대군이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달지는 옅은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태조께서 이 나라를 세우실 때. 아니, 더 멀리는…… 구려가 그랬듯, 나백이 그랬듯, 이 땅에 모든 나라가 처음 일어설 때, 혹은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할 때, 용의 곁에는 항상 귀인이 있었습니다.”
“그래. 기억이 나는군. 자네가 그 말끝에 이렇게 덧붙였었지. 다시 말해, 귀인을 얻으면 천하를 움켜쥘 수 있다.”
“예.”
달지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광무대군은 승계 서열 한참 뒤에 있었지만,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달지는 야심에 가득 찬 이에게 점술가가 얼마나 훌륭한 도구가 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한 마디에 좌우되는 황제라.
어쩌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점술가일지도 모른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불안감이 크고, 자신을 안심시켜줄 이를 찾기 때문이다.
황제를 조종하는 점술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남자, 광무대군이 황제가 되어야 했다. 달지는 혀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매끄럽게 말을 이어갔다.
“별자리가 부산한 것을 보니 곧 폐하께서 태자 전하께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실 듯합니다. 이제 긴 잠을 자던 이무기가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황제가 되고 난 뒤에는 일이 더 복잡해지니 우리가 먼저 선수를 쳐야지요. 그에 앞서.”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달지가 고개를 들었다. 일순, 그의 눈빛이 번득였다. 달지의 목소리가 한층 낮고 진중해졌다.
“이무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느냐, 혹은 그대로 고꾸라지느냐…….”
달지의 말에 광무대군의 낯이 서슬 퍼런 빛을 띠었다. 성공하지 못한 반란이 어떤 종말을 맞이하는지, 누구보다 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춘 달지가 광무대군에게로 한발 다가섰다. 그가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대군께서는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를 데려오셔야겠습니다.”
“귀인의 별이라.”
광무대군이 달지가 한 말을 뇌까리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하늘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쏟아질 듯한 별들이 그저 흩뿌려진 소금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오. 이럴 수가!”
별안간 달지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숱이 적은 눈썹이 휘어졌다.
“무슨 일이냐.”
광무대군의 물음에 달지는 생쥐 같은 얼굴로 씩 웃었다. 커다란 앞니 두 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귀인의 별 뒤에 또 다른 별 하나가 숨어 있었습니다. 하늘의 흐름이 바뀌면서 숨어 있던 별이 우연히 그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별? 그것이 무엇이냐?”
달지의 알쏭달쏭한 말에 광무대군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을 재촉했다. 달지가 두 손을 소매 속에 슥 집어넣으며 뒷말을 이었다.
“흉인의 별입니다.”
“흉인의 별?”
왠지 심상치 않게 들리는 그 단어에 광무대군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그러나 달지는 그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희미하게 웃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낮과 밤이 있고, 여름과 겨울이 있으며, 음과 양이 있는 것처럼 귀인의 별이 있다면 흉인의 별이 있는 것 또한 당연한 세상의 이치. 귀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가 행운을 가져다준다면, 흉인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이는 불행을 가져오지요. 흉인은.”
거기서 잠깐 말을 끊은 달지가 광무대군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흉인은 곁에 있는 이를 파멸로 이끕니다. 향락에 빠져 수하들의 손에 목이 잘린 황제, 후궁의 치마폭에 싸여 옥좌에서 쫓겨난 천자, 대의를 가지고 궐기하였으나 황제의 손에 목이 잘린 영웅.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들은 용이 되지 못하고 고꾸라졌지요. 그리고 그들의 곁에는 늘 흉인이 있었습니다.”
광무대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짙은 어둠만 노려봤을 뿐이다. 그 모습을 보던 달지가 씩 웃으며 호언장담했다.
“허나,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광무대군께는 저, 달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대군께 귀인을 바치겠습니다.”
“좋다. 너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길을 떠나라. 그리고 내게 그 귀인을 데려오라.”
그 말을 끝으로 광무대군이 먼저 등을 돌렸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달지가 마지막으로 밤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광무대군의 별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자신이 천하의 패권을 쥘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달지의 얇은 입술이 씩 말려 올라갔다.
***
철퍽.
불길한 소리와 함께 정수리가 뜨끈해졌다. 채선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더듬었다.
“윽.”
그녀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두어 걸음 앞서 걷던 이선이 걸음을 멈추고 그런 채선을 돌아봤다.
“왜, 무슨 일…….”
무심코 입을 열던 그녀가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선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큭.”
하지만 미처 삼키지 못한 웃음이 입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이선이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큼큼.”
애써 웃음을 갈무리한 이선이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채선을 바라보았다. 채선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새똥이 묻은 손가락을 허공에 탈탈 털던 채선이 기어코 울상을 지었다.
이선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또 새똥을 맞은 거야?”
“……응.”
“큽.”
채선의 울적한 표정에 이선은 또다시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삼켰다. 다행히 채선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이선의 목소리가 채선을 향했다.
“어휴, 어떻게 된 게 온 동네 새똥이란 새똥은 너 혼자 다 맞고 다니니?”
“우이씨.”
누군 좋아서 새똥을 맞고 다니냐는 듯, 채선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이선을 흘겨봤다. 그 모습에 결국 이선의 웃음보가 터졌다.
“아하하.”
해사한 웃음이 연둣빛으로 물든 나뭇잎을 흔들었다. 저렇게까지 시원스레 웃으니 오히려 화를 내려던 마음이 싹 사라져 버렸다.
채선은 어깨를 늘어뜨린 채 터벅터벅 걸어 이선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선이 넓적한 나뭇잎을 톡 따더니 채선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손 이리 줘 봐.”
뚱한 얼굴로 서 있던 채선이 못 이긴 척 한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을 다정하게 잡은 이선은 새똥이 묻은 손가락을 닦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나뭇잎 한 장을 톡 따더니 이번에는 채선의 정수리를 문질렀다.
힐끔, 눈동자만 들어 이선의 목덜미를 올려다본 채선이 그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언니.”
“이럴 때만 언니지? 엄마가 안 볼 때는 ‘야’, ‘너’라고 부르면서.”
“……내가 언제.”
찔리는 게 많은지라 채선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사실 채선이 이선을 막 대한다고 해서 마냥 그녀를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채선으로서는 고작 일각 먼저 태어난 이선을 꼬박꼬박 언니라고 부르는 게 억울할 법했다.
하지만 채선이 이선을 두고 언니라 부르기 싫다며 고집을 부릴 때마다 그녀의 어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채선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너희가 쌍둥이라는 걸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이선이 너는 한 해 먼저 난 언니고, 채선이 너는 한 해 늦게 태어난 아우다. 엄마 말 명심해야 한다, 알겠니?’
채선은 어머니가 신신당부하는 연유를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팔을 움켜쥔 우악스러운 힘에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굵어지면서 채선은 어미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알게 되었다. 굳이 그들이 말하지 않는 이상, 두 사람이 쌍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쌍둥이라고 외치고 다닌다 해도 그중 절반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두 사람은 생김새부터 행동, 성격까지 모든 것이 판이하게 달랐다.
눈에 띄게 아름다운 외모에 자신만만한 성격을 가진 이선과 수수한 얼굴에 소심한 성격을 가진 채선.
그중에서도 가장 다른 건.
“언니는 태어나서 새똥이라곤 맞아 본 적도 없지?”
볼에 바람을 넣은 채선의 뚱한 물음에 이선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채선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새똥의 냄새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새똥 맞은 사람을 타박할 자격도 없는 거야.”
“그것보다는 네가 너무 많이 맞는 거지. 이쯤 되면 이 산에 있는 새들의 똥을 모조리 맞아 본 거 아니니? 그 정도면 새똥만 보고도 어떤 새인지 알아맞힐 수 있을 경지에 이르렀겠는데.”
“윽! 자꾸 그러면 언니 앞에서 똥 싼다! 언니도 똥만 보고 누구인지 맞춰 볼 거야?”
“으, 더러워.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니?”
바로 이거다. 이선은 보통 사람보다 운이 좋은 반면, 채선은 보통 사람보다 운이 나쁘다는 것. 아니, 그걸 운이 나쁘다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