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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81)화 (181/181)
  • 181화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에 벙쪄 있었다. 그걸 무반응이라고 생각한 건지, 에클레어가 슬쩍 덧붙였다.

    “…혹시, 나는 친구로 부족해요?”

    “아, 아뇨! 완전 환영! 언니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에클레어 경!”

    내가 앞뒤 없이 그녀의 손을 맞잡고 냅다 외쳤다. 에클레어가 붉어진 뺨으로 어색하게 답했다.

    “그, 그래, 크레페.”

    그때 에이미가 방문을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아가씨? 식당으로 오시겠어요?”

    “아, 네!”

    “너 먼저 가 있어…….”

    에클레어가 내게 손사래를 쳤다.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 날 대하기가 부끄러운 듯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며 팔찌를 당겼다. 손목 관절에서 탁 걸리는 느낌이 났다.

    …안 빠진다.

    * * *

    내일 아펠이 오기 전까진 빠지겠지.

    시간도 남았겠다, 편히 생각하기로 마음먹고 식당으로 돌아왔다. 본래 티 타임은 정원에서 주로 했지만 이번엔 오빠들의 식사가 끝나지 않아 여기에 준비한 모양이었다.

    “아가씨… 이런 일엔 딴 녀석 좀 부르면 안 됩니까? 저도 이제 단장이라고요…….”

    달고나 거품을 만들기 위한 노동력으로 차출되어 온 마르크가 울상을 지었다. 언젠가 아빠가 있는 변방으로 전출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그는 결국 선대 기사단장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로 피낭시에 제2 기사단의 단장으로 말뚝을 박아버렸다.

    카눌레가 황실 기사단에서 경력을 쌓고 변방으로 나갈 때 함께 가는 게 목표라고 하는데, 부디 그 목표가 이뤄지기를 바랄 뿐이다.

    “성녀님께 투정은 금지입니다.”

    에이미는 저보다 훨씬 몸집이 큰 마르크를 가볍게 끌고 나갔다.

    “엄마는?”

    “영지 일이 남아서 집무실.”

    카눌레의 대답을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어제 팔찌를 만든다고 밤늦게까지 잠을 못 잤더니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싶었다.

    두 명이 아직 식사 중이었기 때문에 디저트도 나와 메이플 두 명분이 다였다. 메이플은 눈앞에 놓인 갈색의 거품 같은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 메이플은 아직 어리니까 커피 금지야.”

    내가 단호히 말하고는 메이플 앞에 놓인 잔을 식사 중인 카눌레 앞으로 옮겼다. 그가 시무룩해진 메이플을 보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메이플보다 어릴 때 저거 먹지 않았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마들렌을 입에 넣었다.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식감과 함께 마들렌이 입 안에서 바스러졌다. 레몬즙을 넣었는지 상큼한 향도 났다.

    나는 만족스럽게 손가락에 남은 가루를 쪽 빨아 먹고는 달고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쌉싸래한 거품 밑으로 부드러운 우유가 밀려 들어왔다. 마들렌과 섞여 달달해지는 맛의 변화를 감상하는 동안 카눌레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걸 그, 뭐라 그러더라. 나는 되지만 너는 안 돼, 하는.”

    내가 우유를 꿀꺽 삼키고 말했다.

    “내로남불?”

    “이중 잣대 말이야?”

    동시에 대답한 갈레트가 날 멀뚱히 쳐다보았다.

    “내로남불이 뭐야?”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머쓱하게 고개를 젓는 동안 메이플은 햄스터처럼 입술을 비죽이며 마들렌만 갉아 먹고 있었다. 그는 결국 커피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삐친 듯 입술을 비죽거리고는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나 브라우니랑 놀래!”

    “그럼 정원에 다시 준비할게요.”

    에이미가 다른 고용인들을 불러 디저트를 정원으로 옮겼다. 나도 컵을 들고 슬쩍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랐다.

    * * *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한 갈레트와 카눌레를 두고, 나와 메이플만 정원으로 나왔다. 이미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브라우니가 달려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삐유웃!”

    “브라우니다!”

    메이플이 총총히 뛰어가 브라우니를 품에 안았다. 이산가족 상봉한 듯 서로를 반기는 둘을 보며 나는 가제보 안에 들어가 앉았다.

    고용인들은 테이블에 마저 접시를 올린 후 각자 일을 하러 떠났다. 나는 메이플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는 아펠을 떠올렸다.

    그가 변방으로 떠난 이유는 마법사로서 일대를 재정비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금술을 쓰던 뢰드그뢰드가 갇혔다지만 변방이 완전히 안전해진 것도 아니었기에, 아펠은 자신이 가진 마나를 이용해 일 년에 두 번 정도 몬스터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사실 나도 마법에 일가견이 있고, 처음엔 아펠 걱정에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괜찮아, 내가 갈게. 나도 네가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다 알아버렸잖아.’

    그렇게 말하며 날 말리던 아펠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저번 생에 변방에서 참 별일을 다 겪었지.

    수련회 때는 인간 미끼도 됐고, 바움쿠헨에서 밀입국도 해봤고, 갈레트에게 죽을 뻔도 하고.

    확실히 아펠이 걱정할 만도 했다. 그래서 나도 그가 변방을 돌아다니는 동안 여기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처음 맞는 봄에 낭군님 없이 카페인 충전이라니, 너무 처량한 것 아니오…….

    나는 영혼이 빠져나간 눈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삐유?”

    브라우니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하곤 몸을 털었다. 이슬을 머금은 잔디 위에 뒹굴었던 녀석은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이번엔 꽃밭 위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메이플이 녀석을 쫓아 술래잡기하듯 달려간 후, 에이미가 트레이를 끌고 와선 팬케이크와 케이크, 홍차를 더 내려놓았다.

    나는 팬케이크 위에 부을 시럽 잔에 손을 뻗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착각인가? 이 상황에 데자뷔 같은 게 느껴지는데.

    그 순간, 주변 마나가 일렁이더니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포도처럼 탐스럽게 매달린 등나무 꽃잎이 후드득 떨어져 내리며 사락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메웠다.

    보드라운 꽃잎은 내 뺨을 스치고 한데 모였다. 꽃보라가 사라진 그곳에, 동화의 한 장면처럼 아펠이 서 있었다.

    예정보다 이른 그의 방문에 놀라기도 전에 나는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역시…….

    “…왜 익숙하지?”

    “꿈에서라도 본 거 아냐?”

    아펠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소리가 다시금 귀에 들어왔다.

    “어, 어른 불러올게!”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놀랐는지 메이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식당으로 내달렸다. 나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펠을 맞았다.

    “아니, 그나저나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변방에서 다른 사람들이랑도 인사하고 오기로 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매, 매번 그런 식으로…….”

    “안 돼?”

    “…아니.”

    젠장, 내 패배다.

    차마 그 얼굴에 대고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심 패배감에 주먹을 떨자 아펠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진짜 중요한 일은 다 끝냈으니까 걱정하지 마.”

    “응…….”

    “크흠!”

    나와 아펠의 상봉에서 자연스레 뒷전이 되어 있던 인물이 들으라는 듯이 헛기침했다. 새까만 후드를 눌러쓰고 있길래 그림자인 줄 알았…다는 건 사실 핑계고, 나는 뒤늦게 그의 존재를 알아채고 머쓱하게 인사했다.

    “파타슈 님도 어서 오세요.”

    파타슈가 후드를 벗으며 짧게 인사했다. 그는 마법적 재능을 인정받아 아펠의 수행원으로서 동행하고 있었다.

    아펠 황태자와 그의 심복 파타슈라니, 원작을 보는 것 같아서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

    나는 웃음을 삼키며 아펠의 어깨에 붙은 꽃잎을 손으로 털어주었다.

    “이건 뭐야?”

    아펠이 멀어지려는 내 손을 붙잡았다. 펜리르의 영혼과 나란히, 심플한 팔찌가 하나 더 채워져 있었다.

    “너, 너 주려고 만들었는데… 안 빠져서.”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웅얼거리듯 대답하자 아펠은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사용해 팔찌를 늘리고는 제 손목에 채운 후 다시 줄였다.

    마법진 없이 마나 컨트롤만으로 이런 게 가능하다니, 아펠도 명실상부한 정식 마법사였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새 팔찌를 매만졌다. 그리고 수줍은 듯, 혹은 자상한 듯 눈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 크레페.”

    …빨리 단둘만 있고 싶다.

    반사적으로 파타슈를 곁눈질했다가 딱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얼굴을 와락 구겼다. 아무래도 그가 싫어하는 달콤함은 디저트 한정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키슈가 이런 얘길 너무 좋아하는 데 대한 반작용일지도?

    “아, 린처 님 소식은?”

    파타슈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잊고 있던 용건을 떠올리고 물었다. 변방에 나가는 김에 인근 바움쿠헨국의 상황도 알아보고 오겠다던 아펠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차기 플뢰데 후작으로서 공부 중이래. 디몬의 품에 귀의하겠다고 공언하던데, 아마 마법을 공부하겠지. 소질이 없다면 신학자가 되겠고.”

    갈레트만큼의 천재는 아니지만 그 역시 뛰어난 수재임엔 이견이 없었다. 그가 진로를 정한 계기가 디몬… 아니, 나라는 건 조금 낯 뜨거웠지만 마음을 잡는 데 내 말이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순수하게 기뻤다.

    “슈트루델의 귀족이 된다면 내가 후원해 주는 방법도 있을 텐데.”

    “아냐, 충분히 잘해 나갈 수 있겠지.”

    린처를 생각하면 내 옛날 모습이 떠오르곤 했다. 내가 나를 짓누르던 전생의 기억에서 벗어나 마침내 행복을 찾았듯, 그 역시 자신의 능력과 타고난 심성으로 충분히 눈앞의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고개를 젓고 미소 짓자 아펠이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었다.

    저를 보라는 듯한 그의 행동에, 나는 아펠의 가지런한 눈썹을 손끝으로 쓸어보다가 문득 그의 눈에 비친 나를 발견했다.

    별안간 새벽에 꾼 꿈속에서 디몬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내가 왜 그것을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했는지가 떠올랐다.

    온통 흰색으로 가득한 서고와 거기에 무한히 늘어선 책장.

    그 가운데 서 있는 자는 디몬의 원래 모습도, 아펠이나 가족, 친구의 모습도 아니었다. 거울을 마주한 듯 포동포동한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제 증명된 것 같구나.’

    거기에 수수께끼 같던 디몬의 마지막 말.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에도 나는 그 꿈의 내용을 굳이 떠올려 보지 않았다. 이후에 꾼 결혼식 꿈이 그러했듯 디몬을 본 것도 그저 어수선한 꿈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디몬은 내가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니 진짜 그였다면, 나보다는 차라리 예쁘고 깜찍한 아펠로 보였을 것 아닌가.

    “크흠!”

    내 잡념을 깨뜨리고 누군가 생기침을 했다.

    “에헴, 아무리 태자 전하라 하셔도 이리 언질 없이 오시는 건…….”

    고개를 들자 갈레트가 대놓고 큼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슈트루델 제국의 차기 황제를 상대로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빠도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지!”

    “읍.”

    장난스레 외친 내가 아펠의 멱살을 당겨 입술을 한차례 부닥쳤다. 놀란 표정이던 아펠이 금세 날 꽉 마주 안았다.

    갈레트는 놀란 나머지 입을 뻐끔거리며 굳어버렸고, 양손으로 엄마와 카눌레를 잡아끌던 메이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막 저택에서 나오던 에클레어도 이쪽을 쳐다보았다.

    “갈까?”

    내가 아펠의 팔을 당겨 부추기자 그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갈레트가 목청껏 외쳤다.

    “적어도 우리 집에선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아아!”

    나는 아하하, 하는 웃음만 남기고 아펠과 함께 투명화로 숨어버렸다.

    아펠이 내게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왔다. 나는 새파란 눈동자 속에 비친 나를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꿈속의 디몬이 왜 내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보고 싶어 한 건 바로 지금의 나.

    제일 행복한 이 순간의 모습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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