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 에필로그 】
결혼식이 열리는 홀은 휘황찬란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번쩍거렸다. 좌중들 사이에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 공중을 떠다니는 마법등과… 브라우니.
아니, 너 너무 당당하게 날아다니는 거 아니니?
“브라우니.”
파타슈가 내 시선을 읽은 것처럼 녀석의 이름을 불러 품에 안았다. 그 옆에 선 키슈는 손수건을 잘근거리며 슬픔을 삭이고 있었다.
실 같은 캐러멜과 금가루를 올린 크로캉부슈는 천장에 닿을 것처럼 높았고, 고용인들은 소리 없는 잰걸음으로 음식을 날랐다. 이런 화려한 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메이플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특히나 디저트가 있는 쪽을.
“…누나.”
“응?”
“여긴 천국이야……?”
“풋.”
“제발 꿈이라면 깨지 마라…….”
아이가 두 손을 모으고 진지한 얼굴로 기도했다.
그 귀여움에 못 이긴 내가 메이플의 머리를 쓰다듬자 올백으로 넘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밀 크레프 살레 쉬제트 님, 앞으로.”
나와의 인연으로 주례를 맡게 된 피오르가 연단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앞에는 예복을 차려입은 아펠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단상을 장식하는 짙은 남색 휘장 아래 반짝이는 은빛의 머리카락, 그리고 그보다 눈부신 미모.
크으, 취한다!
잔뜩 차려입은 아펠에게 감탄하고 나니 어느새 내 옷도 결혼식 드레스 차림이었다. 갑작스런 전환에 당혹스러워할 새도 없이, 나는 금실과 꽃으로 치장된 카펫 위를 걸어 아펠의 손을 맞잡았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을게. 너도 내 옆에 있어줘.”
아펠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곤 맹세의 말을 속삭였다.
“널 위해 살 거야. 널 위해, 죽지 않을 거야.”
그 말이 꼭 무언가를 알고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아펠이 생긋 웃었다.
“이번에야말로 약속 지킬 테니까, 일어나.”
…응?
“일어나라고.”
아펠의 입술이 뻐끔거린다 했더니 갑자기 결혼식장의 문이 쾅 열리며 에클레어가 등장했다.
“밥 먹어야죠!”
* * *
진저리를 치며 눈을 떴다. 결혼식 꿈이 악몽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깨어나다니 아펠을 볼 면목이 없었다.
물론 이게 다 에클레어가 워낙 험하게 깨웠기 때문이겠지만.
그러고 보니 결혼식 꿈 전에 디몬이 나오는 꿈도 꿨던 것 같은데…….
“아직도 자?”
비몽사몽간 기억을 되짚어 보려던 찰나 에클레어가 성큼성큼 방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창가 커튼을 걷었다. 내 눈을 찌르는 햇빛이 따가워서, 나는 결국 꿈 내용 떠올리기를 포기했다.
에잇, 기억 안 나는 걸 보니 개꿈이 맞겠지.
“으으, 모처럼 왔는데 좀 자게 두면 안 돼……?”
봄바람이었지만 아침에 쐬기엔 충분히 차가웠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자 에클레어가 다가와 힘겨루기 하듯 이불을 잡아당겼다.
“모처럼 왔는데 자고만 있을 겁니까? 햇살도 좋은데 아침 산책이라도 좀 하시죠!”
“악!”
졸지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진 내가 엉덩이를 문대며 에클레어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졸업 후 크렘과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황실 기사단에 들어가 크바스의 후배가 되었는데, 그것도 결혼 후에 문제없이 기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황실 기사단은 수도와 가까운 황궁 외성에 머물며 출퇴근을 할 수도 있으니까.
참고로 카눌레는 몬스터와 대적하기 위해 변방에 있는 기사단에 지원했지만 싸그리 낙방하고, 지금은 에클레어의 1년 후배로 근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펠과의 결혼식 이후, 나는 쉬제트 저택을 떠나 황태자비로서 정식 입궁했다.
그 과정에서 함께하게 된 호위 기사가 바로 에클레르 오 바니유, 여기 에클레어 언니라는 얘기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어쩌면 이것도 운명적 이끌림 어쩌고랑 관계가 있는 걸까?
“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새 나라의 어른이죠.”
에클레어는 내 원망의 눈초리를 못 본 척 뻔뻔하게 웃었다.
“씨이, 아펠한테 이를 거야.”
“카눌레 괴롭힐 거야.”
“…….”
벌써 날 다루는 방법을 파악했군.
내가 더 반항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져보면 에클레어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모처럼 친정에 돌아왔는데 침대에만 있긴 아깝지. 그래서 어제도 늦게까지…….
문득 허전한 기분이 들어 침대 시트를 들치고 책상을 뒤졌다. 에클레어가 영문을 모르고 가는눈을 떴다.
아, 갈레트 방에 놓고 왔나 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메이플이 들어왔다.
“누나, 밥 먹으러 가자!”
* * *
꿈 종반부에는 에클레어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엉망이 됐지만, 실제 결혼식장에서 아펠이 내게 해준 맹세의 말만큼은 꿈속에서도 선명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결혼식이 끝난 후에 들었다. 종종 꿈에서 디몬을 봤다거나 거기서 자신의 소예언서를 봤다거나 하는 얘기 말이다.
아펠이 마지막으로 디몬을 본 건 황비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었다고 한다. 그때 디몬이 황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아펠이 화를 냈댔나?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 달리 할 말은 없지만, 아무튼 당시의 아펠은 성녀인 내게 차마 디몬의 뒷말을 늘어놓을 순 없었을 거다.
“으으, 아펠 보고 싶다…….”
메인 요리로 나온 스테이크를 깨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듣고 엄마가 풋 웃었다.
“신혼이 좋긴 좋나 보네.”
“태자 전하?”
메이플이 아펠의 이름을 알아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누가 카눌레의 최애 동생 아니랄까 봐 접시에는 구운 당근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편식하는 음식까지 저렇게 똑 닮아 있다니, 아무튼 안 좋은 것만 배웠다니까.
“언제 오신다구 했지?”
“내일.”
“내일!”
메이플이 반색하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녀석이 아펠을 기다리는 이유는 뻔했다. 아펠이 이곳에 들를 때마다 디저트를 선물로 들고 오기 때문이다.
아마 메이플의 머릿속에서 아펠은 ‘간식 잘 챙겨주는 잘생긴 형아’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메이플, 얌전히 앉아야지.”
“네에.”
결국 엄마에게 저지당한 메이플이 입가에 묻은 스테이크 소스를 닦고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엄마는 다소 복잡한 표정이었다.
지금 아펠이 있는 곳은 우리 아빠가 수호하는 변방. 그런데도 메이플은 아빠의 ‘아’ 자도 안 꺼내고 있었으니까.
“제가 이따 아빠한테 연락해 볼게요.”
“할아버지?”
“…….”
“아, 아빠…….”
엄마가 입을 다물고 정색하자 메이플이 슬쩍 고쳐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웃어버렸다.
메이플이 아빠를 만난 건 지금까지 두 번이 전부였다. 처음은 녀석이 두 살쯤 됐을 때라 기억하지 못할 거고, 두 번째는 내 결혼식 전날이었다.
그때 메이플은 막 귀가한 아빠를 향해 할아버지냐고 물었다. ‘수염이 났다=할아버지’라는, 메이플의 이분법적 사고방식 때문에 충격을 받은 아빠는 그날 이후 성실히 수염을 밀겠다고 맹세했다나.
“크레페!”
그 순간,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짐을 풀어놓기도 전에 식당에 난입한 금발 머리의 남자는 물론 갈레트였다.
“도련님들이 도착하셨습니다.”
한 박자 늦은 에이미의 알림을 듣자마자 메이플이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녀석이 갈레트의 뒤에 가려져 있던 카눌레에게 달려갔다.
그다음은 보지 못했다. 갈레트가 날 껴안는 통에 시야가 가려서.
* * *
갈레트는 피오르의 공방에, 카눌레는 황실 기사단 기숙사에 있다 오는 길이었다. 그들이 엄마와 안부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는 슬쩍 식당을 빠져나왔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에이미가 내게 먼저 물었다.
“네에, 이따 티 타임 때 달고나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마르크 경을 빌려주신다면요.”
조건을 거는 에이미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흔쾌히 마르크의 노동력을 지원하겠다 말한 내가 마저 걸음을 옮겨 갈레트의 방을 찾아갔다.
문을 열자 빈방이 으레 그렇듯 서늘한 공기가 엄습했다. 한쪽 벽에는 메이플이 태어난 후 아빠를 넣어 다시 그린 가족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넓은 책상에는 그가 연구하고 제작하는 마법 물품과 관련된 도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서 어제 내가 사용한 건 금속 제련기였다. 나는 제련기 옆에 놓았다 깜빡 잊어버린 팔찌를 들어 살폈다. 아펠의 눈을 닮은 사파이어가 가운데 박힌 팔찌는, 내가 가진 펜리르의 영혼과 비슷하지만 좀 더 심플한 디자인으로 만든 것이었다.
내가 팔찌를 선물받고 했던 전생의 다짐을 이제야 이룰 수 있게 되다니…….
그때였다.
“성녀님?”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문이 열렸다. 내가 화들짝 놀라 팔찌를 등 뒤로 숨겼다.
“뭐야, 왜 여기 와 있어요?”
고용인에게 물어 이곳을 찾아온 듯한 에클레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시간을 방해하다니, 아침에 깨어날 때를 포함해 오늘만 두 번째였다.
쳇, 이쁘니 봐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식사는 잘하셨어요? 불편한 건 없고?”
에클레어는 기사들과 함께 식사하게 되어 있었다. 내가 걱정 반, 말 돌리고 싶은 마음 반으로 묻자 에클레어가 피식 웃었다.
“전혀요. 뭐, 이런 거 무서웠으면 기사 못 하지. 기사 작위를 장식용으로 딴 것도 아니고. 내가 크렘도 아니잖아요?”
“아하하…….”
약혼자에게까지 독설이라니 에클레어답다고 해야 하나.
할 말이 없어 어설프게 웃었다. 그러자 에클레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하, 전하께 드릴 선물?”
어색한 포즈 때문에 눈치챈 모양이었다. 더 숨기면 오히려 민망하게 된 상황에, 내가 다시 팔찌를 살펴보며 말했다.
“뭐어… 맨날 붙어 있으니까 놀래주려면 이럴 때 몰래 준비해야지.”
“신혼이 좋긴 좋나 보네.”
저 말을 듣는 것도 벌써 두 번째였다. 그렇게 좋아 보이나, 하는 민망한 질문을 삼키고 내가 말을 돌렸다.
“크흠, 크렘 님께는 팔찌보단 반지가 좋겠죠?”
“…….”
그러자 에클레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크렘은 아직 사람들에게 자신의 눈 색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표정을 보니 약혼녀인 에클레어는 그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크렘이 자신의 눈 색을 밝히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성녀의 오빠와 동생이 적안(赤眼)을 가졌는데, 누가 그것이 악마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 내가 누굴 속여. 역시 성녀님! 대단하십니다!”
에클레어의 짓궂은 반응에 나는 미소로 답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에클레어도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별안간 찾아온 침묵이 어색해서, 나는 딴청을 피우며 팔찌를 내 손목에 끼워보았다.
그때 가만히 날 바라보던 에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게 싫어?”
“응?”
“아니… 네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뭔가 거리감이 느껴진단 말이야.”
에클레어는 이런 얘기를 하는 스스로가 어색한 듯 눈을 피하고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야 성녀님에 황태자비이신 분이니 나도 마냥 편히 대하기는 힘들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