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9)화 (179/181)
  • 179화 

    황비가 결혼 후 외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극소수뿐, 그 외 다수의 사람들은 아펠이 황제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만 알아도 입방아를 찧어대기 바쁠 것이다. 특히 자신들에게 보복할 리 없는 팔미에 황비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대체… 그 어리신 분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

    황제는 알현실로 이어지는 문을 쳐다보았다.

    - 폐하, 농은 그만하시찌요.

    황제가 성녀 크레페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

    아펠과 동갑이니 지금은 크레페도 열다섯의 영애였지만,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이 아직 뇌리에 선명히 박혀 있었다.

    “크레페, 아니 그분은…….”

    아펠이 입술을 떼자 황제가 그를 쳐다보았다. 아펠은 어디까지 얘기할지를 가늠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분이 바라는 건 자신의 행복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연인의 행복도, 가족의 행복도 아니지요.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기원하며 살고 있을 겁니다.”

    크레페가 바라는 미래에는,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보다, 연인보다, 가족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살고자 하는 사람.

    그래서 그녀가 성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펠이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운명을 바꾸겠다는 목적은 동일했으나 그의 행동은 크레페와 달랐다. 그 사실을 알고서부터 그는 황제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기가 고통스러웠다.

    “훗, 고집 하나는 알아줘야지.”

    맥락에 맞지 않는 웃음소리를 듣고 아펠이 황제와 눈을 맞추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마주 보는 대신 가만히 찻잔을 저었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네 마음을 말릴 생각은 없어. 성녀님을 황후로 맞을 수 있다면 슈트루델의 경사일 거다. 물론 팔미에도 기뻐하겠고 말이야.”

    은은한 라벤더 향이 그들뿐인 공간에 퍼졌다. 황제가 스푼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반대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펜리르의 영혼을 가져가도록 두지 않았겠지. 네가 몰래 케이크를 빼돌렸을 때도 그렇고.”

    “…감사합니다, 아버지.”

    인사를 들은 황제가 차를 마시려던 것도 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아버님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호칭은 아펠에게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본 황제는 곧 피식 웃으며 찻잔을 입술에 댔다.

    “오늘따라 향이 달구나.”

    * * *

    팔미에 황비는 살아생전 제 죽음보다 아펠의 미래에 초점이 맞춰지기를 바랐다. 제 사정으로 아펠을 사랑해 주지 못한 몇 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나마 보상해 주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밀리람 슈트루델 황제가 아펠의 책봉식을 더 미루지 않고 황비의 장례식과 같은 날 치르자 한 것도 고인의 유지를 받든 결과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펠은 슈트루델 제국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입증했다. 성녀 크레페의 발언과 아펠의 마력, 황제의 덤덤한 태도와 이들을 따르는 신수들이 이끌어 낸 결과였다.

    ‘크레페는 아직 아버님과 대화 중인가.’

    장례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책봉식에 대한 축하 인사는 끊이지 않았다.

    아펠은 귀족들의 인사에 대응하다가도 간간이 크레페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성녀라는 것에 의심을 품은 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크레페가 뢰드그뢰드와 대화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아펠의 눈에는 시린 한기가 어렸다.

    “…몽블랑 후작, 잠시.”

    “예?”

    몽블랑의 귀에 대고 뭐라 지시한 아펠이 머랭에게 눈짓하고 홀을 나갔다.

    머랭은 조금 천천히 그를 뒤쫓아 갔다.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가 으레 그러듯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였다.

    아펠은 별궁의 출입문 근처에 멈춰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곧 뢰드그뢰드가 빠른 걸음으로 홀을 나왔다.

    애초에 몽블랑에게 전한 말은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메드 플뢰데 후작을 불러달라는 것이었기에 놀라울 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몽블랑 후작이 부른 게 아닌가?’

    “플뢰데 후작?”

    아펠이 저를 부르자 뢰드그뢰드가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태, 태자 전하! 아, 아뇨, 저는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저 안에 성녀, 아니 사기꾼이, 절 협박…….”

    “미래의 황태자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크레페 성녀가……!”

    머랭이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아펠에게 따라붙었다. 녀석의 사나운 눈빛을 본 뢰드그뢰드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히고 뒷걸음질 쳤다.

    “제 말이 어려우셨던 모양이군요, 후작. 크레페 성녀는 저와 약혼할 사람입니다. 더 이상의 폭언은 저에 대한 모욕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아, 아니, 저는 그저…….”

    아펠이 검지를 세웠다. 작은 마법진이 나타나 뢰드그뢰드를 포박하듯 그의 몸을 조였다.

    “다시 얘기해 드릴까요?”

    아펠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고개를 까딱했다. 신호를 받은 머랭이 그들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우아한 걸음걸이였지만 뢰드그뢰드는 그 안에 숨겨진 위협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둔하진 않았다.

    아펠이 서늘한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서 죽기 싫으면 꺼져.”

    “그……!”

    아펠은 그 이상 변명을 듣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뢰드그뢰드의 몸이 투명해졌다. 머랭은 투명한 그를 마치 고깃덩이 물듯 한입에 넣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펠은 한층 개운해진 얼굴로 손을 털고 태연히 홀로 돌아왔다. 그의 입장을 기다리고 있던 듯 몽블랑이 금세 다가와 속삭였다.

    “전하, 방금 뢰드그뢰드 후작에 대해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만…….”

    하지만 아펠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았다. 마침 크레페와 눈이 마주쳐, 아펠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머랭을 데려다 놓고 왔어. 이제 시작할 거지?”

    “응.”

    크레페가 짧게 답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아펠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의미로 몽블랑을 향해 눈짓한 후 크레페를 마주 보고 섰다. 그녀가 아펠의 가슴 주머니에 검은 백합을 꽂아주는 동안, 아펠이 작게 읊조렸다.

    ‘이번엔 내가 널 지켜줄게.’

    * * *

    “내가 꿈에 나타나 정보를 누설한 보람이 있구나. 뒤로는 뢰드그뢰드를 위협하고 밀고하면서, 크레페에게는 약혼식도 전에 국보를 내어주다니.”

    디몬이 우습다는 듯 턱을 괴고 말했다.

    아펠이 눈살을 찌푸리며 테이블 의자를 뺐다.

    “여전한 악취미로군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훔쳐보는 것도 모자라… 그건 뭐, 변장술입니까?”

    그는 언짢은 내색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아예 디몬에게서 몸을 돌린 아펠이 그쪽에 시선을 주지도 않고 머랭을 팔에 안았다.

    “응?”

    디몬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아펠은 그와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펠이 디몬을 흘끗 쳐다볼 때마다 그의 모습은 바뀌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성인 크레페와 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현재 크레페의 모습이기도 했으며, 젊은 시절 팔미에 황비의 모습이기도 했다.

    ‘신은 보기만 해도 마음에 안정을 주는 존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펠이 입술을 짓씹으며 머랭을 내려다보았다. 첫날 디몬에게서 크레페의 미래 모습을 봤을 땐 어렴풋한 그리움과 평온이 느껴졌는데, 지금만큼은 그를 보는 게 제 마음을 대하듯 어지러워 심란하기만 했다.

    “흐음.”

    그래도 신이라는 이름이 헛것은 아닌 듯, 디몬은 금세 알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아펠의 심기가 더 불편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아펠, 그리 노여워하지 말거라. 나는 그저 증명하고 싶은 것뿐이야. 내가 너희의 행복을 방해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이제 부르지 마십시오. 제 행복은 제 힘으로 찾을 테니까.”

    “아하하, 그래. 자신만만한 게 보기 좋구나.”

    디몬이 팔미에 황비의 모습으로 싱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펠의 팔에 안겨 있던 머랭이 귀를 쫑긋하더니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네게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듣는 것도 재밌었는데 아쉽게 됐다. 크레페의 비유였다면 원작 소설의 비하인드 외전을 듣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겠지.”

    그녀가 크레페의 이름을 꺼내자 다시 크레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디몬은 아펠의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좋다. 그럼 네가 증명해 다오. 너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 * *

    그날부터 디몬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를 만났던 기억은 정말 꿈처럼 흐릿해졌다.

    하지만 아펠에겐 별 아쉬움이 없었다. 허전함을 느낄 새도 없이 크레페의 황궁 방문이 잦아진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녀는 위령 기도니 뭐니 하면서 황비의 작은 제사에까지 바지런히 출석 도장을 찍고 있었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아펠에 대한 걱정일 테다. 어쩌면 황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미안함이나 죄책감이 섞여 있을지도 몰랐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라 미안해.”

    크레페는 혼날 것을 예감한 어린아이처럼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엄마는 원래부터 몸이 약했거든.”

    “…….”

    크레페가 눈썹을 찡긋했다. 워낙 걱정이 많은 성격이니 그 대답이 더욱 그녀의 불안을 자극했을지도 몰랐다. 아펠이 뒤늦게 덧붙였다.

    “어차피 내가 추슬러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아펠은 크레페가 괜히 고민하길 바라지 않았다.

    황비의 죽음은 오래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한순간의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니라 쇠약성 질병이 진행된 결과였고, 자신의 소예언서에서 본 내용이기도 했기에 아펠에겐 마음을 정리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이내 그녀는 가뭄에 시달리는 어린나무처럼 목숨을 잃었으며, 가까운 이들의 눈물은 장례식이 치러지기 전에 말라붙었다. 오래전 비극을 각오한 아펠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였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디몬 님은…….”

    “응.”

    아펠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크레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믿어줄지 걱정하는 듯했지만, 아펠은 그런 크레페가 내심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도 그 신과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하면 크레페는 어떻게 반응할까?’

    물론 그런 말로 크레페의 불안을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저 상상에 그칠 뿐이었지만, 아펠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느라 크레페의 말을 잠시 놓칠 뻔했다.

    “신은, 자신을 보는 사람이 제일 보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보인대. 내가 진짜 성녀였다면… 아, 아니, 내가 신이었다면, 너한테 황비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도…….”

    크레페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아펠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나 싶어 가만히 말을 기다리던 아펠에게, 그녀가 당황해 물었다.

    “아, 아펠? 우는 거야?”

    “응?”

    아펠이 멍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펠의 뺨에 남은 자국을 따라, 눈물이 빗방울처럼 그의 손에 떨어졌다.

    “으이그, 역시 힘든 거 맞았잖아. 걱정 끼치기 싫었어?”

    크레페가 다가와 발돋움을 하고는 아펠을 보듬어주었다. 아펠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에 맺혀 있던 눈물이 크레페의 옷을 적셨다.

    “봐봐, 이렇게 어린애를, 황족의 위엄이 어쩌고 하면서 맘껏 울지도 못하게 하고.”

    크레페가 동생을 달래듯 아펠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정답이 아니었다. 아펠을 울지 못하게 한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아펠이 스스로 깨달은 것뿐이었다.

    울지 않았을 때 걱정해 주는 사람도, 울었을 때 위로해 주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디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젊은 시절의 황비만 빼고.

    아펠은 떨리는 손을 들어 크레페를 마주 안았다. 혹 힘을 주면 으스러지기라도 할까 가만히 손만 얹고, 그가 입안에서 중얼거렸다.

    “너밖에 없어. 너밖에.”

    그가 가만히 크레페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그래서… 너 없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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