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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8)화 (178/181)

178화 

【 외전 - 아펠 슈트루델 】

예사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는 쉬웠다.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아펠이 제 손목을 쳐다보았다. 크레페에게서 받은 팔찌가 왼 손목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역시 이상해.’

아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이 팔찌는 마나를 머금고 있었다. 크레페에게 듣기로는 원래 그런 특수한 소재로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이 팔찌뿐 아니라 살갗에서도 마나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말이다.

“어서 오렴.”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아펠이 휙, 몸을 돌렸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건 끝없이 늘어선 흰 책장과 거기에 들쭉날쭉하게 꽂힌 책, 어디가 출구인지 모를 넓은 공간뿐, 사람은 없었다.

“머랭, 안내해야지.”

그 말에 아펠이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인지 바닥에 있던 흰 강아지가 들었느냐고 묻듯 아펠을 올려다보고는 앞서 발걸음을 뗐다.

“…….”

머랭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폭신해 보이는 꼬리가 살랑거렸다. 흰 털과 대조되는 까만 발바닥이 보였다 가려졌다 하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었지만 아펠은 인상을 펴지 못했다. 이 상황이 여전히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머랭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그건 아직 크레페에게도 말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차라리 진짜 꿈이라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펠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느껴질 리 없는 현실감을 분명 느끼고 있었다.

별도리 없이 아펠은 머랭을 따라 걸었다. 책장을 지나자 서고 한가운데 있는 공간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크레페?! 아니…….”

놀란 마음에 반사적으로 외친 아펠이 입을 다물었다. 자세히 보니 크레페가 아니었다. 햇살보다 화사한 금발도, 라벤더색의 눈도, 하다못해 이목구비의 생김새나 말랑해 보이는 뺨까지 닮아 있었지만 눈앞의 여성은 아주 결정적인 부분에서 크레페와 달랐다.

아펠이 입을 다물자 상대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갸울였다.

“크레페의… 친언니십니까?”

“풉, 푸하핫!”

별안간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펠은 언짢은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 웃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아하하, 시간을 돌이켜도 운명적 이끌림이라는 건 대단하구나.”

그녀는 연신 키득거리며, 제 다리에 앞발을 올리고 낑낑대던 머랭을 안은 후, 멀지 않은 티 테이블 앞에 앉았다. 머랭이 익숙한 듯 그녀의 허벅지 위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렸다.

“앉으렴.”

“…….”

황제의 유일한 아들로 살아온 아펠은 이런 지시를 듣는 게 껄끄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 공간의 위엄 있는 분위기나 상대의 원인 모를 통찰력에 압도당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크레페의 친인척일 수도 있으니까…….’

아펠은 허리를 펴고 바로 앉은 후 곧바로 입을 열었다.

“누구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킥킥, 이제 와서 저어할 것 없다, 아펠. 너는 언제나 자칭 내 대변인이라는 자와 어울렸잖아. 크레페 말이야.”

크레페는 성녀다. 성녀가 대변하는 게 누구냐 묻는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신?”

“물론 지금 이 상황을 단순한 꿈으로 치부하는 것도 네 자유지만.”

설마, 싶어 꺼내본 말인데 상대는 부정도 않고 싱긋 웃었다. 아펠이 멍한 얼굴로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한한 공간, 쭉 늘어선 책장,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비과학적인 현상까지.

‘여기가 인생 서고라고 불리는 그……?’

“증명해 줄까?”

못 믿겠다는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상대가 손을 내밀었다. 금세 그녀의 손바닥 위에 책 한 권이 나타났다. 그게 뭐냐는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아펠에게 책을 건넸다.

『포동포동한 성녀는 인기가 없나요』

“크레페의 이야기가 적힌 신탁의 서란다.”

* * *

눈을 떠보니 언제나 그랬듯 제 방의 침대 위였다. 잠이 덜 깬 채 주변을 살피던 아펠이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책을 쥐었던 손은 비어 있었고, 머랭은 옆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잠들어 있었다.

아펠이 눈썹을 찡그러뜨렸다.

“이번 꿈은 평소보다 이상한데.”

“끼잉.”

아펠의 목소리에 잠이 깼는지, 머랭이 대꾸라도 하듯 소리 내고는 기지개를 켰다. 녀석은 부드러운 이불에 전신을 비비고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정전기가 일어나 온몸이 밤송이처럼 포슬포슬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케이크를…….”

아펠은 잊을 뻔했던 계획을 녀석을 보며 떠올렸다.

오늘은 크레페에게 투명화 마법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한 날이었다. 크레페에게 줄 방문 선물이라면 개꿈을 꿨다는 이야기보단 케이크 한 조각이 더 어울릴 것이다.

“푸흥!”

급히 방을 나간 아펠의 뒷모습을 보던 머랭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 * *

아펠은 의자에 앉아 그녀와 갈레트가 대화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크레페는 아펠의 투명화 마법을 꿰뚫어본 것도 모자라 거기에 딱히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그녀가 아펠에게 건넨 말은, 공간 이동 포트를 쓰면 될 걸 왜 비밀 통로를 썼냐는 핀잔뿐이었다.

전부터 크레페는 아펠이 마탑과 황궁 사이 비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꽤나 싫어했다. 그것도 상당히 오래전부터.

하지만 아펠은 여전히 비밀 통로를 사용했다. 공간 이동 포트가 크레페의 방과 가깝긴 해도 출입문이 잠겨 있을 때가 많아서, 대부분 크레페의 방 창문을 통해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나 때문에 창문을 열어놓고 있느라 감기에 걸린 적도 있으면서.’

아펠 나름의 배려였지만 크레페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아펠은 못내 크레페가 야속했다. 방문 선물로 가져온 자허토르테 케이크에는 눈을 빛내더니 정작 아펠은 뒷전으로 밀어둔 그녀의 태도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케이크 때문이 아니라 갈레트라는 친오빠 때문이었지만.

“그럼 여기…….”

크레페가 어색하게 손을 뻗어 갈레트의 시선을 돌린 후, 다른 손으로는 먼저 앉아 있던 아펠을 툭 쳐서 신호했다. 아펠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자리를 내줬다.

마탑 소속도 아닌 자신이, 그것도 이런 밤중에 크레페의 방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혹스러운 일이 생길 테니까.

‘쉬제트가의 갈레트라.’

아펠이 가만히 그의 이름을 곱씹었다. 크레페는 제 오빠가 학계에서 꽤나 유명인이니 뭐니 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듯했지만, 아펠은 다른 곳에서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았다.

‘역시 꿈에서 접한 건가?’

아펠에게는 또래 친구가 없었다. 얼굴을 튼 타국의 왕족이나 고위 귀족, 그들의 자녀 정도야 있었지만 당연히 친구라고 하기에는 어색했다.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강대국, 슈트루델의 황자를 어느 누가 편히 대할 수 있겠는가.

성녀 크레페를 빼면.

그녀는 아펠의 신분에 상관없이 그를 편히 대해주는 유일한 또래였다. 그 때문인지 아펠은 간혹 가슴 안쪽이 간지러울 만큼 달콤한 꿈을 꿨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아도 꿈에서 느끼는 행복과 크레페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 몰래 신탁의 서까지 본 건 미안하네.’

결국 아펠은 신이 건네준『포동포동한 성녀는 인기가 없나요』라는 책을 받아 들었다. 비록 꿈속에서 있던 일이었으나 이건 남의 일기장을 몰래 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크레페 본인이 직접 쓴 것도 아니니 그보다 악질일지도 모른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런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아펠이 새삼 반성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스스로 생각하던 것보다 크레페를 많이 좋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케이크를 질투했을 때 깨달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대체 어쩌다 그런 꿈을…….’

아펠이 자책하며 침대에 앉은 그때였다.

“엄마가 암살당할 뻔했다며?”

갈레트의 직설적인 질문을 듣고, 아펠이 눈을 크게 떴다.

* * *

『인생 스포일러를 피하는 법』

아펠이 눈썹을 찡긋하고는 제 소예언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짧지 않은 글을 다 읽는 동안 어른 크레페… 아니, 디몬은 맞은편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난번 꿈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역시 단순한 꿈이 아니죠?”

“이게 단순한 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말자.”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싱긋 웃었다.

아펠은 낯익은 얼굴에 자꾸만 흐려지려는 경계심을 도리질로 다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딱딱 들어맞는 상황이 꿈일 리가 없었다. 분명 디몬은 운명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크레페와의 약속 때문에 이리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것뿐일 테다.

“어때, 일은 잘돼 가?”

디몬의 질문에 아펠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예지의 신이라면서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고, 단지 제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날 놀리는 게 즐거운 걸 수도 있지.’

“…몽블랑 후작에게 정보 수집을 부탁했어요. 크레페를 걱정시키고 싶진 않으니까.”

몽블랑은 성녀 크레페의 존재를 제일 먼저 황제에게 보고한 인물이었다. 왕당파로 잘 알려진 귀족이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읽어버린 『포동포동한 성녀는 인기가 없나요』에서도 그는 크레페의 아군이었기에 그를 정보원으로 쓰는 데 별 망설임은 없었다.

“정보라는 건?”

“바움쿠헨의 뢰드그뢰드 후작에 대해서.”

“후후, 전생에도 그랬지만 역시 추진력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됐습니다. 전생과 비교되는 건.”

비교라고 해봤자 동일 인물이었다. 디몬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책을 챙겨 든 아펠이 곧은 자세로 일어났다.

“똑같은 실수는 안 할 거니까요.”

그가 의자에 앉아 있는 디몬의 눈을 직시했다. 그의 발언은 디몬이 보여준 책의 내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그래.”

디몬이 배시시 웃었다.

* * *

황비의 서거라는 비보를 들었을 때도, 얼마 후 황제에게서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들었을 때도 아펠은 냉정함을 잃지 않도록 주의했다.

“…알고 있었어요.”

“뭐?”

황제는 크게 놀라지 않는 아들을 보며 잠시 당황했지만, 아펠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는 그에 대해 더 캐묻지 않았다. 황비가 말해줬든, 어쩌다 알게 됐든, 마탑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대로 신탁의 서를 봤든, 이유야 아무래도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황제는 고개를 돌렸다. 보안을 위한 각종 마법이 걸린 이 공간은 그 성녀도 놀랄 만큼의 별세계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황제도 이 풍경을 마음 편히 감상할 수가 없었다. 장례와 책봉식 준비로 부산스러운 이들 중에 황비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몇 년 전부터 그녀는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해 침상에서 거의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성녀님은 다른 것 같았지만.’

“…황비님의 죽음에 아무런 꼬리표도 붙지 않게 할게요. 그렇게 말씀하시더군.”

황제가 혼잣말처럼 나직한 말을 꺼내자 아펠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 그분도 알고 계셨겠지. 우리와 성녀님, 셋 중 누구 하나만 잘못해도 화살은 팔미에를 향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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