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7)화 (177/181)

177화 

“뭐?”

갈레트도 덩달아 일어났다. 크바스가 쭈뼛거리며 파티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갈레트는 크바스를 맞아주려는 듯 다가가더니 그를 지나쳐 입구 바깥을 살폈다.

“젤라토 형은 안 왔어?”

제게 인사하기도 전에 터져 나온 물음에 크바스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죽어도 갈레트에게서 크바스를 환영한다는 말이 나올 리는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크바스는 금방 카눌레를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을 반겨줄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뭐야, 형이 왜 왔어?”

물론 카눌레는 환영 인사 같은 걸 못 하는 체질이었지만.

무슨 일로 왔느냐는 호기심에 꺼낸 질문이 크바스의 희망을 꺾었다.

내가 그에게 작은 연민을 느끼고 있던 찰나, 크바스가 언짢아하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공무 중이시다.”

“공무?”

“크흠, 처음 뵙겠습니다. 아펠 슈트루델입니다.”

아펠의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갈레트가 멍한 얼굴로 되풀이했다.

“아펠……?”

“슈트루델……?”

카눌레가 말을 받듯 중얼거렸다. 아펠이라는 이름을 모르더라도 슈트루델이라는 성씨는 모를 수가 없었다.

“피오르 드 론헤임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키슈 로렌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확인 사살 하듯 피오르와 키슈가 예를 올렸다.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갈레트와 카눌레도 그들을 따라 인사했다.

“…갈레트 드 루아 쉬제트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카눌레 드 보흐도 쉬제트가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플럼으로 온 게 아니라던 말뜻이…….

이제 와서 아펠을 다시 소개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끙, 앓는 소리를 내자 그사이 메이플이 의자에서 내려왔다.

“누나, 나두 해?”

“응? 으응.”

“메, 메이플이 태자 전하를 뱄습니다.”

아직 예법에 미숙해 태자 전하를 임신해 버린 메이플이 인사만 하곤 부끄러운 듯 내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픽 웃으며 작은 등을 토닥여 주었다.

“메이플?”

“응, 내 동생이야. 메이플 바펠 세자르 쉬제트.”

동생이 생겼다는 얘기를 한 적은 있지만 아펠에게 직접 소개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래, 아무렴 어떠랴.

메이플 덕분에 긴장을 푼 내가 직접 동생의 풀 네임을 소개했다.

“바펠이라니, 미들 네임이 나랑 닮았네.”

아펠이 내게 눈웃음을 지었다. 순간 그의 말이 ‘꼭 우리 아들 같다’라는 말로 필터링 돼 들렸다.

그의 미모에 홀릴 뻔한 내가 도리질로 정신을 추스른 그때, 아직 인사하지 않고 있던 마지막 사람이 아펠에게 예를 갖췄다.

“…파타슈 로렌이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아아, 익히 들었습니다. 뛰어난 마법 재능으로 키슈 로렌 님의 양자가 되셨다고요.”

“부족한 실력을 높이 사주신 덕분입니다.”

“아들! 아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키슈가 별안간 눈에 불을 켜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가 금세 좋은 곳을 발견했다는 듯 아펠과 파타슈를 발코니로 안내했다.

황태자를 파타슈의 뒷배로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키슈가 그냥 넘길 리 없었다.

피오르도 그녀의 무모함에 힘입어 마탑 예산 이야기라도 얹어보려는 듯 슬쩍 그들을 따라갔다.

“다녀올게.”

“응.”

나는 아펠의 고갯짓에 잘 다녀오라며 웃어주었다.

휴, 이만하면 대충 정리됐다고 봐도 괜찮겠지.

그제야 숨을 돌린 내가 메이플과 함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내가 그놈이라고 했던 거 들었을까?”

황제 직속의 제국 기사단을 노리고 있던 카눌레가 조금 불안하다는 듯 물었다.

“글쎄.”

갈레트가 건조하게 대꾸했다. 당연히 그런 대답으로 카눌레의 불안을 덜어내기는 무리였다.

“징그럽게 잘생겼다고 한 건…….”

“왜, 칭찬이라며?”

“…….”

내가 웃음을 삼키며 묻자 카눌레는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때 크바스가 아펠이 안 보이는 것을 확인하곤 성큼성큼 걸어 내 앞에 섰다.

“으으, 너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단장님한테…….”

그가 차마 말도 잇지 못하고 주먹을 부들거렸다.

몇 년 전, 크바스와 아펠은 내가 참석한 축제 연설 자리에서 서로 안면을 텄다. 비공식적인 일정이었기에 아펠은 황자 대신 플럼으로서 참석했으나, 황실 기사단의 단장 글레이즈가 호위로 동행하고 있었다.

반응을 보니 그때 글레이즈에게 찍혀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형, 크레페한테 해코지할 거 아니지?”

갈레트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고개를 기울였다. 크바스는 아펠이 나간 발코니를 한 번 쳐다보더니 크윽, 소리를 내며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을 본 갈레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펠을 영 마뜩잖게 여기던 그에게도 크바스의 굴복은 감격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게 바로 권력의 단맛이라는 건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나는 내가 언젠가 했던 생각을 그대로 중얼거린 갈레트를 보며 남몰래 웃었다.

잠시 후, 에이미에게서 손님 얘기를 전해 들은 엄마도 귀빈을 맞으러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러나 아펠은 초대도 없이 온 불청객이 가족들과의 시간을 오래 빼앗고 싶지 않다며 금세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몰래라도 초대할 걸 그랬나,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데 아펠이 내게 손짓했다.

“응?”

무슨 용건인가 싶어 다가가자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크레페, 내가 무슨 얘길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그랬지?”

“응? 응.”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꾼 예지몽들, 아무래도 내 성인식에서 일어날 일인 것 같아.”

“무, 무슨 일?”

“성녀는 다 안다며?”

아펠이 장난스레 말하고는 허리를 숙였다. 쪽, 소리와 함께 뺨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라, 하는 사이 갈레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입에서 불길이라도 뿜을 듯한 기세로 뭐라 소리치려는 그를 엄마가 잽싸게 막았다.

한 박자 늦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하, 그때 봐.”

“으, 응…….”

나는 아펠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멋쩍게 남은 이들을 향해 돌아섰다.

키슈와 피오르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고, 파타슈는 딴청을 피우며 콧김을 내뿜었으며, 갈레트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고, 엄마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차라리 안 보련다.”

카눌레는 질색하며 중얼거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낯가림 때문에 엄마 곁에 붙어 있던 메이플이 별안간 앞으로 뛰어 나왔다.

“전하!”

메이플이 고사리 같은 두 손을 꼭 쥐고 외쳤다.

“징구럽게 잘생기셨써요!”

“…….”

엄마가 사태를 이해하지 못해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 나는 메이플이 보지 못하는 각도에서 카눌레의 발등을 밟았다.

“악!”

“…크흠.”

머쓱한 기분에 헛기침을 하고 앞장서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 나를 따라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내가 태연한 척 화제를 돌렸다.

“키슈 님, 아펠이랑 얘기는 잘 하셨어요?”

“그, 그럼요. 나중에 따로 뵙기로 했어요.”

키슈가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피오르도 그 뒤를 이어 덧붙였다.

“마탑 예산도 신경 써주신답니다.”

“으휴, 내가 얘기하고 있는데 슬쩍 숟가락이나 얹고. 네가 나서서 말하기엔 겁났나 보지? 누가 겁쟁이 아니랄까 봐.”

“겁쟁이라니, 지금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야?”

피오르가 언짢은 기색을 내보이자마자 키슈가 건수를 잡았다는 듯 맞받아쳤다.

“지금 마법 서약 안 하고 있는 것도 무서워서라며!”

“그, 그건…….”

피오르가 반사적으로 성녀인 내 눈치를 봤다.

나는 못 들은 척 의자를 빼고 앉았다. 마탑의 주요 일원인 피오르가 마법 서약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나는 그를 탓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비롯된 건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법 서약을 한다는 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혹 피하고 싶은 미래를 보게 되더라도 그것을 신의 뜻이라 받아들여야 한다니, 두려울 만도 하지.

나나 아펠이 진취적일 뿐 보통은 몽블랑처럼 체념하고 자포자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신탁의 서를 보지도 않고 불태워 버린 키슈는 논외다.

“그나저나… 전하와는 무슨 사이예요? 그때 보자는 얘기는 또 뭐고.”

키슈가 의자를 빼 앉으며 조심스레 내 눈치를 보았다. 아펠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에 의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다들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있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애써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아아, 아펠의 성인식 날… 저 아무래도 거기서 청혼 받을 것 같아요.”

“…예?”

피오르의 얼빠진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침묵이 찾아왔다. 내심 갈레트의 불호령과 엄마의 당황 어린 질문 공세 같은 것을 예상하고 있던 나는 슬그머니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무서운데?

드르륵.

갑자기 키슈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

피오르가 당황해 물었지만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딘가를 향해 걸었다. 파타슈는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테이블에 차려져 있던 딸기를 먹기 시작했고 카눌레는 쯧, 혀를 찼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엄마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바, 받아들일 거니? 너무 어린 나이잖아. 후회 안 하겠어?”

-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니?

- 후회 안 해?

엄마가 꺼낸 질문에 자연스레 지난 생에 들었던 아빠와 카눌레의 목소리가 겹쳤다.

내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후회 안 해요.”

“크레페흐흑!”

타이밍을 노리기라도 한 듯 갈레트가 울분을 터뜨렸다. 놀란 엄마는 내게 사정을 묻는 것도 뒤로 하고 갈레트를 달랬다.

“메이플, 넌 저렇게 크지 마라.”

카눌레가 메이플에게 케이크를 덜어주며 말했다.

“큰형 왜 구래? 결혼은 조은 거 아냐?”

막 메인 요리를 가져오던 에이미가 헉 소리를 냈다.

“겨, 결혼이요?!”

“예? 누가요? 진짭니까?!”

홀 밖에 있던 마르크도 그제야 단어를 캐치하고 끼어들었다.

“…….”

난장판이 따로 없네.

나는 부연설명 해줄 기력도 잃고 고개를 저었다.

* * *

“저 왔어요.”

잠시 후 키슈가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돌아왔다. 손에는 공책이 들려 있었다. 제목은 익히 들었던 『크레페 며느리 삼기 대작전♡』이었다.

“…피오르. 그거.”

힘 빠진 말을 못 알아듣고 갸우뚱한 피오르가 곧 아, 탄성을 내뱉더니 바닥에 증폭진을 띄웠다. 키슈가 짧게 마나를 불어넣고 공책을 집어 던졌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그녀의 공책에 불이 붙었다.

이건… 위로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파타슈가 자리에서 일어나 키슈를 토닥여 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한층 심란해졌다.

대리석 바닥에서 그녀의 야심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게 있어 나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크레페?”

“아, 금방 올게요.”

따라오려는 엄마를 저지하고 후다닥 내 방에 다녀왔다. 숨을 고르기도 전에, 나는 가져온 것을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저건 뭡니까? 엄청 오래전에 쓴 것 같은데.”

피오르가 물었다.

『내 인생 공략집』에 금세 불길이 옮겨붙었다.

나는 소매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제 필요 없는 거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