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는 너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176)화 (176/181)
  • 176화 

    카눌레는 아랑곳 않고 메이플의 포크에 딸기를 찍어 돌려주었다.

    “자.”

    딸기는 메이플이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메이플이 싱글벙글하며 포크를 받아 들었다.

    ‘이게 동쨍이에요?’

    카눌레한테 그런 말을 듣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린 날 대할 때와 천지 차이로 메이플을 챙겨주는 것을 보니 심경이 복잡했다.

    카눌레 오빠도 철이 들긴 드는구나…….

    “또 올 사람은 없지?”

    갈레트가 물었다.

    “응. 따로 초대장도 안 돌렸는걸.”

    “어머, 정말요? 그럼 여기 있는 유일한 외간 남자는 우리 파타슈뿐이네요?”

    무슨 상상을 하는지 키슈가 수상쩍게 웃었다.

    “…….”

    날이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지니 더 이상 좌시하고 있기도 민망했다. 나는 뭐라 한마디 할 생각으로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 피오르가 키슈의 뒤통수를 때렸다.

    “악!”

    “가만있자니 아까부터 성녀님께 무슨 무례한 말이냐?”

    “넌 아들이 없어서 내 마음을 몰라, 이 벽창호야!”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파타슈가 한숨을 내쉬고는 익숙한 듯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브라우니는요?”

    “아, 뒤뜰에서 혼자 놀고 있어요.”

    이제 브라우니도 완전한 성체겠다, 더 이상 존재를 숨길 필요도 없으니 가끔씩 마탑에 들러 연구 등에 협조만 해주면 족했다.

    “그렇군요.”

    짧은 문답 후에 파타슈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

    한때는 애 아빠 소문까지 돌았던 상대였는데… 헤어진 전남편을 만나면 이렇게 어색하겠지……?

    “자, 누나두 케이크 조아하잖아. 여기 앉아.”

    메이플이 비어 있는 옆 의자를 팡팡 쳤다.

    완전히 김이 샌 내가 픽 웃으며 그 자리에 앉자 메이플이 “아아~” 하며 포크를 내밀었다.

    “크레페는 가나슈를 더 좋아하거든? 자.”

    잽싸게 내 남은 옆자리를 차지한 갈레트도 내 입가에 초콜릿을 가져다 댔다.

    “…….”

    여러분, 저는 부끄럽습니다.

    차마 말로 하지 못한 감상을 혼자 삭이고 있던 그때 카눌레가 턱을 괴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형이 빨리 결혼했으면 메이플만 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크흠.”

    갈레트가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포크를 거두어 갔다.

    한차례 웃음을 터뜨린 나는 괜찮다며 메이플의 손을 밀어내고 가나슈를 집어 먹었다. 두통이 날 만큼 꾸덕하고 진한 단맛이 입안 가득 차올랐다.

    나를 질린 얼굴로 보고 있는 파타슈 뒤로 문득 피오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성녀님께 무슨 무례한 말이냐고?

    남 일처럼 그들의 말씨름을 바라보던 와중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내 인간관계는 꽤나 많이 변해 있었다. 지난 생과 달리 젤라토는 내게 존댓말을 썼고, 마탑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공적인 자리에서의 아빠도 날 대할 때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학교에서 본 에클레어도, 날 성녀님이라고 불렀지.

    …성녀라는 건 꽤나 고독한 자리구나.

    초콜릿이 진하다 못해 씁쓸했다. 고개를 숙인 나는 남아 있는 쓴맛을 없애려 연신 침을 삼켰다.

    그때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크레페?”

    더 올 사람이 없었기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키슈와 피오르 너머로, 아펠이 문을 지나 들어왔다. 그가 놀란 내 얼굴을 보고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크레페? 왜 그래?”

    갈레트가 내게 물었다.

    “으, 응?”

    얼떨하게 그를 돌아보자 키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누가 크레페 님 이름 부르지 않았어요?”

    “나도 들은 것 같은데.”

    투명화 마법을 쓴 상태구나.

    피오르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펠이 바깥에서 얘기하자는 듯 손짓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여기가 파티장인 줄은 어떻게 알고 왔느냐 등등 물어볼 것은 산더미였지만, 아마 비밀로 온 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우웅, 빨리 다녀와아.”

    여전히 딸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메이플이 입을 우물거리며 대충 인사해 주었다.

    “뭔가 마나에서 이상한 느낌이 드는데…….”

    파타슈의 중얼거림은 못 들은 척,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홀연히 나타난 아펠이 앞장서서 나를 뒤뜰로 이끌었다. 파티장을 찾으면서 이곳도 발견한 건지, 그의 발걸음은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아펠이 가제보에 들어섰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 멈춰 섰다. 이곳에 아펠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전생의 안 좋은 기억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바닥에 흐드러진 검은 백합, 꽃송이 사이로 희게 빛나던 그의 머리칼, 죽으러 온 거냐는 내 물음에 부정도 않고 사과하던 그의 입술.

    바로 이 테이블 위에서, 그는 죽음을 선택했으니까.

    “괜찮아.”

    내가 뭘 떠올렸는지 아는 사람처럼 아펠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가 손수건을 펼쳐 의자에 깔아주며 말을 이었다.

    “이만큼 나왔으면 이제 편히 얘기해도 될 거야.”

    아직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의자에는 그의 손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그것을 본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아냐, 그래도 딴 데 가서 얘기하자.”

    “그럴래?”

    나는 그의 손수건을 걷어 돌려주고, 걸으면서 얘기하자며 앞장섰다.

    내 생일 때쯤엔 언제나 연보라색 등나무꽃잎이 벚꽃처럼 휘날렸다. 내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아펠에겐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바로 용건을 꺼내는 대신 정원을 둘러보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오랜만이라고?”

    “꿈에서 봤거든.”

    아펠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내 기분은 영 떨떠름했다. 투명화 마법의 영향으로 존재감이 옅어져 있었기에 그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전 삶에서 아펠은 자신의 소예언서를 발견했다. 그는 거기에서 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나와 아펠의 행복은 요원해졌다.

    다행히 그 일은 이번 생의 내가 완전히 바꿨다. 그러나 마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꾼다던 예지몽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펠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퉁명스러운 말이 터져 나왔다.

    “칫, 대체 무슨 얘길 얼마나 알고 있는 거야? 사람 헷갈리게.”

    그가 기다렸다는 듯 맞받아쳤다.

    “너만큼?”

    “응?”

    순간 내 눈동자가 떨린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풋, 농담이야. 내가 알긴 뭘 알겠어.”

    “진짜아!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는데?”

    “무슨 일은.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러 왔지.”

    아펠이 눈을 휘며 고요히 웃었다.

    “으휴.”

    내가 덩달아 김빠진 웃음을 짓고는 삐친 척 팔짱을 꼈다.

    놀림받은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서고에서 읽은 아펠의 이야기는 차마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의 목적은 오직 나와 함께하는 행복뿐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희생시키기도 했다. 그만큼 여유 없고 간절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마저 포기할 정도로.

    그것보단 지금이 훨씬 낫잖아.

    “…아펠?”

    조용해진 그가 어색해서 이름을 한 번 불렀다. 아펠이 내 왼팔을 어깨부터 쓸어 팔짱을 풀게 하곤 에스코트하듯 손을 받쳐주었다.

    손등에 입맞춤이라도 할 듯한 자세로, 그가 새파란 눈동자를 치켜 내 눈을 마주 보며 물었다.

    “아직 내가 준 팔찌 하고 있네?”

    “구, 국보잖아.”

    괜히 부끄러워져서 손가락을 오므렸다. 아펠은 내 손을 놓치기라도 할까 꽉 잡아당겨 나를 품에 안았다. 눈으로 확신할 수 없던 그의 존재감이 온몸에 느껴졌다.

    겨울의 들꽃처럼 시린 향기도.

    역시 이번 생의 아펠도 나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이 팔찌를 줬던 건가?

    문득 확인하지 못한 의문이 스쳤지만 시간 정지 마법에라도 걸린 듯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물끄러미 아펠을 올려다보았다. 아펠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곧 그의 마나가 내 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우리 둘만의 공간.

    그때였다.

    “삐이!”

    느닷없이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아펠을 밀어냈다.

    아, 맞아. 브라우니가 뒤뜰에서 놀고 있었지.

    뒤늦게 민망해진 내가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아펠이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내는 것으로 투명화 마법을 풀었다.

    한 손으로 머리칼을 턴 그가 수줍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갈까?”

    - 와볼래?

    아펠의 앳된 목소리가 겹쳐졌다.

    옛날부터,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아펠이었다.

    마탑에서 디몬을 만났던 그날, 힘든 내 앞에 네가 나타났기에, 네가 있어주었기에 나는 크레페로서 살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네가 앞으로도 내 옆에 있어주겠다고 말해줘서.

    - 내가 알긴 뭘 알겠어.

    그래, 넌 잊어버리는 게 나아.

    내가 짊어질게. 이젠 없어진 너의 옛날 죄까지.

    “응.”

    웃으며 대답한 내가 가만히 그의 손을 맞잡았다.

    * * *

    “저, 저놈은…….”

    갈레트가 나와 함께 들어온 아펠의 얼굴을 알아보고 철천지원수라도 마주친 듯 중얼거렸다.

    ‘내가 프러포즈했다’고 말실수한 그날 이후 나는 갈레트 앞에서 아펠, 아니 플럼의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아직 아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니, 역시 프러포즈 사건이 충격적이긴 했던 모양이다.

    “누군데?”

    카눌레는 아펠과 일면식도 없었다. 그가 묻자 갈레트가 탐탁잖아하는 표정 그대로 대꾸했다.

    “쯧, 플럼.”

    “아아, 크레페 생일마다 선물 보내던 그놈? 징그럽게 잘생겼네.”

    “징구럽게 잘생겨따…….”

    메이플이 새로운 표현을 배웠다는 듯 되풀이했다.

    “크흠. 오빠, 이상한 말 가르치지 마.”

    내가 테이블에 다가가며 그 이상 실례되는 말이 나오지 않게 제지했다. 플럼이 아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키슈와 피오르는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내 눈치를 살폈다.

    “칭찬인데 왜.”

    카눌레의 뻔뻔한 말이 이어지는 사이 아펠이 내 옆에 섰다.

    하지만 애초에 아펠은 초대객이 아니었다. 빈 의자가 없었기에 나는 그가 앉을 자리가 준비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려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갈레트가 답이 뻔한 질문을 던졌다.

    “크레페, 네가 초대한 거야?”

    “아, 그건 아닌데…….”

    “그럼 불청객이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로챈 갈레트가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오빠아!”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걱정되는 마음에 인상을 찌푸리자 아펠이 나를 말렸다.

    “괜찮아, 크레페. 인사만 하러 온 거라 식사 전에 돌아갈 거거든.”

    “여기까지 와서 식사도 안 하고 간다고?”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나 아펠의 다음 말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깜빡 잊고 말 못했는데, 실은 나 플럼으로 온 거 아니야.”

    “응?”

    수수께끼 같은 말에 의문을 품은 것도 잠시, 곧 에이미가 파티장에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호위로 오셨다는 분이 있는데, 들라 할까요?”

    “호위 기사를?”

    기사는 파티장 밖에서 기다리는 게 보통이었다. 카눌레도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에이미가 그리 묻는 것이 이상했던 듯 되물었다.

    에이미는 대답 대신 출입구에서 한 걸음 비켜 섰다. 문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나도 그녀가 왜 그런 고민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카눌레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바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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